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세 항전의 흐름을 중심으로 본 우리근대사 2편
과거사들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면서,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깊어진다. 4.3항쟁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4.3항쟁이 왜 발발했는지, 투쟁의 성격은 무엇인지는 정립되지 않고, ‘민간인 학살’이라는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근대사에서도 이런 문제는 너무 많다. 예컨대 임오군란이 그저 쿠데타일 뿐이고 성격을 규정하지 못한데서야 근대가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까! 임오년 군인폭동을 세 번에 걸쳐 쓰면서 이 투쟁의 성격과 의미를 판단해보려고 한다. 1. 일본의 조선침략에 큰 타격을 준 1882년 군인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 2. 1882년 청나라의 조선침략과 대원군 납치의 진상 3. 임오년 군인들의 투쟁이 외세 개입의 명분에 불과했을까? |
◎ 민비 집권 후 나날이 약화되는 조선의 방위력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했다. 1866년 미국의 함대 《제너럴셔먼》호가 들이쳐도 버티며 승리했던 조선.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미국에 굴하지 않았던 조선이 5년 만에 일본 운요호의 함포사격 몇 번에 굴욕외교를 맺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쇄국을 강행했던 대원군을 쫒아내고 1873년 권력을 잡은 민비일당이 딱 3년 만에 나라의 국방력을 거덜 냈다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이후에도 민비일당은 국가의 방위력을 높이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조선군의 상태는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각 군현의 군총은 모두 허위 문건이며 속오군, 아병은 모두 거짓 이름이다. 군적에 등록된 이름은 모두 죽은 사람이며 군사훈련 대상자도 젖먹이 어린아이들이다’고 승정원에 보고될 정도였다. 군 재정도 고갈되었다. 백성들로부터 걷은 군포 액수는 많았으나 부패한 관리들이 대부분 가로채고 군영으로 가지 않았다. 1881년 군기시에서 갑옷 13벌을 만드는 돈을 선혜청에서 빌렸다는 자료를 보면 당시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1880년 5월 한 관리는 ‘지방의 영곤(도의 병영과 수영)과 고을들에 있는 무기들과 탄약들은… 모두가 낙후한 것들이고 숫자들도 거짓 등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1년 12월에 무위소,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합하여 무위영을 만들고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을 통합하여 장어영을 설치하였다. 이는 가뜩이나 부족한 군인수를 줄이고 군사비 지출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무위영 안에 설치된 신식 군대 별기군은 처음부터 정체성이 모호한 군사조직이었다. 조선정부는 《조선책략》의 영향으로 높아진 러시아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 줄 외세와의 연줄을 만들고 싶었던 차, 일본이 접근하여 소총 몇 자루 쥐어주며 창설한 것이 별기군이다. 즉 별기군은 처음부터 조선의 자위력 차원에서 모색했다기보다는 일본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창설되었다. 1881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야욕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의 농간에 넘어간 조선 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공포’라는 《조선책략》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곧이곧대로 믿은 결과였다. 일본 공사는 자기의 힘으로 별기군을 만든 것을 ‘수년간의 권유에 의한 성과’라 자평했으며, 훈련교관 호리모도는 다른 군인들과 반목을 조성하여 조선군대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 하였다. 사람들은 별기군을 ‘왜별기’라고 비꼬았다.
◎ 민비정권 하에서 군인들의 처지와 투쟁의 흐름
16세기 이후 《군적수포제》가 실시되면서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군포를 재정 원천으로 하여 한성 빈민들에게 군료를 주어 고용군으로 병역을 지게 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성의 빈민들은 대부분 고용군이 되어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성문 방비, 순찰, 도성의 건축과 수리, 하천 보수 등 잡다한 부역에 동원되며 얼마간의 식량을 받았다. 군졸들의 급료는 보통 쌀 4말 정도로 틈틈이 채소, 땔나무 등을 팔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민비일당은 군량마저 자신들의 향락에 탕진하면서 군인들의 급료도 주지 않았다. 특히 쌀을 일본으로 수탈당하며 쌀값은 2〜3배 치솟고 있었으니 부패한 권력자들은 한 톨이라도 더 일본으로 팔아넘기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급료를 줄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생활처지 개선을 위한 군인들의 투쟁은 1880년 이전부터 벌어졌다. 1877년 8월 훈련도감의 양용범이 체불된 군료 지불을 호소하자 주양승 등이 요구조건을 영문에 내다 붙이었다. 이 투쟁은 유배로 끝났으나 군인들을 반봉건 투쟁에로 나서게 하는 봉화가 되었다. 군인들은 ‘남산에 올라가 한성의 지형을 탐지하려고 한 일본의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도 벌였다. 1881년 5월 강화도의 《복심계》라는 조직에 망라된 군인 100여명은 한성 군인들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별기군의 임시 훈련소를 들이치려 하다가 비밀누설로 실패하였다.
