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리해보는 미일침략사 (7)

1882년은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고 서구 열강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해이지만 1876년 강압적 조일수호조규로 이미 조선의 경제는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민중들의 반외세투쟁은 점점 격렬해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 흐름을 이해하려면 이 6년 동안의 일본의 조선약탈의 실상부터 알아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일찍 근대화하여 강국이 되었다고 아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앞의 칼럼에서 말했듯이 일본은 자체적으로 청과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지원과 정치적 뒷배 덕분이었다. 1870년대 일본은 군수공업만 불균형적으로 발전했고 전반적으로 공장제 수공업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일본이 자국에서 생산된 상품 수출이나 자본 수출이 가능할 리 없으며 자체적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일본은 군함을 앞세운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조선을 경제적으로 침략하고, 약탈로 축적한 자본으로 다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추진한다.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준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위한 원시적 축적의 발판이었다. 

중개무역을 통한 엄청난 폭리와 약탈 - 무너지는 농촌의 자급자족적 경제구조

일본은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한 강화도조약 이후 유렵시장에서 밀려난 영국 면제품을 대량 수입하여 조선에 팔아먹는 방법으로 조선 수탈을 시작한다. 원래 질이 좋기로 유명한 조선의 무명천은 1523년만 보더라도 18만 필 정도의 우수한 대일 수출 상품이었다. 그러나 개항 후 일본 상인들에 의해 값싼 영국의 기계제 면제품이 밀려들어오자, 가내 수공업이었던 조선의 무명 생산이 몰락하게 된다. 관세의 장벽도 없이(조일수호조규 통상장정 무관세 조항) 쏟아지는 면제품 덕분에 수백 년간 해마다, 수만 필의 천을 수출하였던 조선이 천의 판매시장으로 전변되었다. 개항 후 5년간 수입 면제품은 351만 여원에 달하였는데, 일본으로부터 수입 총액 460만 여원 중 76%의 비중이다. 

무명을 팔아 수지를 맞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목화 대신 콩을 심어 시장수요에 대응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수공업 노동에 의존하고 있던 농촌의 모든 상품들이 서구 기계제 상품들과 경쟁에 부딪쳐 몰락하게 되어, 농업과 수공업의 유기적 통일이 파괴되고 자급자족하던 농촌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이 중개무역을 통한 부등가 교환에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짜냈는가는 원산 개항 후에 시장물가 시세를 보면 알 수 있다. 1881년 흰쌀 1환(일본의 5되)에 27∼30센(錢)이었고, 소 한 마리에 15∼18¥(엔)이었는데 일본이 가져온 사기 꽃병 1개는 40¥이었다.(일본 외교문서 일문14권 일본국제연합회 1963년) 일본이 사기 꽃병 1개를 주고 조선에서 쌀 75말 혹은 소 3마리를 약탈해갔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식량의 약탈 

식량이 항상 부족한 일본은 조선의 쌀과 콩류의 수탈에 중점을 두었다. 개항 직후 1877년 알곡의 대일 수출은 쌀 474석, 콩 1109석이었다면 3년 뒤인 1880년에 쌀 8만2756석, 콩 2만2405석으로 뛰어올랐다. 일본 상인들도 “외국 상품을 원가의 20배로 팔고 농산물과 원료를 헐값으로 수입, 5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아 이익을 보았다”고 말할 정도니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곡물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을 동원하여 가을에 쌀과 콩을 담보로 하여, 고리로 조선농민에게 미리 자금을 대부하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인은 경작 착수 직전에 농촌을 순회하거나 또는 조선인을 대리로 농촌에 파견하여 보통 수확고의 절반을 받는 조건으로 농민에게 자금을 대부하고 가을에 가서는 자기 몫을 받아내어 무역항에 보내고 있다.”《조선지(일본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에 관한 종합 연구자료)》. 부산항을 통한 쌀, 콩 수출은 1880년 총수출액의 68.2%였다면 1년만인 1881년에는 93.3%에 달하였다. 

