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시기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박세열, 구복순 부부의 결혼사진. 1938년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행복을 앗아간 것은 전쟁이 아니라 정치였다.[박봉자 유족 제공]

박세열(朴世烈, 1913년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서 자료는 거의 없다. 70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건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에 실린 몇 개의 판결 요약문, 조갑순 할머니의 증언과 그의 남편이자 박세열과 같은 집안이었던 박세영 변호사의 판결문들에서 진실의 작은 파편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임실읍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박세열은 1913년생으로 임실읍 성가리에서 부 박임조, 모 최수덕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다. 박임조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은 확인되지 않지만 천도교의 종교활동에 참여한 것은 분명했다고 한다. 성가리와 이도리는 함양 박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같은 마을에는 최초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박세영(1916년생), 3대와 4대 국회의원 박세경(1919년생)이 살았다. 박세영의 처 조갑순씨는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 길 건너편에 살면서 함께 자랐던 남편 박세영으로부터 박세열이 공부를 잘해서 항상 1등을 했고 자신은 2등에 그쳤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으며 재주가 많았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28년 1월31일자 동아일보는 임실공립보통학교 6학년 박세열(16세)이 1월26일 도지사가 주는 우량아동표창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22세였던 1934년 9월24일 전북체육협회와 대판조일신문이 주최한 전주-군산간 역전 마라톤 경주에 참가했다. 1940년 1월21일에는 동아일보 지국에서 주최하여 임실읍 일신관 여관에서 열린 바둑대회에서 5등으로 입선했다. 이 사실은 공개된 내용이었음에도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조명하지 못했고 딸 박봉자씨도 모르고 있었다.

▲ 보통학교 6학년 박세열의 시상 소식을 동아일보가 소개하고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캡쳐했다.

항일운동

임실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세열은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했다. 선생 수업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항일의식 때문이었는지 우리 동요를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딸 박씨는 부친이 노래를 가르쳐 준다며 ‘반달’이나 ‘오빠생각’을 부르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딸 박씨에 따르면, 박세열은 항일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바람에 졸업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잘 알려졌듯이 1929년과 1930년은 광주학생운동과 이를 지지하는 동맹휴학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전국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서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박세열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26세 되던 1938년 당시 19세였던 구복순을 아내로 맞았다. 구씨는 구례 산동면의 독립운동가 구한영의 외동딸이었다. 이후에도 해방직전까지 박세열의 항일운동 때문에 일본 순경들이 여러 차례 집안을 뒤집어놓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가 했던 다른 활동이나 직업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나 1940년 동아일보 지국 주최 바둑대회 내용으로 보아 우송농장이라는 기업에 다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이다.

해방 후 임실

어렸지만 딸 박씨는 해방 후 매일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박세열의 모습을 보았으며, 집에도 양복과 넥타이가 많았던 것을 기억했다. 퇴근할 때면 부친이 바나나와 밀감을 사왔다고 하니 벌이가 괜찮았던 직장이었던 모양이다. 해방 후 임실에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했으며 남로당 임실군당도 있었다. 박세열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임실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산업부 차장으로 활동했던 이웃 박세영은 “해방 직후 건준이 결성되었는데 최초에는 다만 건국하자는 이념 하에 모든 인사들이 모여 건준의 일을 하였으나 후일에 이르러 좌익 색체가 농후하게 나타났고 그 후 익년 춘(이듬해 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다수의 우익인사들이 퇴회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을 맞은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강력한 독립국가로 다시 세울 것인지 준비하기 위한 첫 국내조직이었고 당시 재판부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좌익으로 보지 않았다.

이후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해산당했을 것이다. 전주와 인접해 있었으므로 조금 더 멀리 있던 남원보다 일찍 탄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딸 박씨는 부친이 “우리가 싸워서 일본놈 깃발을 끌어내렸더니 미국놈들이 와서 자기들 깃발을 꽂고 있구나”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이는 미군정의 점령군식 통치 행태를 비판한 것이었는데 식민통치 아래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니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 고부에 와서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공포했다. 이른바 ‘정읍발언’이었다. 식민지 하에서조차 분단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항일운동가들은 이에 즉각 반발했다. 딸 박씨는 당시 부친이 고부에 다녀와 항의 시위를 조직했다고 한다. 항의 과정에서 문병학 등이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갔고 같은 해 11월 전주형무소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문병학은 주모자라며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탈옥 중 사살당한 것인지 탈옥 후 잡혀 살해당한 것인지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풀어주고 뒤에서 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46년 임실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딸 박씨는 입학하기 전과 입학한 뒤를 구분해서 기억할 수 있었다. 임실읍내에서 문병학의 장례행렬과 함께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두루마기를 입은 부친이 행렬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때문에 박세열 등이 임실경찰서로 잡혀 갔고 한 달 정도 뒤에 풀려났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무사히 풀려난 것을 축하하면서 집으로 몰려들었고 집에서는 막걸리를 준비해서 대접했다.

