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5) 격동하는 조선반도정세와 더불어 80년대 총련의 활동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3대(북▪민족▪미국) 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먼저 민족 바로알기 일환으로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오규상 부소장의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를 기획연재한다. 4세대에 걸쳐 민족성을 지켜온 재일동포들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을 새롭게 알아 나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흔쾌히 기고해주신 오규상 부소장께 감사드린다.[편집자] 

※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두음법칙, 띄어쓰기 등 국어 맞춤법을 적용했다.

1980년대 역시 격동적으로 서막이 올랐다. 전두환 군부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 활화산처럼 번졌다. 재일동포들도 반독재민주화운동 정형에 대하여 주시하고 함께 투쟁할 결심을 세웠다.

▲ 재일동포유지들이 만들어낸 책자《광주학살사건을 고발한다》의 표지

광주항쟁을 지지성원하는 사업

1980년5월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유신잔당들은 남조선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독재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선 애국적인 청년학생, 민주인사들을 닥치는대로 체포구금하고 학살하였다.

총련은 군사파쑈도당에 대한 분격을 안고 광주시민들의 영웅적투쟁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렸다. 5월30일에는 《군사파쑈악당들의 야만적학살만행을 규탄하며 남조선인민들의 민주구국투쟁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를 15000명규모로 가졌으며 시위행진도 벌리였다.

《피바다가 된 광주의 고발》이 연거퍼 전해지는 속에서 총련은 6월12일에도 잔인무도한 살륙만행을 감행하고있는 전두환일당의 군사파쑈독재를 규탄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를 가져 싸우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였다.

한국에서 호평이였고 일본에서도 상연된 《택시운전사》란 영화를 보면 광주사태를 전세계에 알린 외국기자의 활동이 생생히 그려져있다.

▲ 전두환 군부독재의 야만적학살만행을 규탄하며 남조선인민들의 반미구국투쟁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와 시위행진(1980.5.30.) [사진제공 : 조선신보사]

일본에서는 1980년6월20일에 《광주학살사건을 고발하는 회》가 발행한 사진첩《광주학살사건을 고발한다》가 나와있다. 필자가 좀 아는 광주사태전문연구자인 일본대학교수가 말하기에는 이 사진첩은 아마 세계에서 제일 먼저 광주사태를 알린 출판물이라고 한다. 당시 상황으로 볼때 편집자의 성명도 밝힐수가 없었다고 보나 발행주소는 지금은 없으나 당시의 조선출판회관주소로 되여있는것을 보면 총련계인사들의 편집자들과 재정적안받침으로 작성된것으로 예측이 된다. 광주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을 재일동포들도 적극 지원한 산 증거일 것이다.

광주항쟁이후에도 전두환은 계속 정권자리를 차지하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탄압하였다. 박종철의 물고문에 의한 살해(1987.1.14.),이한렬의 살해(7.3)와 장례(7.9) 등 민주를 지향하는 남측 인민들의 투쟁이 절정에 달한 6월민주항쟁에 대해서도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그들처럼 피흘려 싸울수는 없었으나 그들과 같은 심정으로 전두환도당을 단죄하고 그 계승자로 지목된 노태우에 대해서도 규탄하였다.

통일을 지향한 총련의 운동

총련은 공화국이 제기한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통일국가의 전모와 그 실현방도를 밝힌 설계도로 인식하고 그것을 열렬히 지지하고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총련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1982년6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사이에《남조선으로부터 미군철거와 핵무기철거요구,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촉진 도보행진(오사카-도쿄)》과 서명운동을 진행하였다.

1984년3월1일부터는 미제의 핵전쟁도발책동을 반대하며 공화국이 제기한 3자회담 실현을 지지하는 《500만명서명운동》을 6월25일까지 조직전개하였다.

해방40돐을 맞이해서는 총련과 민단의 예술인들이 공동으로 조국해방40돐기념예술공연(8.10)을 가졌으며 11일에는 억수로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2만여명이 참가하여 사이타마현사야마공원에서 재일조선인중앙축전을 진행하였다. 통일을 위한 총련의 활동은 중단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5년 《외국인등록법》의 근본시정을 위한 대중운동

▲ 〈외국인등록법〉의 근본시정을 요구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모습(1985.5.15.)[사진제공 : 조선신보사]

80년대에 들어서 세계적으로도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국제화가 조류로 되여있는속에서 총련은 외국인등록법의 근본시정을 위한 대중적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렸다. 총련은 이 투쟁을 재판투쟁이나 지문압날거부투쟁의 형식이 아니라 근본시정의 내용을 명확히 하고 300만명의 서명으로 일본정부당국에 강하게 들이대기로하였다. 다시말하여 일본에서는 범죄자에게만 요구하는 지문을 등록하는 외국인에게 의무화하는 지문압날제도의 페지, 상시휴대의무제도의 폐지, 벌칙제도의 페지의 3가지내용을 걸었다.

1985년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서명운동을 전동포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목표를 훨씬 초과한 351만3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정부당국에 요청하였다.

그이후 일본당국은 지문은 16살때 1번만하기로 수정하고 특별영주자(재일조선인의 일본영주의 자격의 하나,거의 대부분의 동포가 대상)에 대해서는 92년에 페지하였다.외국인등록법은 총련과 여러 사람들의 강한 요구에 따라 2012년7월9일에 페지되였다.

