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18) 광개토왕 : 광개토왕릉비

이처럼 복잡한 국내외 정세에서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자신의 통치 시기에 빛나는 위훈을 이룩했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오늘의 경기도 동북부, 충청북도 북부와 동부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확보했다. 동남으로는 소백산 줄기 계선까지 진출해 신라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또 동북쪽으로는 숙신을 쳐서 숙신족 거주지역 많은 부분을 속령으로 삼았다. 410년에는 조공을 거부하는 동부여를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내고, 속국으로 만들었다. 서북쪽으로는 비려부(거란족의 일부)를 쳐서 3개 부락 6~700영을 격파하고, 이 지역(오늘의 서요하 일대)을 속령화했다. 또 대릉하 서쪽지역에 있던 후연과도 몇 차례 싸워 이김으로써 서북 변방의 방어력을 강화했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나라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점령지역에 대한 지배 통제를 강화해 고구려의 힘과 기상을 널리 과시했다. 

이러한 광개토왕의 업적은 광개토왕릉비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2년)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무덤 관리규정을 새겨 넣은 글 1715자가 있는 높이 6.4m되는 큰 돌비석이다. 능비는 마모된 부분도 적지 않아 판독하기 어려운 것도 있으나,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그 뜻이 거의 다 해명됐다. 여기에는 문헌사료들에는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기록돼 있으므로 고구려 역사, 더 나아가 당시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제1차 사료로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능비문의 서체가 매우 세련돼 당시 고구려의 높은 문화수준을 잘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광개토왕릉비문의 내용은 크게 3단으로 나뉜다. 제1단은 고구려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그 후 역대 왕들의 계승관계, 광개토왕의 치적에 대한 총평, 산릉의 축조와 능비 건립의 목적을 써놓았다. 제2단은 광개토왕의 공훈, 업적을 연대별, 사건별로 서술한 것으로 북방에서는 비려, 식신, 동부여를 정벌해 국위를 선양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사실, 남방에서는 백제 가야 왜와의 싸움에서 결정적 타격을 주고 백제의 많은 성들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의 위력을 과시하고 영역을 넓히고, 신라를 도와주는 동시에 강하게 통제 장악하게 된 과정을 써놓았다. 제3단은 왕릉의 관리 수호를 위한 수묘인 연호의 구성과 그것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법령조항들을 밝혀 놓았다. 따라서 이 비는 광개토왕의 훈적비-기공비인 동시에 능묘 관리원칙을 규범화해 놓은 것이다. 

▲ 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릉 비문은 말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광개토왕이 추모왕(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추모왕이)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황룡을 보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게 하니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 있는데 황룡이 없고 하늘로 올라갔다.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으로 지시해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했다.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이어받았고 17세손인 국강강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미치게 됐다. 왕은 18살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은정과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으며 (옳지 못한 자들을)없애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 보면 광개토왕은 주몽의 17세손이다. 여기에서 17세손이라 함은 왕대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조부터 쳐서 몇 대째 자손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시조 주몽왕의 12세손에 해당되며, 양자 사이에는 5세대의 차이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떤 기록이 정확할까? 광개토왕릉비문은 고구려 왕조 자신들이 작성한 문서이고, 그것도 광개토왕이 사망한 지 2년 후에 기록된 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착오나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고구려 왕실 자체의 기록에 의한 것이 아니고, 고구려 왕조가 멸망한 후 수백년이 지나서 작성된 문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국사기〉기록보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기준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5세대의 고구려 왕을 누락시킨 오류를 범했다. 5세대 왕은 5명의 왕일 수도 있고, 5~10명의 왕일 수도 있다. 형제상속을 한 경우 왕대 수는 변하지만 세대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5세대의 고구려 왕이 누락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고의적 누락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고구려 왕조를 무너뜨린 당나라와 신라의 합작품이다. 신라는 신라대로 당나라는 당나라대로 고구려 왕조를 깎아내릴 필요성이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 나라 역사보다 짧았다는 것을 내세우려 했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강대성에 흠집을 내서라도 과거 자신들의 패배를 우연으로 치부하려고 했다. 이러한 양자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왕조 붕괴 직후부터 역사 조작이 시작됐다. 이것은 〈삼국사기〉권 6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년) 7월조에 고구려 왕의 서자 안승을 책봉하면서 공의 태조 중모왕(고주몽)이 나라를 세운지 ‘장차 800년이 가까워 온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때부터 고구려 왕조의 연한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감히 BC 37년설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후 7세기말에 와서는 고구려 건국 연대를 거의 100년을 더 끌어내렸다. 고자묘지명에는 고구려 건국 연대를 BC 40년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고구려 역사를 축소하는 작업이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역사자료들을 종합 검토해보면 누락된 5세대 왕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고구려 건국연대도 밝혀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성과로 지금 북한(조선)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연대를 BC 277년으로 확정해 놓았다. 

