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20) 장수왕

백제공략을 위해 치밀하게 사전공작을 펼치다

장수왕은 우리들에게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평양천도로 그러한 기억은 더욱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장수왕 때 처음 채택되고 추진된 것이 아니라 멀리 고국원왕 때부터 구상된 정책이었으며, 광개토왕 때부터 본격화됐다. 장수왕 시대 전반기에는 평양천도 사업에 역량을 집중해야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방경락에 나설 수 없었다. 평양천도 사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44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백제 정벌 작전을 펼쳤다. 

장수왕의 백제 정벌 작전은 지속적인 군사적 타격을 통해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부 와해공작을 벌여 안에서도 흔드는 양면전략을 구사했다. 지금 남아있는 사료에는 440~450년대 백제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백제 개로왕이 472년에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436년 북연이 망하고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간 후 고구려가 기고만장해 자기나라는 고구려의 ‘능멸과 침략을 받고 전화가 계속된 지 30여년이나 됐으며, 이로 인해 재력이 탕진되고 점점 더 쇠약해졌다’는 하소연이 담겨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440년대부터 소규모 충돌이 빈번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처럼 갖은 충돌로 백제의 국력을 소진시켜 나가는 한편 백제의 국력 약화를 위한 내부 와해공작을 벌였다. ‘중 도림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건은〈삼국사기〉권 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 잘 기록돼 있다.

중 도림 사건이란 고구려 장수왕이 중 도림을 백제 왕실 내부에 침투시켜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 했던 사건이다. 그 경위는 이렇다. 장수왕은 백제 땅에 들어가 간첩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 때 중 도림이 와서 “저는 아직 불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인데 그럴 바에야 나라의 은혜나 보답하려합니다. 대왕께서 신이 어리석다고 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명을 완수하겠나이다”라고 자청했다. 장수왕은 기뻐해 그를 백제로 보냈다.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가는 것처럼 가장해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의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에 빠져 있었다. 도림은 왕궁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나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배워 꽤 묘한 수를 알고 있으니, 원컨대 왕의 좌우 측근신하들에게 이를 전달해 주오”라고 했다. 그러자 왕이 그를 불러들여 바둑을 두다보니 과연 국수였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들고 친근하게 대했다. 하루는 도림이 개로왕과 마주앉아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왕께서 저들 차별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저는 다만 한 가지 재주만을 갖고 있을 뿐 아직도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는데 허락해주시겠나이까?”라고 했다. 왕은 “그런 것이 있다면 한번 말해보라. 만약에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내가 대사에게 소망하는 바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도림은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로 둘러막혀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설치해준 요새지이며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방의 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즉 대왕은 마땅히 높은 권세와 부유한 재력으로 위세를 과시해야 하는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고 왕궁은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유골은 임시로 묻힌 채로 뒹굴고 백성들의 집은 강물에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왕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개로왕은 “알겠다. 내 이제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라고 하면서 온 나라 백성들을 다 동원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궁전과 누각, 축대와 전각을 웅장 화려하게 지었다. 또 한강에서 큰 돌을 날라다 돌곽무덤을 만들어 아버지(비유왕)의 유해를 장사지내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둑을 따라 제방을 쌓았다. 이 때문에 나라의 창고는 텅 비고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으며 나라가 누란지위에 처하게 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도림은 도망쳐 장수왕에게 이를 보고했다. 장수왕은 기뻐하며 백제를 치라는 명을 하달했다. 

장수왕은 백제 징벌에 앞서 신라를 달래는데 신경을 썼다. 중원고구려비에 따르면 470년 5월 고구려의 태왕조왕(장수왕)은 신라 매금(자비마립간)과 그 태자 공이 찾아오자 두 나라가 형제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상하간의 관계를 더 화목하게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매금의 의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했다. 신라 매금은 고구려 땅에 오랫동안 체류하다가 12월25일에야 우발성(경북 영풍군 순흥면)으로 되돌아갔다.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살하다 

백제에 대한 내부 와해공작이 성공하고 신라의 백제 지원을 봉쇄한 다음, 475년 9월 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고구려군은 백제 전방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백제 수도 한성(북한성)으로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개로왕의 그릇된 정사로 백제군의 무장장비는 보잘 것 없었고, 군사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고구려군과 싸움에서 맞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위급한 정세에서 개로왕은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태자 문주에게 “내가 어리석고 현명치 못해 간사한 자의 말만 믿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됐다. 백성들은 무력해지고 군사들은 약해졌으니, 위기가 왔으나 누가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여기서 사직을 위해 힘껏 싸우다 죽으려 한다. 네가 여기에 남아있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러니 피난을 가 나라의 명맥을 잇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라 가야에 구원을 요청했다. 

