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저 <87, 6월 세대의 주체사상 에세이>(2018, 사람과사상사)

이정훈 저 <주체사상 에세이> 1장 7에서는 사람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둘러싼 ‘세계란 무엇인가?’ 설명되어야하겠다. 지난번 <주체사상 에세이> 1장 6에서 맑스주의와 주체사상의 ‘분기점’을 다루었는데, 20세기 들어오면서 철학의 근본문제가 ‘물질과 의식’에서 ‘세계와 사람’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물질과 의식’에서 ‘사람과 세계’와의 문제로 달라졌다고 하니, 여전히 모르겠다는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란 무엇인가?’ 문제에 들어가기 전, ‘물질과 의식’에서 ‘세계와 사람’의 문제로 전환된 사상사를 요약정리하면 이렇다. 

노동계급의 철학인 마르크스사상 이전에는 사람을 정신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과 물질적 존재로 보는 유물론적 견해,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결합으로 보는 절충적 견해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람을 유가(儒家)식으로 사단이 있는 존재, 불가(佛家)식으로 여래장을 갖춘 존재, 스피노자식으로 자기보존 욕망 존재, 프로이드식으로 리비도적 존재, 니체식으로 권력 의지가 있는 존재, 하이데거식으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죽음으로의 기투 존재, 신에 기도하고 의존하는 나약한 신학적 존재, 정치적 동물, 경제이기적 동물……. 수다한 견해들이 있겠다. 이런 견해들은 사람의 수많은 속성 가운데 한 가지 속성을 일반화한 견해에 불과하겠다. 이런 다양한 견해에는 언제나 지배집단의 세계관인가? 지배당하는 인민의 세계관인가? 하는 계급적 관점이 들어가 있겠다. 이런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사람에게 물질적 생산과 사회경제관계에 결정적 의의를 부여하며 유물론으로 접근하여 사람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설명하였다.

반복 정리하면,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유물론적 견해며 세계가 정신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관념론 견해겠다. 세계가 자체의 내적 원인으로 변화한다는 생각이 변증법적 견해라면 세계에 어떤 절대자나 신이 있어서 고정불변한다는 생각이 형이상학적 견해겠다. 그런데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중세 형이상학 신학의 허구를 폭파시키고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유물론 입장과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변증법 입장을 마르크스가 제시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전시대에서는 관념론과 유물론, 형이상학과 변증법 투쟁의 역사였으며 마르크스사상은 이러한 이론쟁투에서 관념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유물론과 변증법의 승리로 되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과 변증법을 결합시켜 ‘세계의 물질성’과 ‘물질세계의 운동변화법칙’을 만들었고 이를 스탈린 시대에 와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이라 정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중심의 철학이라는 주체사상은 어디까지 나아갔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인류사에서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은 성공했으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좌절했고, 러시아혁명은 노동동맹을 통하여 일국사회주의 국가는 건설했으나 사람문제를 등한시하여 실패한 경험이 있다. 중국혁명은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전선론 차원에서 국민당과 연대하며 일제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으나 사람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모험주의적 경향을 노출하며 미영, 서구 자본주의 진영에 둘러싸인 조건에서 생산력중심으로 나아갔다. 반면 조선은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며 사람을 중심에 놓고 통일전선을 확대하여 사람 희생이 없는 혁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혁명사 발전과정은 곧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사의 발전과정이며 통일전선론의 세련화 과정으로서 사람을 광범위하게 끌어안아야하는 심화 발전과정이기에, 장차 변혁과 변혁사상에서는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모시는 사람중심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겠다.

우선 주체사상은 사람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사상을 받아들인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사람은 물질적 존재이며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것은 맞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히 물질적 존재만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가장 발전한 물질적 존재로서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와 달리 자기에게 맞게 자연과 역사와 사회를 개조해 나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자연과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개조시켜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에게 없는,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개조하고 예속에 반대하는 ‘자주적 존재’며, 자연과 사회를 자기에게 맞게 개변시키는 ‘창조적 존재’며 자기활동을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의식적 존재’라는 것이다.

<주체사상 에세이> 1장 7(50-55쪽)에서 사람이란 무엇인가?의 주체사상 설명에서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자주성과 창조성과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꽤나 선언적, 종교적, 관념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람을 정신적 존재로만 생각했던 관념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관념론으로 들리기도 하겠다. 그런데 사람을 최고의 물질적 존재라고 생각해온 유물론자들에게는 사람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문제는 유물론적 견해로 들린다 하겠다. 즉 사람에게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있다는 주장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최고의 물질적 존재인 사람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기에 유물변증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겠다.

마르크시즘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세계의 본질을 유물론적으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세계가 어쨌다는 말인가? 그 세계를 무엇이, 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는 누구인가? 자연이 움직이는가? 아니다. 자연도 우연히 개입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세계와 역사는 사람이 움직여나간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입장을 밝혀내야만 하는 철학적 과제가 제기된다 하겠는데, 주체사상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사람의 문제를 해명했다고 <주체사상 에세이> 1장 7에서 밝히고 있다.

주체사상은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졌고 물질운동에 의하여 발전한다는 것이 밝혀진 조건에서,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은 누구며, 그것을 개조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는 문제에 답을 함으로써 ‘사람과 세계’에 대한 견해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즉 세계는 사람에 의하여 지배되고 개조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과 세계의 조화’가 전제되므로 주체사상은 21세기의 생태주의와 가이아적 세계관을 당연히 포함한다 하겠다. 세계는 저절로 사람에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창조적 활동을 의식적으로 전개하면서 세계와 역사가 사람에게 이롭도록 사람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구체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것이다.

지난 인류사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역사적 조건에 따라서 변해왔다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로, 중세에는 농노로, 자본주의 시대에는 시간제 노예인 임금노예로 사람의 지위와 역할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예종상태에서 해방되는 사회주의체제에서 비로소 사람은 세계의 주인으로 사람의 지위와 역할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즉 세계는 사람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서만 사람을 위한 세계로 개조된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사람을 단순히 최고의 물질적 존재며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유물변증법의 설명을 넘어서서, 사람이 세계를 자주적으로 창조하고 의식적으로 개변시켜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해명 지점에서, 사람을 섬기고 모시는 철학인 주체사상의 ‘사람과 세계’의 문제와 마르크스사상의 ‘물질과 의식’ 문제에서 변곡점이 발생한다고 하겠다.

모든 사람에게 최고 가치를 부여하고 모든 사람을 최고 존자로 섬기고 모든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주체사상에서는, 이런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주체사상 에세이> 1장 7에서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1) 사람의 본질인 자주성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주성은 자연세계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과 역사의 운명도 스스로 개척하고 모든 예종 예속상태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며 이런 자주성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2) 그럼 사람의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해나가고 자기운명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창조적으로 낡은 것을 변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자연과 사회를 자기에게 이로운 것으로 개변해나간다는 것이다.

3) 그럼 의식성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세계와 자신을 파악하고 개변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속성이 있는데 이를 인간의 의식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성 때문에 사람은 역사의 합법칙성을 파악하며 자연과 사회를 자기요구에 맞게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람만이 가지는 속성으로서 생물학적 속성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의 ‘사회적 속성’이며 사람이 후천적으로 개발하는 사회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사람만이 예속상태에서 자주적으로, 자기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그리고 목적의식적으로 자연과 역사를 변화시켜나가는 존재이기에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며 사람을 모시고 사람을 내세우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변혁 방법론도 사람이 사회변혁과 자기해방의 주인이니까 누구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자기조건 자기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사상에서는 이런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사상은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인 ‘제세이화 홍익인간사상’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는 ‘이민위천 사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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