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한미동맹] (3)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과 고종의 대미 인식

동아시아 질서가 또 다시 요동치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각축이 본격화되고 있다. 구한말의 격변기, 한국은 식민과 전쟁을 경험했다. 해방 직후의 격변기, 한국은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다. 놀랍게도, 동아시아 질서가 요동치는 매 격변기에 한국의 선택은 미국이었다. 미국에 의지해 우리의 살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노력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과거와 다른 선택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있다. 한미동맹,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은 정상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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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종,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현혹되다
4. 러일전쟁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고종의 망상인가, 미국의 배신인가
5. 맥아더 포고령: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6. 국공내전: 일본과 한반도의 운명이 바뀌다
7. 한국전쟁과 미국: “고맙게도 한국전쟁이 터져주었다”
8. 자발적 사대근성과 한미동맹의 실상: “독립국가가 아니군요”
9. 북한의 핵개발과 남북미 삼각관계: 동맹의 존재 이유를 묻다
10. 2017년 한반도 미사일 위기와 한미 동맹: 동맹, 딜레마에 빠지다
11. 쿼바디스 한미동맹: 굳건한 동맹은 더 이상 없다!
12. 나오며: 탈동맹,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길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 유감

문재인 대통령에게 미안하지만, 지난 5월 미국 방문 당시 행보에 대해 한마디 하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문 대통령 일행은 5월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36주년과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개설 130주년을 기념하여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우리가 자주적으로 체결한 최초의 근대조약”이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외교를 통해 지켜보려던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의 손녀인 박혜선 씨가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청와대 홈페인지]

물론 외교를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으로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청나라 외교관 이홍장이 주도한 우리나라 최초의 굴욕적 근대조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얘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문 대통령이 언급한 그런 자주적인 조약은 아니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지적해야 한다. 비록 ‘외교적 발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같은 언급에 유감을 표명하는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보빙사의 파견과 고종의 대미 인식

조선과의 통상조약은 미국이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약 체결 후 1년 만에 공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통상은 이름뿐이었고 실제 조선과 미국 사이에 무역액은 보잘 것이 없었다. 경제상 이해 관계가 크지 않았고, 정치적 교섭도 간단했기 때문에 미국의 전권공사로 임명되었던 푸트(Lucius H. Foote)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변리공사로 강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푸트 공사를 파견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민영익과 홍영식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땅을 밟은 최초의 조선 외교관이었다. 민영익은 미국의 주선으로 유럽을 돌아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10개월 뒤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데, 고종은 민영익을 통해 미국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된다. 

다음은 고종이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민영익과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고종 : 미국의 접대 예절이 매우 후하다던데 과연 그렇더냐?

민영익 : 과연 대단히 후대하오며, 각국 공사에 비하면 특히 예를 더 하더이다.

고종 : 여기 있는 미국 공사를 보아도 그 나라 인품의 관후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지. 미국 부강이 천하제일이라 하니 경이 이번 목도한즉 과연 그렇더냐?

민영익 : 그 나라는 땅이 넓고 생산량이 풍부하고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일에 충실하며 그러므로 상업상의 일이 최고로 왕성하기 때문에 비교할 나라가 없나이다. <중략>

이같은 대화를 통해 고종은 <조선책략>에서 묘사된 미국의 모습이 허위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선책략>은 미국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웠으니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해치지 않으며 남의 정사에 참견하지 않는다. 미국은 약소국을 도우며 공공의 정의를 유지하며 유럽인으로 하여금 감히 방자하게 그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며 상업의 이해관계상 동양의 평화를 희구한다. 

주미공사 박정양의 파견과 청나라의 내정간섭

마침내 1887년 조선도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고종의 명을 받아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은 8월8일 고종에게 하직을 고하고 출발을 준비한다. 그러나 청나라의 항의를 받게 되면서 박정양의 출발은 3개월이 지연되었다.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나라는 위안스카이를 앞세워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즉 ‘조선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청나라와 상의 없이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려 한 사실을 알고 조미 양국에 항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청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고종은 박정양의 출발을 지연시켜야 했던 것이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약삼단(另約三端)’ 요구를 수용하고 나서야 박정양을 미국에 보낼 수 있었다. 조미통상조약에 별도 조항으로 덧붙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약삼단’은 조선에게는 지극히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첫째, 조선 공사가 미국에 가면 중국 공사를 먼저 찾아가서 그의 지도 하에 미 국무성을 방문 할 것. 
둘째, 외국 관리들과 회의를 하거나 연회를 하게 되면 조선 공사는 중국 공사의 다음에 앉을 것. 
셋째, 미국에서 중대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중국 공사와 먼저 협의할 것.

박정양의 외교적 ‘쾌거’와 고종의 대미 의존 심화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해서 중국 공사를 찾지 않고, 미 국무성에 먼저 가서 대통령 면담 일정을 확정했다. 청나라의 주미 공사는 노발대발했으나 박정양은 고종의 통지가 아직 없다고 변명하면서 1년 가까이 주미공사 생활을 하면서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 주미공사의 행태는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미 국무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공사들에게까지 ‘영약삼단’ 사실을 통지하면서 청나라 공사와 협의 없이 조선의 공사를 만나지 말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참다못한 미 국무장관은 청나라 공사에게 다음과 같이 통첩을 한다.

합중국은 조청관계를 알 바 아니므로 양국을 동등하게 독립국으로 대우하며 미국에 주재한 양국 외교관은 국제관계에 의하여 각자의 정부를 대표하는 독립 관리로 간주한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다운 공정한 처사라고 평가할 만하다. 박정양을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청나라는 결국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박정양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박정양은 임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3개월을 체류해야 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남대문 밖에서 70여일을 대기했다고 한다. 일종의 보복을 당한 셈이다. 

박정양이 주미공사로 있었던 1년은 청나라와 미국에 대한 고종의 인식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청나라 외교관 이홍장에게 의탁했을 정도로 고종은 청나라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상식 밖의 내정 간섭이 진행되면서 고종의 의식은 반청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빈 구석을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1889년 8월20일이 되어서야 박정양은 고종 앞에 설 수 있었다. 다음은 고종과 박정양의 문답 중 일부이다. 

고종 : 미국에 있을 때 그 나라 사람이 우대하더냐?

박정양 : 대소 강약으로 대우를 달리하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화평하게 모든 나라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미국은 인심과 풍속이 극히 순박하므로 우리나라 사람을 매우 우대합니다. <중략> 

고종 : 그 나라는 극히 부강하다더니 과연 그렇더냐?

박정양 : 그 나라의 부강은 다만 금은의 넉넉함과 무장한 병사의 졍예만이 아니라 오히려 내정의 갈력무실(竭力務實, 있는 힘을 다해 실력을 배양하는 것)함에 있으며...... 그 나라는 재원이 많으나 항상 절약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날로 부요하여 각국의 제일이 됩니다. 

고종이 박정양으로부터 전해들은 미국의 모습은 가히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가 힘이 없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않고 대등하게 대우하며, 국력이 매우 강력하여 조선이 의지해야 할 최적의 나라로 미국은 고종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러일 갈등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종의 뇌리는 “믿을 곳은 미국밖에 없다”는 사고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같은 기대가 얼마나 허무한지 확인하는 데는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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