여러 특권과 군사적 보호에 관세도 물지 않고 엄청나게 싼 값으로 조선 농산물을 약탈한 결과 개항 후 3∼4년 동안에 조선 쌀값은 2∼3배로 뛰어올랐다(《근대일선관계연구》조선총독부 중추원. 1940년). 이것은 개항 직후부터 조선의 만성적인 식량난을 초래하였으며 조선 민중의 반일감정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식량난이 아무리 심각해도 일본의 쌀 약탈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조일수호조규 통상장정에 쌀 반출을 막으려면 1개월 전에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실제로는 1개월 이전에 일본이 이미 일본 상인들에게 고지해야 하므로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조항이었다). 물가의 폭등은 경제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대한 사회적 문제였으며 쌀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각계각층 민중들로부터 규탄을 받고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개항 후 5년간 외국 침략자들이 약탈하여 간 물자는 쌀 152만9636원, 콩과 팥 55만7057원, 소가죽 82만9132원, 해삼 17만1382원, 미역 17만8018원, 명주실 17만4019원, 금 97만2242원, 은 8만7056원, 기타 60만6317원 총액 510만4859원이었고 이 중 농산물은 57%에 달한다. 

일본이 조선의 금‧은‧동을 약탈한 이유 그리고 방법

일본이 근대적 통화체제인 금본위제로 이행하기 위하여 금을 약탈하는 것은 절실했다. 금 준비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은 금을 약탈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곳이었는데 부등가 교환으로 합법적 금 수탈이 가능하며 또한 금을 자유로이 국외에 반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금, 은, 동을 비롯한 귀금속을 약탈해갔다. 

일본은 제1은행에서 10만¥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내어 1878년 6월 부산에 지점을 설치하고 1880년 사금 집합지인 원산, 1882년 인천, 1887년 서울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일본은 종이장에 불과한 불환지폐인 일본 화폐로 조선의 금, 은을 비롯한 귀금속을 대량 약탈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실례로 일본에 약탈된 금은 1877년에 2만2050원, 1878년에 78만5930원, 1879년에 13만4136원, 1880년에 46만9530원, 1881년에 53만132원, 1882년에 56만4101원이었다(《일본군국주의형성과정과 조선침략》 재일본사회과학자협회). 

일본은 ‘조일수호조규 부록 제7조’에서 일본 화폐를 가지고 조선에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으며, 조선 사람도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일본인이 조선의 구리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는데 그 목적은 종잇장에 불과한 일본 화폐로 조선의 금과 동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던 화폐는 주로 상평통보로, 금속 자체로서 실질 가격이 표기 가격과 거의 일치되어 있었으므로 화폐가치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개항 직후 5년간 일본이 공식적으로 약탈하여간 금, 은, 동만 하여도 105만9298원으로써 무역액의 21%에 달하여 조선 화폐의 대량 축소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화폐공황을 일으키고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하는 주되는 요인이 되었다. 

▲ 일본 제일은행권 화폐

와해되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

<통상>의 명목으로 감행된 일본의 약탈은 언제나 무력을 배경으로 한 폭력과 사기, 횡령 등 불법적인 방법과 함께 진행되었다. 검을 찬 일본 사무라이들을 몰고 다니며 불법적인 일을 해도 ‘치외법권’이라는 보호막이 작동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이처럼 무장을 하거나 조선 사람으로 가장하여 거류지역을 불법적으로 넘어가면서 온갖 폭행을 감행하며 침략적인 밀무역을 넓혀 나갔다. 드라마 《미스터 썬샤인》을 보면 일본 사무라이들이 진고개를 중심으로 몰려다니며 조선인을 협박하고 약탈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다. 일본 화폐를 거부하던 조선 민중들, 종잇장에 불과한 일본 돈으로 조선을 매수하려던 온갖 사기와 협잡들이 일상적인 일본의 조선 침탈의 풍경이었다. 

쌀값의 폭등으로 절대 다수의 농민은 더욱 빈곤해졌지만 지주들은 쌀을 수출하며 챙긴 이익으로 다시 땅을 늘려 지주 경영을 확대했다. 게다가 양반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더 많은 재부를 축적하려고 하였으며 농민들은 땅을 잃거나 소작농의 처지로 떨어졌다. 개항장을 비롯한 전국에서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과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조선 상인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처럼 개항 이후 조선 경제의 여러 분야에 침투한 일본의 약탈로 조선의 경제적 발전은 심각하게 억제되었다. 나라의 자주권과 재정적 토대도 심각하게 무너져서, 국가재정은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민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조선은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집권세력 민씨 일파는 여전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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