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3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세번 째 연재는 '조국해방전쟁이라며 울먹이던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편이다. 
▲ 연안파. 조선의용군 출산 정치단체인 연안파는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두봉,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로당 중앙위원 43명을 계파별로 나눈 것이다. 발라사노프 팀이 소련공산당에 보낸 보고서에 나온다.

* 연안파 12 -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박효삼, 윤공흠, 박일우, 한 빈, 박훈일, 김민산, 임 해.

* 빨치산파 4 - 김일성, 김 책, 안 길, 김 일.

* 소련파 8 - 허가이, 박창식, 김 열, 김제욱, 태성수, 한일무, 전성하, 김영태

* 국내파·기타 19 - 주영하, 장순명, 박정애, 한설야, 최경덕, 강진건, 장시우, 오기섭, 이순근, 김교영, 장종식, 김월송, 이춘암, 김려필, 명히조, 김욱진, 이종익, 정두현, 임도준.

김두봉 · 김일성 · 김 구 · 김규식 4김회담 어름(시간이나 장소나 사건 따위의 일정한 테두리 안. 또는 그 가까이)에 김 구가 김두봉에게 보내었던 편지이다.

▲ 백범 김구

백연 인형(仁兄) 혜감(惠鑑)

(백연은 김두봉의 호, 인형은 자애로운 형이라는 뜻으로 김두봉을 높여 부르는 말, 혜감은 ‘잘 보아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자기의 저서나 작품을 남에게 보낼 때에 상대편 이름 밑에 쓰는 말)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 · 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그 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넘길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流離丐乞, ,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음- 유리걸식과 같은 말.)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이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사(尤史, 김규식) 인형과 제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사람의 한 가지 마음이며 마음의 한 가지 도리)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이가 있겠나이까.

인형이여, 김일성 장군께는 별개로 서신을 보내거니와 인형께서 수십 년 한곳에서 공동 분투한 구의(舊義)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 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최속한 시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1948년 ○월 ○일

金 九

아래에는 통일공작원 김진계 증언이다. 조선로동당 평남도당 농업부 책임지도원으로 일하던 1962년이었다. 그러니까 김두봉이 1958년 3월 ‘종파분자’로 꼬집혀 평안남도 맹산목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책임지도원 동무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키는 중키이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대머리 할아범이었다.

“나는 김두봉이라고 합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김두봉 약력 줄임-지은이) 나는 이내 차분해져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소문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게 생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맘씨 순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내 아내는 평생 밥두 못 짓구 곱게만 지내다가 갑자기 농사두 하고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지금 치마끈두 바로 매지 못할 지경입니다. ……지도원 동무 …… 제발 목장 안에 있는 유치원 교양원이라도 자리가 있으면 배치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목이 메어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는 실주름 그어진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서 가련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태항산을 찌렁찌렁 호렁하며 내달리던 연안파 호랑이였다는 사실, 국민군이 김두봉이라면 벌벌 떨었다는 사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위원장(국회의장)이었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 소련장교들과 함께 한 김두봉 부부 (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진계가 들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맹산목장에서 일하는 사기꾼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돈과 양복을 뇌물로 바치고 잘 봐달라고 했다가 아까운 돈과 양복만 날렸다는 둥 벼라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김진계 증언은 이어진다.

가련한 늙은이의 몰상을 바라보는 순간, 죄야 김두봉에게 있지 젊은 아내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싶어 동정심이 솟아났다. 마침 그의 아내가 와서 인사를 했는데, 과연 소문대로 서른서넛 정도로 보이는 미인으로 팔십 고령의 김두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애절하게 호소했다.

“책임지도원 동무, 내레 생전에 농사일이라구는 해본 일두 없구서리 배운 거라구는 글밖에 없슴네다. 기러구설라무네 제발 유치원 교양원으로 배치시켜 주셨으면 덩말 감사하겠슴네다”

하지만 자꾸 매달려 간청하는 그녀에게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간부 인사를 배치하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사배치권은 군당책임비서에게 있으니까, 그분에게 말씀드려보죠.”

“꼭 좀 부탁합네다.”

그녀는 머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은근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마고 약속한 나는 며칠 후 당책임비서에게 김두봉의 처를 목장 유치원 교양원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상의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후에 들었는데, 김두봉의 처는 다행히 목장 유치원 교양원으로 배치되어 열심히 아동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두봉은 연안파 우두머리였다. 연안파에서 세운 정치 모임인 「조선독립동맹」이 머릿골이고 손발이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이다. 1945년 12월 박아낸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에 나오는 각 정당 및 정치단체 가운데 「연안조선독립동맹」편이다.

▲ 김두봉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단체는 1942년 1월에 국제정세에 호응하여 화북조선청년동맹(華北朝鮮靑年同盟)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동방약소민족대동맹 산하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 단체인데, 연안정권 지원하에서 지금까지 꾸준한 항일전을 계속하여 많은 무훈을 세워 왔다. 그리고 의용군의 총사령 김무정(金武亭) ××은 전형적 무인으로서 많은 청년들을 훈육해서 그의 인솔한 휘하 정예부대는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바이며, 동(同)장군은 부사령인 박효삼(朴孝三)(참모), 박일우(朴一禹)(정치)씨와 아울러 그 무명(武名, 용감함이 뛰어나 알려진 이름)이 화북과 동북 일대에 떨치고 있다 한다.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金枓奉), 부주석 한빈(韓斌) · 최창익(崔昌益), 기타 제씨가 근근(近近 ,머지않아. 또는 가까운 장래에) 귀국케 된다는데, 기(基) 일부 요인은 11월 20일경에 평양에 도착되어 김일성 ××과 회합하여 의견교환 중이라고 한다.

해방공간 평양에서 움직였던 정치 두럭여러 집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집단)은 다섯 개 동아리였다. 소련파, 연안파, 빨치산파, 국내파, 남로당파. 출신 성분에 따른 계급적 처지나 정치적·사상적 생각이 다름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라 동아리 모람(‘모인 사람, 단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해방 전 움직이던 바닥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 개 동아리 가운데 가장 떨치는 힘이 좋았던 것은 연안파와 소련파였다. (다음에 계속)

 

김성동 작가는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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