법의 성립시나 그 전반과정을 놓고 보면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향을 장악하기 위한 치안립법적성격이 강한 법규였다. 일본당국은 등록법의 페지에 따라 《새로운 재류관리제도》를 내오게 되었다. 이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외국인에 대한 관리,규제가 기본이며 정부당국의 일원화가 실현됨으로써 통제는 더 강화된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고구려문화전

고구려문화전(동실행위원회주최)은 오사까의 한큐백화점에서 개막,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실물크기의 모형과 각종 악기, 무기, 의상 등 160여점의 문화유산을 전시하였다.

1985년9월13일부터 1986년5월10일까지 일본의 10개도시에서 개최했다. 이것은 재일동포들에게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인식을 주고 민족적자긍심을 높이는데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조일관계사연구와 조일친선의 분위기를 돋구는데 의의있는 행사였다. 전시회가 마친 이후에 전시된 모형 등이 조선대학교력사박물관에 기증되였다. 김대중정권시기에 서울에서 진행한 고구려전에서 사신도를 비롯한 모사품 등이 반출되여 평양에서 운반한것과 함께 전시되였을것이다.

연달아 일어나는 반공화국, 반총련책동

대통령선거를 앞둔 87년11월29일 KAL기가 안다만상공에서 실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새 북조선의 행위라고 보도가 선행되여 며칠후에는 간첩이라는 녀자가 범인이라고 나타나 일본은 벌집을 쑤셔 놓은듯 련일 KAL기사건,김현희사건이 요란하게 보도되였다. 이런속에서 일본각지에서 조선총련과 조선학교학생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협박과 폭행,짓줒게 구는일이 빈발했다. 각급 총련시설과 학교들에 “회관(학교)을 폭파한다”는 협박전화가 련달아 걸려오고 조선학교학생에 대하서는 “이 스파이놈아, 조선인 몰살이다” 등으로 목을 메거나 다리로 차서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초급(소)학교학생에까지 확대하였다.

총련은 일본당국에 대하여 일련의 범죄행위를 엄격히 단속하며 사건재발의 방지와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89년8월경부터는 일본의 한 주간잡지의 파친코의혹이라는 특별기사를 계기로 일본사회당(당시의 혁신계정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가 하면 파친코업자의 대부분이 조선사람이고 그 리득금을 탈세(일본법을 위반)하고 그 자금이 북으로 넘어가 《핵개발에 리용되여있다》는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였다.

일본국회에서는 총련조직에 대한 공격이 또다시 시작하였다. 일본정부당국자는 어느 자민당국회의원의 “총련은 위험한 단체인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일본의 공안유지에 있어서 무시못하는 단체로 생각하고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고 매우 위험한 단체인가하는 질문에 “말씀 그대로이다”고 하면서 본심을 감추지않았다(10월17일,일본국회예산위원회).

며칠후에는 조선학교에 대하여서도 “학교의 관리권이 있는데와 상담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11월2일, 일본문부대신답변)고 하여 공화국과 총련에 대한 악의에 찬 응답을 거듭하면서 공화국과 총련에 대한 온갖 비방중상을 일삼았다.

연일 국회마당에서의 토의과정이 상세히 보도되면서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거주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는듯한 여론이 조성되여나갔다. 그리고 마치도 동포상공인들 모두가 일본의 법을 위반하고있는것처럼을 만들어졌고 조선학교학생들에 폭언, 폭행사건이 련발하였으며 동포들의 기본적인권마저도 심히 유린되여갔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굴함없이 탄압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 강하게 벌리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1989년7월1일부터 ∼7일까지 평양에서 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이 성대하게 개최되였다. 이 축전은 반제자주를 지향하는 청년학생들의 대축전이다. 총련도 주최국의 한 성원된 립장에서 대회성공에 기여하였다.여기에 전대협대표인 임수경이 사선을 뚫고 참가함으로써 축전을 더욱 빛내였으며 우리 인민의 통일의지가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1948년12월 가나가와현에서 출생했고, 본적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동포 2세다.
1955년4월 가나가와현 조선학교에 입학해 1967년3월 졸업했다. 1971년3월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6년간 민족교육을 받았다.
1979년7월 김일성종합대학 통신박사원 준박사과정 수료하고, 1998년10월8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국가 학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학준박사(1979.09.03.), 사회정치학박사(1998.12.0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교수(1991,05.15), 교수(2001.05.02)

오규상 부소장 약력

1971년4월부터 2004년6월까지 조선대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교수, 정치경제학부 학부장, 경영학부 학부장, 교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7월부터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다, 2010년5월에 부소장이 되었다. 현재 조선대학교 비상근 강사로 출강한다.

저서
『기업권확립의 궤적 재일조선상공인의 바이타리티』朝鮮商工新聞社、1984・2
『재일조선인기업형성사』雄山閣、1992・3 
『아세아를 뛴다 화교・재일코리안』朝鮮青年社、1996・6
『다큐멘트 재일본조선인련맹1945-1949』岩波書店、2009・3
『기록・조선총련60년』2015・12(私家版)

편저
『입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雄山閣、1998.9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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