1881년 8월에도 한성 군인들은 전국 각지 군인들과의 연계 밑에 일본공사를 처단하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민비정권을 없애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였다. 이 계획은 반일적인 관료 안기영, 이청구 등에 의하여 발기되었고, 많은 군인들이 망라되었다. 강화도 한성 군인들과 경상도, 충청도 군인들이 폭동군을 편성하여 일본 대사관이었던 청수관을 습격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침략자들을 처단하고 민비정권을 뒤집으려는 계획이었다. 또 강원도와 부산에서도 군대를 모집하여 덕원과 동래에서 일본인 처단을 계획하였다. 군인 강달선이 폭동을 지휘하고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왕궁에 쳐들어가 민비정권을 뒤집어엎기로 하였으며 별기군의 무기 이용까지 결정하였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만다. 이것이 이재선 역모사건의 실체이다. 민비정권은 군인폭동의 주도적인 인물 30여명을 체포 사살하거나 투옥하였다.
군인들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은 1882년에 되면 더욱 높아진다. 민비정권이 일본의 제물포 개항 압력에 굴복할 조짐이었으며, 4월에는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1882년 5월 충청도 유생 백란관은 민비일당의 죄행을 밝힌 상소문을 올리고 남산에 봉화를 올렸다. 정부에 체포된 다음 심문과정에서 자기의 뜻을 밝힘으로써, 국왕에게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나라를 파는 민비일당을 준열히 단죄하면서 ‘적의 기계가 정예하고 군함이 빠르다는 것만 알고 우리 백성의 강의한 애국심과 정의감을 모르는 통치배들이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 또 ‘정부가 정책을 바꾸지 않고 매국 관료들을 숙청하지 않는다면 무위영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돌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 상소투쟁은 군인들과 백성들의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민족적 각성을 더욱 높여주게 된다.
◎ 드디어 발발하는 임오년 군인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
임오년(1882년) 군인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의 직접적 동기는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인들에 대한 군료 지불사건이다. 정부는 군인들의 반정부 기운이 누그러지지 않자 그를 무마하기 위하여 밀린 13개월분의 쌀 중에서 1개월분 만이라고 지불하려고 서둘렀다. 쌀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1882년 6월5일 선혜청 창고인 도봉소에 군인들이 모여들었으나 절반 이상이 썩거나, 쌀겨와 모래 등이 섞인 것이었다. 김춘영, 류복만, 정의길 등 군인들은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믿고 날뛰는 창고지기들을 때려눕혔다. 민비정권은 즉각 김춘영, 유복만 등 4명을 포도청에 감금하였다. 그들이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곧 처형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이 6월9일 통문을 왕십리 일대에 돌렸다.
왕십리 일대는 군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한성 빈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다. 동료들을 구원하는 청원하러 가자는 통문에 대한 호응은 대단히 컸다. 다음날 왕십리 일대의 군인과 주민들은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서 무위영 대장 이경하를 찾아가 군인들 석방을 청원하였다. 이경하가 민겸호를 찾아가 직접 청원하라면서 발뺌하자 민겸호 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민겸호가 주모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고 죽이겠다고 하자, 군인들은 격분하여 ‘굶어죽건 법에 의하여 죽건 죽기는 매일반이다. 차라리 죽일 놈은 마땅히 죽여 억울함을 풀겠다’라고 하면서 집안에 가득 찬 비단과 주옥, 인삼, 녹용, 사향 등 진귀한 보물들을 뜰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민겸호는 담장을 넘어 대궐에 들어가 숨었다.(《매천야록》권1) 군인들의 투쟁은 마침내 비폭력적인 청원운동으로부터 폭력적인 투쟁으로 넘어갔다.