고구려군은 대로(제1벼슬등급)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의 지휘 아래 북성(북한성; 서울 북부)을 7일만에 함락하고, 이어 남성(남한성; 몽촌토성)을 공격했다. 백제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했으나, 고구려군은 4개 방향으로 나눠 성을 공격했으며,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성문을 불태웠다. 이렇게 되자 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항복하려는 자들이 속출했다. 개로왕은 수십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성문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 그를 붙잡아 재증걸루(그는 고이만년과 함께 원래 백제사람이었는데 죄명을 쓰고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람이었다)에게 데려갔다. 개로왕이 말에서 내려 재증걸루를 보고 절을 했더니 걸루는 왕의 낯에 세 번씩이나 침을 뱉고, 왕이 저지른 죄를 조목조목 들면서 그를 규탄했다. 그는 왕을 묶어서 아차성으로 보냈는데, 아차성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처형됐다. 

한편 백제의 원병 요청을 받은 신라는 자기들의 신세도 그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구려와의 동맹약조를 깨고 1만명의 지원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한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한성이 함락돼 허무하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훗날인 481년에 신라의 배신적인 백제 지원에 대해 강력한 징벌작전을 펼쳐 신라군의 저항을 돌파하고 호명성(경북 영덕으로 비정됨)을 비롯한 7개 성을 점령하고, 계속 전진해 미질부성(경북 영일군; 오늘의 경북 포항시)까지 진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역사서(<삼국사기>고구려 본기와 백제본기) 에 따르면 475년 전쟁에서 백제의 수도를 함락하고, 승리를 쟁취한 장수왕은 한성을 도로 내주고, 8000명의 백제 사람들만 붙잡아 왔다고 돼 있고, 백제는 고구려군이 비록 물러갔으나 한성은 크게 파괴돼 수도로서 다시 이용할 수 없어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돼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이때 고구려가 아산만 계선까지 다 차지했다고 볼 수 없으며, 그 후에도 최소 6세기 초엽까지 한성은 계속 백제 땅으로 남아있었다고 봐야 한다. 도대체 왜 장수왕은 이때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한 후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을까? 또 왜 한성지역을 백제에 도로 내주었을까?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드러난 자료들로 볼 때에는 이것은 고구려의 전략적 실책이라고 본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방면에서는 별 근심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더욱 더 남진해서 백제의 주요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고구려의 영토로 통합했었어야 했다. 그래야 백제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손쉽게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기회를 놓침으로서 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또한 신라가 성장해 고구려에 맞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줌으로써 고구려 중심의 삼국통일의 대업성취에서 결정적 기회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480년대 중엽~490년대 백제 신라의 연합을 제압하기 위한 고구려의 투쟁

▲ 장수왕 때 세운 중원고구려비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는 웅진(충남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후 481년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징벌타격 전투를 벌일 때 백제는 475년의 맹약을 무시하고 군사를 보내 신라를 지원했다. 고구려는 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보복 타격으로 482년에 백제의 한산성(북한산성)을 쳐서 함락했다. 484년 가을, 고구려는 지금의 충북 남부지방에서 신라의 북변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신라는 즉시 백제에 지원을 요청했고, 백제는 재빨리 군대를 충북 방향으로 파견했다. 이 때문에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는 무위로 돌아갔다. 485년 백제는 신라에 사절단을 보내 고구려에 반대하는 공동행동을 강화하기로 했으며, 493년에는 백제왕이 신라왕에게 청혼을 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백제–신라의 연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은 중대한 암초에 부딪혔다. 

고구려는 중대한 장애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해 나가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출했다. 489년 9~10월 고구려군은 신라 북변 과현을 지나 호산성을 함락했다. 또 494년에는 고구려 지역으로 침입한 신라군을 살수(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었던 강으로 지금의 달천강 상류에 해당)벌에서 격퇴했으며, 계속 추격해 견아성을 포위했다. 이때 백제군 3000명이 신라군을 도우러 들이닥쳐 고구려군은 일단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94년 전투 결과 백제와 신라는 남쪽으로 더 밀렸으며, 소백산 줄기계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시기에 고구려는 충북 청원군 지역을 다 차지했다. 495년(문자명왕 4년) 8월, 고구려는 백제의 치양성(369년 고구려-백제 첫 충돌이 있었던 치양성과는 다른 성이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할 수 없음)을 공격했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의 원병을 보내자 고구려군은 철수했다. 496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신라는 니하계선에서 이를 저지했다. 우산성은 다시 1년이 지난 497년 8월에 고구려의 수중에 장악됐다.

494~497년간의 투쟁에 의해 고구려는 중부산악지대에서도 소백산줄기 지역을 확고히 차지했다. 〈삼국사기〉지리지를 비롯한 역대 지리지들에 충북 일대의 ‘본래 고구려 군현’으로 기록돼 있는 고을 이름들은 이 시기 고구려 남부계선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중부산간지대에서 단양, 제천, 중원, 청원, 진천 일대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들 고구려 고을들은 광개토왕 시기에 그 일부 전부가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됐었지만, 괴산군 남부 청원군 지역은 494년 이후의 남진에 의해 새로 편입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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