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리해보는 미일침략사 6

미국은 『신미양요』 등 수차례에 걸친 조선침략이 실패하자, 일본을 지렛대로 한 조선진출을 모색한다. 이것이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실제로 사주한 미국의 계산이었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에 가장 쾌재를 부른 것도 미국이었다. 그런데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왜 6년이나 걸렸을까? 냉소적인 일부 학자들의 견해처럼 조선이 먹을 것이 없어 미국이 중시하지 않은 탓일까? 또 조선이 빠진 채 미국과 청이 ≪조미조약≫문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조선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미국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중국 진출과 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보 때문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늦깎이 미국이 노린 곳은 중국 동북부였지만,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결전을 각오해야 했다. 미국은 조선침략의 발판을 구축한 일본을 러시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1878년 4월 미 상원 서전트 위원장이 제출한 결의안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일본은 지금 홀로 조선 동해를 지키고 있다. 미국이 하루빨리 조선에서의 개입력을 높여 일본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키워주고 무장을 강화시켜주면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일본의 강화는 러시아의 동해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러시아가 조선을 먹을 의도가 있다는 것은 얼어붙은 아무르 지역과 동해의 부동항을 연관해서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되면 일본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이 된다.’

일본이 미국을 대리하여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확충하도록 지원하고 사주하기 위해 미국 역시 조선에서의 개입력을 합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말이다. 일본이 단시일 내에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이유를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데, 처음부터 미국의 조선침략 대리군 역할을 자임하면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약탈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을 통한 <조미통상조약>의 중재와 좌절 

1878년 미 하원 결의안 채택 이후 미국은 곧바로 움직인다. 일본주재 미국공사 빙험에게 ‘일본 외무성이 조선에 보내는 『조미조약체결 권고 편지』를 받아놓으라’고 지시하고,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를 조미통상교섭 담당자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보낸다. 일본이 써준 소개 편지는 부산의 일본영사 마스께가 심동신 동래부사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한다. 심동신은 ‘양이가 조선에서 싸우다가 격멸된 것을 알면서도 일본이 수호조약을 알선하는 것은 조일교린우호를 해치는 처사’이므로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보낸다.≪고종실록≫

조선과의 즉각 교섭을 기대하고 부산까지 왔던 슈펠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직접 주선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노우에는 조선 예조판서에게 미국과의 국교를 권하는 글을 보낸다. ‘지금 조선을 위하여 말하노니... 미국의 청을 들으라... 만약 그렇지 않고... 그 해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라는 오만한 내용이었다. 두 달 뒤 일본에 온 수신사 김홍집으로부터 ‘조선은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답변과 함께 열어보지도 않은 ≪화친신서≫를 돌려받게 되어, 일본을 앞세워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는 또다시 파탄을 맞게 되었다. 

▲ 슈펠트(왼쪽) 황준헌의 조선책략(오른쪽)

청나라 이홍장 통해 중재교섭하려는 미국의 공작

이렇게 되자 슈펠트는 청나라를 이용하는 방법을 타진하기 위하여 1880년 7월, 주일 청 영사 하여장을 만나 조미통상조약 알선 가능성을 타진한다. 슈펠트는 러시아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려고 해군 무력을 극동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청나라는 해군을 강화하고 조선은 유럽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러시아 방어력을 높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당시 러시아는 원동지방에 집중하여, 청나라와 조선이 완충지대로 있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슈펠트는 청나라를 ≪조미조약≫ 중재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러시아의 정책을 사실보다 몇 배 과장하는 사기행각을 벌인 셈이다. 슈펠트가 하여장을 만난 지 4개월 뒤 발행된 주일 청 공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도 슈펠트의 공작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책략은 ‘이 시기의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급한 일은 없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사심 없이 조선을 도와줄 이상적인 나라로 미국을 묘사하였는데 김홍집을 통해 고종에게 전해져 고종의 균세외교로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펠트가 청의 입장을 타진할 무렵, 청의 실권자 이홍장은 구미열강에 온갖 특혜를 내어주고 그 대가로 군함을 사들이고 육해군을 훈련시키는 등 투항주의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대조선 영향력이 강화되고,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류큐(오키나와)까지 일본에 병탄되자 일본에 대한 견제심리가 매우 높아졌다. 또 러시아가 청의 이리지역을 강점하고, 러시아 함대가 조선 동해를 돌아 청 연해에까지 진출하자, 러시아에 긴장하게 된다. 이홍장은 일본과 러시아의 조선 진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이제이≫전략을 모색한다. 즉 자신의 주도로 조선과 구미열강의 통상교류를 유도하여 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조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며 동북3성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제기된 슈펠트의 조미조약 알선요청은 이홍장의 계책과 일치하게 되었다. 슈펠트는 미국 정부에 이런 정황을 보고하였고, 미국은 청나라를 적극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이홍장의 야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조미조약 교섭 주선을 이홍장에게 떠맡긴다. 이홍장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것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돌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듯이, 고종이 청나라에게 ≪조미조약≫의 교섭권을 송두리째 넘겨 준 것은 조선의 운명을 청·미 양국의 먹잇감으로 내어주는 망국적 행위였다. 이홍장과 슈펠트는 다섯차례에 걸쳐 ≪조미조약≫문을 만들며 각자의 이익을 협상하고 거래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에 설치된 천막에서 슈펠트와, 경리사 신헌을 전권대신으로, 경리사 김홍집을 부관으로 한 협상단이 전문 14개조로 된 조미수호통상조규에 도장을 찍는다. 또 청나라 마건충이 그 자리에 참가한다. 조선은 ‘쌀의 수출을 인천항에 국한한다’는 내용을 첨가했을 뿐, 청나라와 미국의 조율된 문서에 도장을 찍어주는 치욕적인 외교사였다. 