해방된 지 2년이 되는 1947년에도 박세열에 대한 예비검속은 계속되었다. 긴 칼을 찬 경찰들이 잡아갔고 그 때마다 아내 구복순이 돈을 들고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때마다 한 달 정도 후 풀려났다고 한다.

박세영 관련 판결문은 미군정 하에서 조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스포츠 동호회가 어떻게 좌익으로 조작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그 대상이 법원 직원들이어서 더욱 놀랍다. 1947년 5월15일 있었던 이 사건을 ‘전주지방법원 좌익세포조직 사건’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사건의 발단은 좌익사상을 가졌다는 배구 선수 김백욱과 문동석 2명이 경찰에 적발된 것이었다. 법원 직원 18명이 구속되었는데 이들과 자주 모였던 선수 회원들이 모두 미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2개월부터 2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함께 옥살이를 했던 회원들은 이 사건이 모두 조작된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허무지사”였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때조차 무사했으므로 변호사 박세영을 좌익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인용된 사건이었다.

▲ ‘1951년 형공 제17호’ 판결문 중 박세영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문규는 1947년 5월에 있었던 전주지방법원 좌익세포조직 사건이

조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미군정 당시 조직사건이 어떻게 조작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조갑순 선생 제공.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격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48년 이를 반대하는 2.7투쟁이 시작되자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은 곧 토벌식 군사작전으로 확대되었다. 2월26일에는 시위대가 성수지서를 점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살해당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지서를 점거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잡힌 경찰 2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실경찰서는 다시 무장경찰대를 보내 시위를 진압하고 287명의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박세영 판결문에 따르면, 2.26사건으로 사로잡힌 엄현섭(1907년생 추정)이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뒤 사망했다고 한다. 엄현섭은 1930년 전라북도 조선공산당사건과 1934년 전북교원사건으로 체포되었던 항일운동 경력을 갖고 있었다.

딸 박씨는 박세열 역시 이때 연행당했지만 곧 풀려났다고 한다. 하지만 5.10선거를 앞두고 다시 끌려갔다. 여기서 풀려난 뒤 1948년 7월19일 여운형선생 서거 1주기 행사가 서울에서 열리자 박세열은 박세영과 함께 참가했다. 집회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지만 행사가 끝나자 경찰의 폭력적인 해산이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고 한다. 무사히 임실로 돌아 온 박세열은 이 때문에 임실경찰서로 끌려갔다가 8월 중순 풀려났다고 한다.

박세열의 죽음

성수지서 사건 이후 임실경찰서로부터 계속 감시를 당하던 박세열은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0월20일 집에 있던 중 사찰계 형사 두 사람에게 잡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문서자료나 증언자들이 없어 어떤 배경이 원인이었는지 파악되지 않지만 여순사건 발생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함께 끌려간 주민들이 많았다는 것으로 보아 가공된 조직사건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1948년 박세열은 3학년이 된 딸 박씨를 임실에서 전주국민학교로 전학시키고 전주에 살던 동생 박해옥의 집에서 다니게 했다. 딸 박씨는 주말마다 임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 유학 생활이 익숙해진 가을 어느 날 박세열은 또 임실경찰서로 잡혀 갔다. 여순 14연대의 반란이 있고 난 다음날이었다.

만삭 임산부였던 구복순이 면회를 갔지만 임실경찰서는 면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첫 면회는 딸 박씨가 했다. 남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 살된 동생을 업고 경찰서 유치장을 찾았던 때는 1948년 10월26일(음력 9월24일)이었다.

딸 박씨에게는 하얀 옷을 입고 유치장에 앉아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에 무릎을 치며 기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낡은 필름 영상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함께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열대여섯 명은 되어보였는데 그 중에는 “남규 아저씨”라고 불렀던 사람도 있었다. 박남규는 박훈(1919년생)의 다른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박준창의 아들이었다. 청웅면 출신인 박준창은 청웅면에 야학을 설립하고 직접 교육활동을 한 사실이 1925년 10월15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확인된다.

임실경찰서는 1948년 12월1일 새벽 4시 유치장에 갇혀 있던 박세열, 박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을 머리에 용수를 씌운 채 줄줄이 묶어 트럭에 싣고 나갔다. 트럭은 남원 가는 길목인 오수면 말티재에 멈추었고 주민들 모두 내려 처형장인 생암 골짜기까지 걸어갔다.

경찰서 앞에서 가게를 하던 박세택 등 주민들이 유치장에 갇혔던 이들이 트럭에 실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끌고 가던 사람들은 군복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들이 군인이었다면 5연대 헌병대나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이었을 것이다.

박세열이 끌려나가고 얼마 뒤 행방불명으로만 알고 있던 가족들에게 희생자의 유품이 전달되었다.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와 구두, 안경, 시계였다. 이를 전해 준 형사는 “군인들이 끌고 나갔는데 어디에서 희생되었는지 모른다”며 알려주지 않았다. 시신 찾을 생각을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으리라.

딸 박씨는 유품을 받은 할머니가 “아들은 오지 않고 왜 유품만 가져왔느냐”며 울부짖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형무소 재소자의 경우를 제외하면 학살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에게 유품이 전달된 사례는 드물다.

