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3)

1) 가치론과 심성론 

이제 주체철학에서 인간론의 가장 핵심에 해당되는 자주성 개념을 검토해 보자. 이를 검토하기 위해 인간을 보는 또 하나의 틀에 대해 언급해야 하겠다. 그것은 곧 이론적 인식의 차원과 실천적 의지의 차원의 구분이다.

전자, 인식의 차원은 세계나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인식의 차원은 마침내 가치의 영역으로 나간다. 가치의 영역이란 곧 어떤 것이 바람직한(desireable) 것인가 또는 가치(value:-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다. 이런 가치 판단은 개인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가치론(또는 윤리학 ethics)이라 규정한다.

후자, 즉 실천의 차원은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힘을 말한다. 여기에는 주관이 개입한다.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도 내가 선택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자주 스스로 보기에도 무가치한 것을 선택하고 실행한다. 이런 선택과 실행은 주관이 개입하며, 이런 개입의 정도에 따라서 욕망의 힘에서 시작하여 감정을 거쳐 자유의지로 끝나는 일련의 실천 개념들이 출현한다. 이것을 다루는 영역이 심성론(또는 도덕론 moral theory)이다.

2)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이렇게 두 영역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치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느냐? 쉽게 말해 좋은 것인데도, 갖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서양철학에서 계몽주의 전통이 있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한다. 이 전통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그것을 선택하고 실행하고자 할 것이라는 원리에 기초한다. 간단히 말해서 지행 일치, 지덕 일치의 사상이라 한다.

이런 계몽주의적인 태도는 심지어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등장했다. 그게 브나로드(인민으로) 운동이다. 그 운동이란 대중들에게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도록 가르치려는 운동이었다. 가르치기만 하면 대중들은 저절로 불의와 착취에 대항해 투쟁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영역이 다르다는 것은 여러 증거를 가지고 입증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햄릿일 것이다. 햄릿은 그가 해야 할 바(가치 있는 것, 옳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그는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만다.

또한 사악한 인간의 모습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있다. 사악한 인간은 자주 스스로 악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려는 경우이다. 멀리 예를 들 것도 없이 우리나라 ‘일베’ 현상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런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가치 있는 것과 그것을 선택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 때문에 철학에서는 가치론, 윤리학 외에 따로 도덕론과 심성론이 전개되었다. 여기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 주로 교육적 차원에서 논의된다.

대체로 이런 심성론은 서양철학의 경우 낭만주의 계열의 철학이 주로 다루어 왔다. 낭만주의는 일찍부터 사악한 종교인, 아름다움에 미친 예술가, 우울한 몽상가, 정념에 빠진 사랑 등을 다루면서 인간의 욕망, 감정, 의지를 문제 삼았다. 동양철학의 경우는 같은 유교라도 성리학은 계몽적이다. 반면 양명학은 낭만적이다. 

▲ 칼 마르크스.[사진 : 구글 검색]

3) 사회적 요구 

이제 가치론과 심성론 두 영역 가운데 먼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따지는 가치론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서 철학적 가치론의 전체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가치론과 관련되는 것에 한정해 설명해보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인간의 가치는 욕망에서 나온다고 본다. 인간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도 다양하다. 개별적인 욕망은 자연적 사실이다. 그런 욕망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 구별의 기준이 이제 문제가 된다.

그 기준을 가지고, 여러 학파가 나누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의 기능에 도움이 되는 욕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술도 적당히 마시면 이롭다. 그러니 모든 욕망을 적당하게 추구하는 것, 즉 중용이 선이다.

쾌락주의자들은 욕망이 결과로 만들어내는 쾌락을 평가해 보려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어느 욕망이 더 많은 쾌락을 가지고 오느냐를 가지고 그들은 논쟁했다. 이 싸움에서는 19세기 후반 공리주의자가 승리했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쾌락을 느끼는 것이 선이다.

마르크스 역시 가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쾌락주의자는 개인적 욕망 가운데 우열을 가렸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서 욕망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다.

그는 욕망을,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했다. 개인적 욕망이란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욕망을 말한다. 사회적 욕망은 계급적 요구를 말한다. 그것은 곧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생산관계에서 종속적 처지로부터 해방되려는 욕망이다.

마르크스에서 개인적 욕망은 사회관계를 통해 만족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 욕망의 충족은 어디까지나 사회 계급적 요구의 충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서 개인적 욕망보다 사회적 요구가 더 가치 있는 것이다.

4) 마르크스주의 인간론의 한계

마르크스의 인간론은 특히 가치론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자연적 사실에서 사회적 요구, 즉 계급 해방까지 도출했으니, 누구나 쉽게 수긍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 인간론의 문제점이 등장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계급 해방이 개인적 욕망에 전제나 토대가 된다. 가치론으로 보면 사회적 요구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계급 해방은 수단이고 개인의 욕망 충족 행복이 목적이다.

때로 개인의 행복이 계급 해방이란 토대 없이 달성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일시적이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라도 그런 행복에 주저앉고 만다. 또 계급 해방의 길은 너무 험난하고 위험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말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대개는 위험한 일보다는 차라리 쉬운 노예의 길을 택한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자는 자주 혁명적 길을 이탈하여 개인의 구차한 생존을 도모하는 타락의 길을 걷는다. 마르크스주의의 타락의 효시는 소위 사민주의이다. 사민주의는 제국주의의 이익을 마치 자기의 이익인 것처럼 착각하는 대중 때문에 결국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대 들어오면 서구 사회가 발전하면서 기술 관료층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서구 자본의 초과이윤을 기초로 풍족한 삶을 누렸으니 점차 혁명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도 6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어느덧 안락한 삶이 만연하게 되었다. 사회의 자치 단위인 소비에트는 이제 구성원의 공동 소유물이 되었다. 그들은 모험을 택하기보다 현 상태에서 안주하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생산은 정체되고 사회는 60년대 후반에 고착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나타난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주체철학의 인간론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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