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한미동맹] (6) 국공내전

영구 배치 수순으로 가는 사드

지난 10월19일 사드 배치를 공식화하는 행사가 경북 왜관에 위치한 주한미군 기지인 캠프 캐럴(CAMP CARROLL)에서 진행되었다. 사드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부대인 델타 배터리(Delta Battery) 제2방어 포병연대가 새롭게 단장한 사령부 건물의 커팅식을 가진 것이다.

문제는 이 포병연대 사령관이 “오늘의 이 행사는 한반도에서 사드 부대를 공식화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발언한 점이다. 해외 주둔 미군 장성을 대상으로 하는 미 국방부 매체인 <Stars & Stripes(성조)>의 보도 기사 제목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이 행사는 한국 사드 배치를 영구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 출처 : Stars & Stripes 홈페이지

사드 배치를 공식화하려는 흐름은 우리 국방부에서도 감지된다. 위 기사가 나온 후 1주일이 지난 10월26일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지금은 임시 배치되어 있고, 일반 환경영향평가가 끝나면 정식 배치하는 절차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영향평가에서 배치 여부를 최종 확정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선회하여 정식 배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위한 형식적 절차로서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사드는 중국을 감시하려는 미국의 군사 전략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다. 비록 임시라는 명목으로 배치되었지만, 위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정식 배치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한국 정부가 동참하는 꼴이다.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니 한미관계를 고려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한국이 편입되고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한국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어 왔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기 전부터 그래왔다. 특히 중국에서 벌어졌던 국공내전, 그리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 속에서 한국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좌우되었다. 

국공내전과 미국의 정책 변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아시아 파트너는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중화민국)였다.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전후 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 나라가 각축을 벌여왔던 유럽과 달리 중국의 패권이 1000년 넘게 유지되어 왔던 과거 아시아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의 그러한 구상은 합리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래서 미국은 중화민국과의 협력 아래 일본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반도에서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등의 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후 초기 미국은 국공내전의 발발을 우려했다. 국공내전을 막고 국공 연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주중 미국 대사를 앞세워 장개석과 모택동의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국공 연립정부는 결국 장개석이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 시도는 장개석과 모택동의 오랜 적대관계에 실패하게 되고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장개석 군대가 승리할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을 뒤집고 1947년 말에 이르러 국공내전의 승기는 모택동의 공산당군이 쥐게 되었다. 결국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고, 중국 본토는 공산당군이 장악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미국은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은 새로운 아시아 파트너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다시 부상한 것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신생국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의 대일 정책이 바뀌기 시작한다. 전범 재판을 받고 있던 군국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일본을 중심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새롭게 짜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독정부로 향하는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국공내전과 미국의 대일본 정책의 변화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를 초래했다. 이제 일본이 아시아에서 반공반소의 보루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우선적 보호국이 된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 역시 일본 보호를 위해 새롭게 모색되었다. 38선 이남만의 반공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이다. “38선 이남에 대한 확실한 통제는 일본을 방어하는 데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미국의 새로운 한반도 정책의 모티브였다. 

미국은 신탁통치라는 기존의 구상에서 탈피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 밟기에 돌입한다. 그 첫 공정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은 소련을 비롯한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의 정책에 우호적인 국가들이었다. 미국은 이들 나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점령군 주관 하에 선거를 감시하고, 인구 비례로 대표를 선출한다”는 자신의 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38선 이북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구상은 자신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38선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 정치권력의 친미화

미국이 단독정부 수립으로 정책을 전환하던 시기, 38선 이남에는 많은 정치세력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좌우파 세력들은 좌우합작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암살로 좌우합작 운동은 더 이상 동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요원들로 구성된 한국독립당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에도 반대함으로써 미국의 정책과 충돌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들 역시 적극적인 반미운동을 벌였다. 

이들 세력은 비록 정치적 이념은 달랐지만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단일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북측의 정치세력들과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반해 친일 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 그리고 미군정에서 복무하고 있었던 친일부역자들은 미군정의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1946년 정읍 발언을 통해 이미 미군정보다 먼저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던 이승만 역시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가세하게 된다.

이로써 1948년 5.10 단독선거를 앞두고 38선 이남의 정치세력들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고자 하는 세력과 단독선거를 강행하고자 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주에서의 4.3 항쟁과 여수순천에서의 항명사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38선 이남의 대다수 민중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자 하는 정치세력과 보조를 같이한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사실상 분단정부의 수립이었으며, 또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세력들이 권력을 잡게 된 사건이었다. 미국의 정책에 반대했던 ‘반미 세력’은 국가반란세력이 되고,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친미 세력’은 국가수호세력이 되는 결과가 연출된 것이다. 국가수호세력의 상당수는 일제 부역자들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한국 정치권력은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당연히 미국 정책을 반대하는 인사들은 정치권력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한국 사회의 친미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권은 친미 일변도로 갔으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반미 의식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반미세력 역시 지하에서의 조직사업 혹은 빨치산 투쟁 등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었으며, 많은 민중들은 그러한 반미세력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가 친미화되는 데서 한국전쟁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3년이라는 극단적인 민족상잔의 비극은 한국 사회를 반공친미화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반미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죽거나 월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한국 민중들에게 ‘공산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서 미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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