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2)

1) 새로운 세상

앞에서 종교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논변을 들어보았다. 철학적 논변, 기적과 신비 및 은총의 논변, 직접 체험의 논변, 파스칼의 확률론 등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회, 도덕적 논변을 들어보자. 종교는 참으로 무시 못할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하나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시킨다는 것이다.

종교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이면서, 노예 해방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시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로마를 탈출하기 위해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허덕였다. 북으로 다뉴브강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알프스산맥에 막혀 넘어가지 못했다. 남으로는 시칠리아로 가려 했으나 브런디시 해협에 막혀 되돌아서야 했다.

결국 그들은 게릴라전을 버리고 로마군에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니,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 노예는 탈출의 길이 없었다. 이런 로마 노예에게 새로운 복음으로 기독교가 출현했다. 기독교는 로마의 무참한 탄압을 뚫고 마침내 로마를 정복했으니, 이를 통해 로마에서 마침내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것을 통해 세계는 노예제 시대에서 봉건제 시대로 이행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실패했지만 기독교는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개인의 주관성, 자유의지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 즉 봉건세계의 기본적인 질서였다. 기독교가 새로운 사회의 도덕을 표현하기에, 기독교는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 사진 : <스파르타쿠스의 최후>(헤르만 보글 작. 1882년) [출처 : 구글검색]

2) 동학사상

이번에는 동학사상을 생각해 보자. 봉건 조선조 세상은 불평등했다. 양반은 각종 특권을 차지했다. 양반 중에도 남녀 차별, 지역 차별과 서얼 차별이 있었다. 양민은 말이 양민이지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봉건적 제약을 받았다. 군역과 각종 가혹한 세금은 모두 양민이 짊어져야 했다. 노예와 천민은 거의 마소와 같은 대접을 받았으니 임꺽정, 홍경래, 그리고 차별에 반대한 수많은 민란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 시기 최제우 선생은 인간이 하늘이라는 주장으로 새로운 도덕과 세상을 열었다. 그 세상은 아이도 며느리도, 노예도 천민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하늘로 대접받는 세상이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사상은 전봉준 장군을 통해 봉건 조선에 저항하는 거대한 투쟁의 물결을 일으켰다.

동학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동학이 주장하는 세상은 열리게 되었다. 조선조 봉건관료들은 다가오는 세상을 막기 위해 일제의 군대를 부르고 결국 나라를 일제에 넘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대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 동학의 평등한 세상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동학의 사상이 위대한 것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동학혁명은 실패했어도 동학사상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이런 종교의 긍정적 역할을 생각하면 종교가 가진 힘에 대해 새삼 놀라게 된다. 종교는 다가오는 세상을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 여기에 종교적 영웅의 위대함이 있다.

3) 마르크스의 무신론

그러나 항상 무엇이든 자신의 장점이 곧 단점이 된다. 나의 적은 나를 부수려는 적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는 교만이다. 이건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예감은 어떤 과학적 인식 이전에 새로운 세상을 예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는 이런 예감을 신의 말씀으로 절대화하니, 한번 고정되고 확립된 이상 그것은 변화할 수가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대가 또 지나가면 과거의 새로운 세상은 이제 억압적인 세상이 된다. 과거의 예감은 이제는 편견이 된다. 새로운 세상을 예감하는 종교는 ‘열린 종교’이다. 과거의 세상을 교조화하는 종교는 ‘닫힌 종교’이다.

닫힌 종교에서 기존 사회가 절대화, 교조화되면 스스로는 자기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종교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절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종교전쟁에 빠지게 된다. 중세 이후 근대로 이행하면서 구교와 신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생각해 보라.

그때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지식인의 눈으로 보면 종교는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그런 지식인의 심정을 마르크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종교적 세계관을 버리고 단호하게 유물론적 입장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독일은 16세기까지는 영국, 프랑스와 나란히 발전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런 발전을 전제한다. 그런데 30년 전쟁(1618~1648)은 독일을 초토화시켰다. 이 전쟁의 끝에 신교와 구교는 서로 타협했다(베스트발렌 조약).