조미통상조약의 문제점

미국은 이 《조약》을 통해 미국 외교대표의 서울 주재권과 영사 재판권 등 <치외법권>, 개항된 모든 항구들에서의 <자유무역권>과 각종 <영업권> 등 정치적 예속과 경제적 약탈을 강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또 최혜국 대우를 규정함으로써 앞으로 새로운 <권리>을 끊임없이 강요할 수 있는 <특권>을 명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약》 제1조에서 조선에 대한 거중조정(居中調停)을 명시함으로써 이후 고종과 조선이 일본으로부터의 무력침공과 협박을 당할 때마다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착각을 갖게 하는 등 미국에 대한 환상과 의존심을 조성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조약 3조는 ‘미국 배가 조선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거나, 통상 항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식량, 석탄 등이 떨어졌을 때는 아무 곳이나 정박하여 폭풍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배를 수리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는 조선의 연해들을 전면적으로 미국에 개방한다는 규정으로 미군의 대륙침략 근거지를 확보할 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조약 4조에서 미국의 교활성이 더 잘 드러난다. ‘만일 조선이 이후에 법률 및 심의방법을 개정하여 미국이 자국의 법률 및 심의방법과 서로 부합된다고 인정할 때에는 즉시 미국 관리의 심의 권한을 철회하고 이후 조선 거주 미국인들도 조선의 지방 관리에게 넘겨 관할하게 한다.’ 이것은 조선의 법률과 재판 질서가 미국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했다는 점, 또 치외법권을 철회할 정도로 개혁이 진행되었는가를 판정할 권리는 오직 미국만이 가진다는 내용이다. 미국이 상투적이고 일방적인 수법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미통상조약이 동아시아 정세 흐름에 미친 영향

≪조미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홍장의 속셈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전환시켜,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며, 청의 독점적 지배를 강화하는데 있었으므로 ≪속국조항≫을 명문화하려했다. 그러나 이홍장의 의도는 일본을 무장시켜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 동북부에 진출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배치되므로 미국이 찬성할 리 없었다. 미국의 교활함을 얕본 이홍장의 어리석음! 그리고 이홍장을 믿은 고종과 민비의 무지! 그때부터 조선은 더 이상 빠져나가기 어려운 일제강점의 나락으로 내몰리게 된 것은 아닐지! 결국 이홍장은 ≪조미조약≫의 조인 연도인 <대조선 개국 491년> 문구 옆에 <청나라 광서 8년 4월초 6일>이라고 청나라력을 삽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뒤 청은 조선에 청의 관리 마건충을 들여보내어 조선과 유럽 나라들의 교섭 알선을 직접 주관하였다. ≪조미조약≫ 직후인 1882년 10월4일 청국과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조선은 오랫동안 번방이었다>라고 청의 종주권을 명문화함으로써 이 문제는 이후 청일전쟁의 첫 불씨가 되었다.

일제의 <조선침략사>는 미, 일의 조선침략사이다. 일본을 통한 ≪조미조약≫ 교섭 실패 뒤 청을 이용했지만, 미국은 일본의 군사무력을 앞세운 아시아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도, 1904년 러일전쟁도 미국의 지휘와 지원으로 이루어진 미·일에 의한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이었다. 1905년 『카쓰라-테프트 조약』에서 미국이 일본의 조선병합을 추인한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미국이 일본을 추인해 준 것이 아니고, 일제의 조선 강점의 주범은 처음부터 미국이다. 1980년대 한미합동사령관 위컴이 ‘한국인은 들쥐와 같다’고 말했다. 용서할 수 없는 막말이지만, 조선인의 자주적 저항의 역사에 대한 미국의 불쾌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일본을 구슬리고, 그 일본을 앞세워 우리 민족을 침략하는 정책! 신미양요 직후부터 간교한 미국의 아시아 침략을 위해 굳어진 기본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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