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17) 광개토왕 : 백제와의 전쟁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왕은 18살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은정과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으며 (옳지 못한 자들을)없애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고 칭송하고 있으며, 시호 또한 이 내용을 담아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즉 국토를 널리 넓히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 태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광개토왕 즉위 당시 내외정세는 매우 복잡다단했다. 서쪽으로는 후연 세력이 등장해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북서쪽으로는 거란족들이 준동했으며, 동북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가 고구려의 지배에 엇서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 것은 백제 세력이었다. 백제는 근고초왕 때 국력신장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360년대에 이르러 강대한 나라로 성장했다. 

강성해진 백제는 그 힘을 기반으로 가야 나라들과 ‘형제, 부자’ 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일본 열도의 왜 세력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로써 백제-가야-왜 연합체제가 형성됐다. 더 나가 신라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을 기울여 366~368년에는 신라와의 우호관계가 맺어졌다. 이러한 흐름들은 고구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백제는 369년 치양전투, 371년 남평양성 공격을 통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백제의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고국원왕이 사망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고구려는 백제의 도전에 유주를 포기해야만 했다. 유주 진출 군대를 빼내 백제와의 전투에 투입했다. 375년에 있었던 수곡성 탈환전투는 이러한 전략적 결단의 산물이었다. 고구려는 수곡성 탈환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 승리로 백제에 기울던 신라를 다시 자기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고구려에 도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377년 백제는 남평양성을 공격해왔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또 다시 승리했다. 이후 광개토왕 등장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는 소강상태가 지속됐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했다. 백제는 이 기간 동안 가야, 왜 세력들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칠 치밀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바로 이러한 정세에서 왕위에 올랐다. 

▲ 광개토왕릉

백제와의 전투가 시작되다(391~395년) 

391년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조성된 주객관적 정세를 고려해 백제 세력을 주타격 대상으로 삼고 집중 타격하는 한편, 신라는 투쟁보다는 견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한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 기사에는 위와 같은 광개토왕의 전략에 따른 사태 흐름이 잘 밝혀져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 즉위 초기에는 백제 타격에만 군사적 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다. 391~395년까지 서북쪽 지역의 거란 세력이 소란을 피우고 있어서 군사를 보내 이 세력을 소탕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력을 양분할 수밖에 없었다. 

392년 7월 광개토왕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쪽의 석현성(개성 서북 청석령 부근 또는 여현)을 비롯한 10개 성을 점령했다(〈삼국사기〉권 18 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원년 7월; 여기에서 원년이라고 기재한 것은 2년을 잘못 기재한 것). 병법에 능한 군사가로 알려진 광개토왕이 대군을 이끌고 연이어 성을 함락하자 백제는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퇴각했으며, 한강 이북의 많은 땅들을 내주고 말았다. 뒤이어 고구려군은 10월 백제의 관미성(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구려군이 이미 10개 성을 함락한 다음 집중 공격한 성이므로 임진강 북쪽 또는 남쪽 기슭에 있었던 성이라고 볼 수 있다)을 공격했다. 관미성은 백제 서북방의 요새로서 네 면이 험한 벼랑으로 돼 있고 또 물이 둘러막고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군은 7개 방향으로 나뉘어 20일 동안이나 쉼 없이 공격해 마침내 이 성을 함락하고야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백제의 예성강 방면으로의 진출을 봉쇄하고 임진강 하류지역을 제압해 장차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요긴한 길목을 장악했다. 

393년 백제의 아신왕(재위기간 392~405년)은 좌장 진무에게 관미성을 포함한 5개 성 탈환 임무를 하달하면서,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관문)과 같은 요충지이다.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돼 있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그대는 마땅히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성을 탈환해 수치를 씻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으로 볼 때 관미성이 얼마나 요충지인지를 알 수 있다. 아신왕의 명령을 받은 진무는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고, 자신이 직접 대오의 앞장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도 무릎 쓰고 공격했으며, 5개 성 중에서도 관미성을 먼저 함락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켜 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394년 7월 백제군은 다시 수곡성까지 쳐들어갔으나 광개토왕은 정예군 5000명을 동원해 백제군을 격파했다. 이처럼 백제군의 공격이 극심해지자 고구려는 그해 남쪽지역에 7개 성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했다. 

395년 8월 백제군은 다시 좌장 진무의 지휘 밑에 고구려의 남쪽 변경에 쳐들어왔으나 광개토왕은 직접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패수(예성강)가에서 싸움으로써 크게 이기고 백제군 8000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붙잡았다. 백제로서는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아신왕은 분노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11월 자신이 직접 7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청목령까지 진출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얼어 죽은 군사들이 많아져 북한산성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렇듯 392~395년에 있었던 여러 전투들에서 고구려는 연전연승했다. 이것이 바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를 건너 백제를 격파했다’는 구절과 잘 대응되는 역사기록들이다. 

광개토왕의 대규모 공세에 백제 아신왕은 무릎 꿇고 항복하다(396년)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396년(병신년)에 예성강 하류-임진강 중하류 일대 그리고 경기도와 충북 서부 일대의 전선에서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전면 공격을 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은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하류 남쪽 기슭에 상륙했다. 이것은 기상천외한 우회전술이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그 사이 주력군은 백제 수도의 북쪽 한강 기슭까지 진출해 공격태세를 취했다. 이러한 고구려군의 공세에 백제 군사들은 완강한 태세로 맞서 싸웠지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에 화의를 제기했다. 