그 타협 방식이 웃기는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의 자유를 봉건제후에게 부여했다. 신민은 봉건제후가 결정한 종교를 따라야 했다. 그 이후 독일의 봉건제후의 권력은 신교국이든, 구교국이든 종교적 권력과 융합했다.

종교가 제후의 결정에 의존하는 한 종교는 민중에게 봉건제후를 위해 설교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봉건제후를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수단으로 선포했다. 거꾸로 봉건제에 대한 인민의 모든 저항은 종교에 대한 저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후를 공격하려면 종교의 관문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굳이 그때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반공보수의 가장 핵심 지지기반이 기독교이다. 사람들이 이런 반공보수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를 ‘개독교’로 비하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마르크스 같은 젊은 청년들의 감정이 어떠했을 것인지 짐작된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나는 기독교를 비하하거나, 종교가 아편이라는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4) 율법주의

종교는 또한 사회의 도덕적 능력을 함양한다. 도덕이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도덕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도덕도 없는 사회는 생각하기 힘들다.

인간은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도덕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도덕을 따르는 도덕적 의지, 자유로운 의지, 순수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욕망을 억제하면서 이런 자유로운 의지를 기르는 힘을 제공한다.

나는 자주 여러 종교인들의 무상의 봉사 행위를 보는데, 그때면 유물론자인 우리보다 저들이 더 낫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종교인이 세상과 이웃과 형제를 위해 베풀었던 그 엄청난 헌신과 봉사에 대해 기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들 앞에 항상 무릎 꿇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힘을 기르는가를 보면 절망적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신의 축복과 처벌, 천당과 지옥(또는 기복 종교의 경우 지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을 매개로 도덕적 힘을 기르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법이 당근과 채찍을 휘둘러 도덕적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법은 현세적 힘, 권력이지만 종교는 주로 사후의 처벌과 축복을 말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식으로 도덕적 힘을 기를 수 있는가? 그것은 바울의 절망을 들어보면 쉽게 이해된다. 바울은 “율법이 죄의 근원”이라 말한다.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바울은 율법의 내용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형식을 문제 삼았다고 생각한다.

율법의 형식은 바로 사후의 처벌과 축복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말씀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아무리 율법의 내용이 좋더라도 과연 그런 방식이 옳은가? 바울은 율법주의적 방식에 대해 절망한 것이 아닌가?

이런 율법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전제로 하며, 하나의 욕망은 억압하지만 다른 욕망은 장려하니 결국 인간은 욕망을 벗어나는 자유의지, 순수의지를 기르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욕망을 강화하니, 인간은 죄를 더욱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5) 열린 종교를 위해

결론적으로 종교가 새로운 세상을 열고, 도덕을 함양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종교는 말씀을 절대화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한다. 더구나 종교는 율법적이다. 종교는 사후의 행복과 처벌을 약속함으로써 도덕적 의지를 기르기보다는 더욱 이기적인 인간을 기를 뿐이다.

이 두 가지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라면 전자이다. 만일 종교가 새로운 사회 질서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오히려 율법적인 태도는 일종의 방편설로 기꺼이 용인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종교가 과거의 사회를 절대화한다면 정말 미치고 답답할 것이다. 그런 종교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싶다.

열린 종교라면 새로운 사회를 위해 이처럼 도움이 되는 게 어디 있겠나 싶다. 하지만 종교가 이렇게 열린 마음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전체 종교의 역사에서 본다면 종교는 대개 닫힌 종교였다.

종교 아니면 과학이다. 그 두 가지 세계관밖에 없다(물론 맹목적 우연의 세계관이 있지만 그건 심각하게 고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곧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겠다.) 그러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이번에는 그 장단점을 알아보자.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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