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3)

1) 유물론과 과학

지금까지 종교적 세계관을 알아보았다. 결론은 적어도 열린 종교인 한, 나는 종교의 역할에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독특한 예감과 탁월한 도덕적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종교가 닫힌 종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전체적으로 회의적이다. 종교를 믿는 타인을 이해는 하지만 내가 굳이 종교를 택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가보자. 유물론적 세계관은 현대 과학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철학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과학은 의식을 물질로 환원하기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정상은 아득하니, 과연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불안하다. 여기서 이 길을 계속하는가 아닌가는 결단에 달려 있다.

과학을 믿자는 결단은 하나의 결단이며 고독한 결단이다. 그것은 종교적 결단만큼이나 목숨을 건 결단이기도 하다. 그런 결단을 옹호하는 여러 이유를 여기서 한번 찾아보자.

2) 실존철학의 과학 비판

과학에 대한 신뢰의 결정적 근거는 지금까지 과학이 성공적으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있다. 과학은 환원전략을 통해 이 세계에서 신의 흔적을 제거해왔다. 그러니 신이 지상에 거주하는 마지막 장소일지 모르는 관념도 머지않아 과학의 환원전략에 걸리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파고가 나온 이후 안드로이드와 사랑을 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믿는다.

과학의 성공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6~70년대 내가 청년 시기에 과학을 비판하는 철학이 많이 등장했다. 그런 철학은 과학으로 건설될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제시하면서 과학을 공격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하나는 실존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철학이다.

그 대표적인 철학이 실존철학이다. 하이데거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철학보다 그가 과학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그의 스승 후설(Husserl)의 과학론에 근거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후일 아도르노, 포스트모던주의자 등의 과학 비판으로 이어진다.

실존철학이 과학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대표적인 예를 보자. 실존 철학자는, 과학은 세계의 고유한 질적인 측면을 추상하고 세계를 다만 보편적인 양(질량 등)의 세계로 환원했다고 한다. 진짜 세계는 고유한 개별자의 세계, 질적이고 감성적인 세계이고 이 세계는 풍요한 세계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런 세계를 학살하고, 세계를 추상화된 이성적인 건조한 세계, 즉 가짜 세계로 전락시켰다.

실존철학 계열의 철학자, 문학자들은 이런 입장에서 과학이 발전하면 나타날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려냈다. 내가 대학 다닌 시절만 해도, 세계는 곧 핵전쟁으로 파멸될 것이라는 공포가 휩쓸었다. 무정부주의자인 조지 오웰의 그러낸 <1984>는 그런 디스토피아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3) 구체적 보편성과 추상적 보편성

이런 비판은 과학의 실천이 추상화, 귀납의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개별자에서 보편 법칙을 찾아가기 위해 개별자의 개별성을 제거하고 공통성, 즉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것이 추상화, 귀납의 과정이다.

그러나 과학이 추상화과 귀납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을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긍정할 것이다.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 즉 ‘본질’이다.

이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전문 철학자도 보편과 본질을 구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개별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해 자기를 유지할 때, 그 ‘자기’를 이런 구체적 보편성이라 한다. 이 ‘자기’는 자기의 구성요소를 대체하면서(신진대사) 자기를 반복(재생산)하는 것이다.

과학은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 본질을 추구했다. 쉽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실존철학 계열의 철학자들이 과학을 비판할 때 과학적 실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4) 생태철학