◎ 애국적 군인들, 사대매국 민비정권을 몰아내다
그들은 투쟁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하여 대원군이 거처하던 운현궁으로 갔다. 외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원군 시절이 사대매국 민비정권 통치보다 나았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운현궁에 틀어박혀 있던 대원군도 다시 정권을 장악할 야심을 품고 심복 부하들을 군인들 속에 파견하였다. 군인들은 동별영 무기고를 들이치고 조총, 환도,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정부는 군인들의 투쟁이 점점 조직적인 성격을 띠고 무장폭동에로 발전하자 군인들의 직속상관인 무위영 대장 이경하를 불러들여 ‘동별영으로 급히 가서, 폭동을 일으킨 주모자들을 즉시 붙잡아 심문하는 동시에 나머지는 해산시키고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일성록》). 그러나 군인들이 이경하의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쫒아버리자, 놀란 정부는 군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무위영 대장 이경하, 선혜청 당상 민겸호, 도봉소 단장 심순택을 파직시켰다. 무위영 대장 후임에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을 임명하고 좌우 포도청과 별파진을 동원하여 투쟁을 진압하려 하였다.
군인들은 대오를 3개로 나누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한 대오는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고, 감금된 군인들과 유생 백란관을 석방한 후 강화 유수 민대호 등의 집들을 습격 파괴하였다. 다른 한 대오는 별기군 훈련장 하도감을 습격하여 별기군의 민족적 각성을 자극하여 합류시켰으며, 호리모도를 처단하였다. 또 공사관으로 달아나던 일본인 3명과 순사 3명을 처단하였다. 또 다른 한 대오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였다. 관찰사를 찾아내지 못한 시위대는 무기고를 열어 주민들을 무장시켰다. 남대문에 진출한 투쟁대오는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고 기세를 올렸다.
당시 일본 공사관 서기였던 곤도는 ‘5시 반에 문 앞에서 소리를 치자마자, 산의 위아래에서 일제히 호응하니 마치 뇌성과 같았고, 돌은 비바람보다 더 조밀하게 날아오고, 화살도 많이 날아왔다.… 그들은 총을 발사하고… 충만한 기세는 산야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였다(《근대 조선사》일문). 일본 공사관에 있던 자들은 겁을 먹고 제 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도망갔다. 수백 명의 군인들은 그들을 뒤쫒아 인천으로 가서 공격하였다. 하나 부사 일행은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영국 배에 구사일생으로 구원되었다.
한편 이날(10일) 투쟁군이 동별영에 모여 민비권력의 최고 우두머리인 민비를 처단하기 위하여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이최응, 민겸호를 비롯한 악질 관료들을 처단하였으나 민비는 놓치고 말았다. 왕궁이 점령당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심복 허욱의 지휘 아래 군인 2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부인 민씨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했다. 고종은 1882년 7월 사과문과 함께 “지금 이후로 대소 공무는 모두 대원군 앞에 품결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정권이 바뀌게 된다. 대원군이 쫓겨난 지 10년만의 복귀였다.
이틀 동안의 투쟁을 통하여 투쟁군은 일본 침략자들을 쫒아내고 그중 13명을 처단하였으며 300여명의 사대매판세력들을 습격하여 집을 파괴하거나 처단하였다. 한양에서의 투쟁은 다른 지방들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었다. 서울로부터 동래로 가면서 사건을 목격한 일본인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백성들과 군졸들은 모두 왜놈들을 쳐죽였다고 하면서 기뻐서 춤추는데까지 이르렀다. 서울뿐 아니라 동래로 내려오는 도상에서도 왜놈들을 시원히 쳐죽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일본외교문서》일문 15권)(다음 편에 임오년 군인투쟁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