▲ 광개토왕릉의 묘실 내부 모습

광개토왕릉 비문 해독의 쟁점은 무엇인가

능비문에서 가장 논쟁의 초점으로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신묘년조 기사이다. 그 원문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제와 신라는 옛적에는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왔기에 패수를 건너서 백제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초유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이다. 이 부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기사에 대해 일부에서는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이었고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자기)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었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주로 일본의 역사학계인데, 이들은 이것을 근거로 삼아 자신들의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고고학적 문헌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짓거리이다. 

우선 비문에 보이는 ‘왜’가 어떤 왜인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북규수에 있던 왜라는데 크게 이의가 없다. 그런데 이 왜는 친백제, 친가야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대대로 백제와 가야를 자기의 조국으로 알고 따랐다. 당시 북규수 왜가 마한-백제, 변진-가야 계통 이주민이나 그 후예들이 주도하던 나라였다는 것은 그 일대에서 나오는 유적유물, 지명, 전설 자료들이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신묘년조 기사에서 나오는 왜가 북규수 ‘왜’가 아니라 기내 야마또 ‘왜’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일본에는 통일국가가 형성되지 않았고 기내 야마또의 ‘왜’는 아직 서부일본의 여러 지방정치세력들도 복종시키지 못한 형편에서 한반도에 손을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일본 내 고분군들의 분포상태를 포함해 유적유물의 상태, 고기록 내용 등으로 볼 때 4세기 말까지는 ‘기내 야마또’의 세력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고 국력도 보잘 것 없었다. 유적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5세기 초엽 기내 야마또 지역의 ‘왜’는 무기 무장류나 마구류의 수준이 매우 형편없어 고구려 군대나 백제 군대와 싸울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북규수 지방에서는 5세기 전반 한반도 백제-가야지역에서 쓰던 무기류와 마구류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 내에서 기내 야마또의 왜보다 북규수의 왜가 더욱 힘이 강했고, 4세기말~5세기초 광개토왕 때 백제-가야 편에서 싸운 왜가 다름 아닌 북규수 ‘왜’였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처럼 왜가 백제 신라를 쳐서 자기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설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왜가 아니라 고구려가 돼야 한다. 고구려를 주어로 놓고 “백제와 신라는 옛적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이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제-가야의 편에 서서)왔기 때문에 (고구려는)바다(강화만)를 건너 백제를 격파했다. 또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는 것이 맞다. 이렇게 읽어야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책들의 서술 내용과 부합된다. 

먼저 그 앞부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백제와 신라는 옛적에는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다)”을 살펴보자. 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다. 백제는 369년 고구려와 충돌이 있기 전에는 옛 친족관계를 두터이 하고 숭상하는 관계에 있었고, 고구려를 큰집으로 여기고 사대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는 406년까지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그것을 시조 묘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라는 248년 강화 이후 고구려와 상하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봉건국가들 사이에 흔히 쓰는 과장법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지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부합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봐야 신묘년 이후 고구려-백제, 고구려-신라 관계 역시 현존 기록들과 잘 부합된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가 393~395년 사이에 여러 차례 패수(예성강) 좌안에서 싸워 백제군을 격파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본기에는 고구려가 392년 초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측이 볼모를 보내도록 했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기록들과 광개토왕릉비문을 종합적으로 볼 때 고구려가 주어로서, 백제를 치고 신라를 설득해 볼모를 보내도록 해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하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납득하기 어려운 무리한 해석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첨언하자면, 비문의 변조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은 광개토왕릉비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위해 용납할 수 없는 역사조작에 매달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일본군에 의한 석회도포사건은 없었으나, 탁본자들에 의한 몇몇 글자의 손상이 있었으며, 특히 주목할 점은 일본인들에 의한 몇 개 글자의 가공- 변조 또는 말소 책동이 있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도해파’(渡海破)에서 가운데 글자가 과연 ‘해(海)’가 맞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해(海)’자는 각종 탁본들에서 그 자형, 위치가 제가끔 차이나며, 최근에 탁출했다는 것과 그 이전 것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다. 본래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 글자는 인공적인 변조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예컨대 ‘浿(패)’자를 좀 가공해도 손쉽게 ‘해(海)’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그 글자가 ‘浿(패)’자였다면 ‘왜’를 주격으로 보는 해석은 단번에 부정될 수밖에 없다. 광개통왕릉비문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글자는 ‘해(海)’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야간촬영 사진에 따르면 ‘浿(패)’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글자가 ‘浿(패)’라고 보면,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5년 8월조에 나온 ‘고구려가 패수가에서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 ‘백잔’ 다음 글자는 초천부, 초균덕 부자의 탁출작업 저본에는 ‘東(동)’으로 돼 있다는 데 주목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왜’를 주격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어쨌든 ‘해(海)’로 보고, ‘東(동)’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백제를 치고 신라를 얼러 신민으로 만든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이며, 따라서 이 문장의 주격은 고구려라야 한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왕릉비는 묻힐 뻔 했던 고구려의 건국 시점을 밝혀주는 핵심적 단서를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4세기말 5세기초 동아시아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역사자료로서 그 가치가 무한하다 할 우리 민족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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