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4)

1) 가치 있는 것?

앞에서 글은 이렇게 끝났다.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답하려는 시도로부터 주체철학의 인간론이 시작된다.

인간론 가운데 가치론의 영역에서 주체철학이 마르크스 철학과 구별될 것 같지는 않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행복이 계급해방에 달려 있으므로, 개인의 행복보다는 계급해방이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념이라 하자)이라 생각했다. 주체철학 역시 이런 마르크스의 추론에 동의할 것이 틀림없다.

주체철학에서 자주성이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라는 두 가지 해방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두 가지 해방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이 곧 자주성의 요구이다. 자주적 요구라는 의미가 계급해방보다 확장되었기는 하지만 주체철학에서도 역시 이것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 이념임에 틀림없다. 

2) 혁명성을 회복하는 길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적 길을 다시 되찾는 길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고 다만 실천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원인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해서 주체철학은 인간론 가운데 실천론의 영역을 전개한다. 바로 이게 도덕론이자 곧 심성론이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데 탁월하게 기여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치론의 영역에서도 다른 철학 이론들을 능가했다. 그러나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심성론의 영역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대체로 계몽주의에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계몽주의란 지덕 일체론, 지행 일치론이다. 즉 좋은 것(옳은 것)을 알면 사람은 따르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계몽주의는 진짜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계몽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굳이 실천론을 전개할 필요는 없었다.

서구에서도 실천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낭만주의 계열의 철학은 이런 실천론을 전개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 다만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대체로 계몽주의의 전통에 따랐다는 이야기이다.

3) 유학의 실천론

반면 동아시아의 마르크스주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이점에서 구별된다. 이미 중국의 마오에게서도 어느 정도 실천론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하지만 역시 가장 깊이 있게 이런 심성론의 영역을 전개한 것은 주체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역사적 원인이 가장 핵심이 될 것이다. 한국의 마르크스주의는 복잡한 종파투쟁을 전개했고 국내보다 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주의자와 함께 투쟁했다. 그 간고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간고함 때문에 오히려 이런 실천론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체철학이 독특한 한국철학의 전통을 계승하기 때문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란 이기론 등의 이론적 영역에서는 중국의 유학을 거의 그대로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학의 기본적인 덕목인 오륜을 실천하는 문제, 즉 도덕론이나 심성론의 영역을 보면 비로소 한국 유학의 독특성이 드러난다. 한국의 유학은 이 영역에서 중국 유학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조선조 초기의 소학운동에서부터 이런 운동이 일어났다. 그 뒤로 의병론 등 실천운동에 이어서 이론적으로 ‘사단칠정론’이나 ‘인성과 물성의 동이(同異)론’ 등이 전개되었다. 조선조 유학적 토론의 백미는 모두 이런 도덕론, 심성론의 영역에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를 지배했던 성리학은 도덕론을 전개했지만 아직 상당한 정도 억압적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도덕 자체가 삼강오륜 등 봉건적이었고 실천에서도 권력을 이용한 도덕적 강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런 유학의 봉건성이 풍부한 실천론을 은폐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 등장한 양명학(강화학파)은 인간의 양심을 강조하면서 자주성에 기초한 도덕론의 토대를 놓았다. 강화학파의 양명학은 소학운동의 발전 선상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와 결합하여 한말의 신민회(또는 국민회)의 자주사상의 토대가 된다. 이 자주사상이 김형직 목사를 통해 후일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된 것으로 짐작한다.

이런 철학적 전통이 있었기에 조선의 마르크스주의라 할 수 있는 주체철학 역시 독창적인 심성론 또는 도덕론을 전개한 것으로 생각한다.

4) 우리 힘으로 해보자

주체철학의 도덕론 또는 심성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많은 문제가 관련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여 최대한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여 보기로 하자.

여기서 자주성의 또 한 가지 의미가 등장한다. 자주성의 첫 번째 의미는 민족 독립이며 계급해방이라는 사회적 요구이었다. 이런 사회적인 자주성에 대한 요구가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가치론적 차원에서의 자주성이다. 이는 우리 행위가 실현하는 목적의 차원에서 언급된 것이다.

이런 자주적 요구를 전제로 할 때, 이를 실현하는 데에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는 방식과 남의 힘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때로 남의 나라의 힘에 의존해서 독립을 쟁취하는 경우가 있다. 쿠바가 그렇다. 쿠바는 19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미국의 힘에 의존했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 들어 쿠바는 1960년대 말 카스트로의 혁명 전까지 형식적으로 독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그 잔재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것이 쿠바 섬의 오른편 끝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이다.

계급해방도 마찬가지이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대부분 소련의 힘에 의존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했다. 그 결과 동구 사회주의에서 지도자들은 친소파로서 소련의 압력이나 힘에 쉽게 굴복했다. 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지자 도미노처럼 동구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졌던 것도 이런 출발점에서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역사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독립운동이든 계급해방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주적 요구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남의 힘으로 달성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달성한다는 것은 목적의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자주적 요구, 즉 계급적 해방과 민족 독립이 목적의 차원에서 자주성이라면 자기 힘으로 달성한다는 것은 실천의 차원에서 자주성이다. 이것이 자주성의 두 번째 의미이다.

5) 의문?

여기서 자기 힘으로 달성한다는 의미에서, 즉 실천적 차원에서 자주성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굳이 자기 힘으로 자기의 요구를 달성하려 할까?

비근한 예를 들어 공부를 할 때 스스로 학습하지 않고 타인(학원이나 괴와 선생)에 의존하면 성적이 더 빠르게 오를 수 있다. 이것은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렇다면 돈이 약간 들지만 남에게 의존해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굳이 자주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스스로 공부해야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사회이다. 이 경우 대중의 요구는 민주적 방식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요구를 실제 실행하는 것은 관료들이다. 대중의 자치는 극히 제한적 영역에서만 적용된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자치 사회이다. 대중은 자신의 요구만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힘으로 실행한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관료가 존재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치가 그쪽 사회의 원리이다.

이제 생각해 보자. 전문적인 관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서투르기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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