또 한 가지 과학에 대한 공격은, 과학이 단순한 인과과정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직선적 인과, 우연을 배제한 결정론은 자연의 상호 인과, 우연을 포함하는 복잡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태학적인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자연은 이런 상호 인과, 복잡계 등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니 과학적 이해는 잘못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그 역시 과학의 근본적인 실천전략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과학은 이미 일찍부터 상호적 인과나 우연을 포함하는 결정 체계인 복잡계를 인정해 왔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철학이 지금까지 생태계를 이해하는 과학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대안은 자연을 생태과학적으로, 즉 복잡하고 상호 연관 속에서 이해하면 충분하다. 자연과학은 이미 그런 생태적 과학을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생태 철학은 어떤 과학도 부정한다. 생태철학은 대안으로 자연 속으로 신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려 한다. 그런 철학화, 즉 종교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문제가 된다. 생태과학은 환영한다. 그러나 생태철학은 신비화이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동양의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간과 눈, 간과 신장은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고 한다. 서양의학은 그런 연관성을 부정했기에 잘못이라 한다. 반면 동양의학은 이런 연관성을 강조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동양의학의 입장을 긍정한다. 동양의학 역시 과학이다. 그러나 동양의학의 전제인 철학(예를 들어 사상체질론이라든가 음양오행설 등)은 의심스럽다. 동양의학도 과학적인 절차와 방법을 수용하면서 과학으로 발전하기를, 즉 서양의학보다 더 발전된 과학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5) 열린 과학

과학이 성공적이냐? 현재 과학과 다른 새로운 과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의문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다. 나는 기꺼이 그런 비판을 수용하겠다. 그래도 나는 과학을 긍정하는데 내가 긍정하는 이유는 과학의 가정, 연구방법, 실천전략 때문이다. 그런 가정과 연구방법, 실천전략은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에서 나온다.

내가 과학자의 실천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이유는 과학이 자기의 오류를 수정하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종교는 자신의 예감을 절대화한다. 반면 과학은 자신의 진리조차 회의에 가능성을 열어둔다.

과학이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는 가능성은 과학자의 실천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상당히 복잡한 검증장치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상식적인 과정만 언급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설의 연역이 올바른가? 실험 자료가 정확한가? 예측이 얼마나 성공하는가? 과학자 사회의 합의 과정을 거쳤는가? 등 과학은 이런 오류의 검증장치를 통해 때로는 혁명적으로, 때로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런 과학의 절차와 SNS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잘 이해될 것이다. SNS는 장점을 가진다. 수많은 대중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SNS는 과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는 경험의 보고이다.

그러나 SNS를 보면 당혹할 때가 많다. 개인이 주관적으로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경우이다. 이런 주장 가운데는 흥미로운 것도 많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조하는 것은 자기의 의견을 확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 개인의 주장은 대중의 눈을 현혹하는 주장이 될 때도 있다.

마치 기독교 목사가 신도를 끌어 모으기 위해 다가오는 세상의 몰락(종말론 목사의 경우)과 적의 위험(반공목사의 경우)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오류는 거의 대부분 심리적 만족감을 주면서 번성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거나 또는 상대 집단, 논적에 대한 증오, 혐오 발언이다.

유감스럽게도 SNS에는 오류를 검증하는 장치가 없다. 자주 SNS도 토론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대체로 심리적인 자기만족의 표현이나 은폐된 혐오 발언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SNS는 광신적인 ‘빠’들이 활개를 친다. 그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믿으며 ‘좋아요’를 누르는 페친들과 더불어 서로 격려하면서 반대하는 페친은 차단해버리니 자기의 오류를 극복할 수 없다. ‘좋아요’ 페친에 둘러싸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으로 자만에 빠진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과학이 가진 장점이 부각된다. 과학은 물론 황우석과 같은 장난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오류를 수정하는 여러 복잡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과학은 이를 통해 스스로 자기의 오류를 수정하니, 이런 점에서 과학은 열려 있다.

과학은 그런 엄격한 오류 검증 장치를 통해 스스로 오류를 수정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간다. 나는 이런 오류의 수정 가능성, 과학의 열려진 자세 때문에 과학을 믿고, 과학을 정당화하는 유물론을 택했다. 내가 종교보다 과학을 더 의미 있는 세계관으로 보는 이유는 전자는 대개 닫혀 있고 후자는 대개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개’라고 제한적으로 표현한 것에 유의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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