유품을 받은 유족들은 그의 죽음을 짐작하고 있을 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시신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조갑순은 박세열이 희생되었을 당시 가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느닷없이 그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그래서 보니까 할매가, 이 집 할매가 요렇게 쪼그맸어요, 징징징징 울고 다녔어요”라며 희생자의 처가 애처로이 도움을 요청하고 다니던 모습을 회고했다.

박세열의 죽음 후 아내 구복순은 시신을 찾으려고 곳곳을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막내 아들은 젖을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1949년 5월24일 전주 화성병원에서 사망했다. 아들을 잃은 뒤 한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 뒤 산목숨은 살아야 했으니 1946년 전주형무소 탈옥사건으로 총살당한 문병학의 처와 함께 서울로 쌀장사를 다녔다고 한다. 동병상련의 처지로 서로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박세열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올까 봐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전쟁 전 임실경찰서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사례는 그 뒤에도 확인되었다. 2014년 3월10일 필자와 만난 오수면 오암리 한만석씨(1928년생)는 형 한길석(집에서는 한남석으로 부름)이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1949년 4월 성수산 아래 깊은 산골에 있는 생암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시신을 찾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생암골짜기 근처에 살던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 누군지 알 수 없는 유골들이 돌아다녔던 모습을 보았다. 지금은 성수산 자연휴양림으로 개발되어 콘도가 지어져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과 임실

전쟁이 일어나자 임실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인민군 점령 직전인 1950년 7월20일 오수면 봉천리 말티재와 임실읍 두만리 모래재에서 집단 희생당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 수는 20명에서 60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인근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자 수는 적은 편이었다. 이에 대해 딸 박씨는 이승만 정부에 반대한 사람들 대부분은 전쟁 전 이미 학살당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세열과 함께 희생된 주민이 20여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인민군 후퇴 시기에도 내무서에 의한 보복학살이 다시 발생했다. 9월27일 임실군청과 관촌분주소에 갇혔던 주민 40여 명이 방공호 등에서 희생되었다. 군청 뒤 방공호에서만 300여 명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시설의 크기나 희생자 명단 등으로 보아 과장된 기억으로 보고 있다.

다음날인 9월28일 미 2사단 24연대가 임실을 수복하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은 주민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1사단 작전이 본격화되기까지 처형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인민군 패잔병이나 빨치산 활동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학살은 11사단과 경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청웅면 폐광굴에서 벌어졌다. 370여 명이 1951년 3월14일부터 임실경찰서와 11사단이 굴 입구에 불을 놓아 연기에 질식사당하거나 빠져나오면서 잡혀 총살당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빨치산이라고 했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토벌작전을 피해 폐금광으로 모였던 인근 지역 주민들이었다.

희생자의 처 구복순의 죽음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의 가족들이 연행되어 임실읍내 소금창고에 감금되었다고 한다. 당시 창고에서 지냈던 조갑순 할머니는 감금된 가족들이 모여 밥을 해먹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감금이라기보다는 격리 생활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마치 독일 나치의 집단수용소 게토처럼.

이를 피하기 위해 박세열의 처 구복순은 어린 딸 박씨와 함께 지리산 등으로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청웅면 폐광굴에서도 피신생활을 했으나 경찰의 공격 직전 나와 학살을 피했다. 하지만 1951년 3월18일 운암면 학암리에서 생포되어 살해당했다. 살해 직전 딸 박씨는 빨치산을 따라 회문산 가마골 전북도당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면 본인도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그의 시신은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장기수 임방규씨가 직접 목격했다.

▲ 장기수 출신인 임방규 선생은 구복순 선생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실과 오수역 부근에서 있었던 빨치산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2014년 3월10일 조사.

빨치산과 함께 산 생활을 해야 했던 딸 박씨는 인민군 장교 최태환 등으로부터 글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그는 중좌로 우리의 중령에 해당하는 고급 장교였다. 방호산 사단으로 알려진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빨치산 활동에서 체포된 뒤 전향하여 <젊은 혁명가의 초상>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한국전쟁 초기 파주, 고양, 김포를 거쳤으므로 당시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의 회고록과 비교하면 한국전쟁 초기에 발생했던 여러 의문점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희미한 기억조차 사라지려나

박세열은 해방 전후 30대 중반의 지식인이었다. 패망한 일본 식민지 정부를 대신할 통일독립정부의 수립과 식민지 억압에서 해방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를 꿈꿨을 것이다. 그 꿈들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름 없는 민중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도 모자라 민족지도자인 여운형 선생까지 멀쩡한 한낮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1년 뒤 그를 죽인 미군정이 이승만 친일파 독재정권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했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전쟁으로 아내조차 학살당했고 남겨진 딸들은 너무 어렸다. 가족이 모두 해체당해 어린 딸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아직도 이산가족이 되어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는 동생이 있다고 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 외에 박세열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재판을 받았다면 관련 문서자료라도 남아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다. 친일파 권력, 독재자의 권력은 이제 거의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해 가는 것 같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완전 범죄가 성공을 거두기 일보 직전이다.

 

*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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