백제는 남녀 노비 1000명, 가는 베 1000필을 바치고 58개 성, 700촌을 고구려에 넘겨주기로 했다. 또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보내고, 아신왕 자신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고구려왕의 신하가 되겠다”고 성하지맹(성 아래에서 하는 항복 맹세)을 했다.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다(399년~400년) 

백제는 396년 아신왕의 성하지맹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고구려와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비밀리에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그 일환으로 397년 왕태자 전지(후의 전지왕)를 왜국으로 보내 군사를 모집 동원하도록 했다. 다른 한편 백제는 397년 가을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하고, 388년 3월에는 쌍현성(한강 북쪽)을 쌓았다. 8월에는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출동시켜 북한산 북쪽에 있는 큰 울타리 성까지 진격시켰으나, 큰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하면서 군사행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399년 백제는 가야와 왜의 군사까지 동원해 새로운 전쟁을 벌였다. 백제는 먼저 가야, 왜 병력을 앞세워 신라를 쳐, 신라 서부 일부지역을 장악 점령하도록 했다. 이는 신라를 먼저 굴복시키고 고구려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술책이었다. 신라왕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신라에게 비밀 계획을 알려줬다. 

400년 광개토왕은 보병, 기병을 합해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신라 구원작전을 개시했다. 남거성(고구려 남쪽 변경에 있던 성)을 출발해 신라성(신라 변방의 성)에 이르니, 성안에는 왜군이 가득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군 대부대가 나타나자, 왜 군사들은 감히 싸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고구려군은 신라군과 협력해 이들을 급히 추격해 임나가라(금관가야, 오늘의 김해지역)의 종발성까지 진출했다. 종발성을 지키고 있던 가야군과 왜군 역시 싸워볼 생각도 내지 못하고 투항했다. 고구려군은 종발성에 신라군을 배치해 지키도록 조치했다. 뒤이어 고구려군은 왜군에게 점령당했던 신라의 성염(?)성을 들이쳤다. 왜군은 역시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성 안의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 안에 있던 신라 주민들이 완강하게 거부했다. 고구려군대는 여기에도 신라군을 배치 주둔시켰다. 그 후에도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싸움은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이에 관해 광개토왕릉비문 40여자가 보이지 않아 그 구체적 과정을 알 수 없다. ‘잔왜’(백제와 왜)가 무너져 도망갔고 그 성을 함락해 신라 수비병을 뒀다는 내용이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확실하다. 

고구려의 신라 구원작전은 대승리로 마무리됐다. 이 작전에서 고구려군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백재-가야-왜 연합세력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것은 고구려군의 무기무장과 전술, 전투력이 비할 바 없이 우월했다는 것을 말해주며, 광개토왕의 위대성을 웅변해준다. 고구려의 지원으로 파멸의 위기에서 구원된 신라왕은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관례를 깨고 자신이 직접 고구려 땅에 찾아와 광개토왕을 알현하고 사의와 함께 조공예물을 바쳤다. 이 싸움 이후에서 고구려군은 신라의 요충지와 전방지대에 주둔하면서 백제–가야–왜 연합세력의 침공을 저지시키는 데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김해의 금관가야는 내리막길을 걷고, 고령의 대가야가 6가야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광개토왕이 직접 대방계로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다(404년)

백제는 연속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반대하는 전쟁 준비에 몰두했다. 402년 5월 백제의 아신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며, 403년 2월 답방한 왜국 사신을 특별히 우대했다. 이렇게 왜국을 구슬려 더 많은 병력을 충원 받았다. 이렇게 전쟁 준비에 몰두한 백제는 404년 드디어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다. 우선 왜군을 앞세워 바닷길로 대방계(황해도 남쪽 해안지방으로 옛 대방국 남부지방)에 침입했다. 이때는 마침 고구려가 후연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400~404년)로, 이 틈을 활용해 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타산을 하고 모험적 공격을 펼친 것이다. 

광개토왕은 역시 명장이었다. 그는 서북방뿐 아니라 남방의 정세 변화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백제-왜 연합군이 대방계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자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격을 펼쳤다. 그는 남평양성에서 출발해 침략 초기에 백제-왜 연합군을 후려쳤다. 비문에는 주로 왜군과의 전투만 나오는데, 그것은 백제군은 후방에 있으면서 왜군을 선봉대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은 왜군을 여러 지점으로 분산시켜 놓고 포위해 섬멸적 타격을 가했다. 결국 선봉에 섰던 왜군은 괴멸되고 백제-왜 연합군은 더 이상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도망가고 말았다. 

407년 광개토왕은 전면적인 백제 타격작전을 펼치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404년 백제가 왜 세력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한 것에 대한 보복전을 준비하고 있다가 백제 내부가 복잡한 틈을 이용해 새로운 타격을 가하기로 했다. 407년 광개토왕은 보병 기병 합해 5만명을 남쪽으로 출동시켰다.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백제군을 격파했으며, 투구와 갑옷 1만여 벌을 노획하고, 그밖에 군수물자도 수없이 많이 노획했다. 그리고 백제의 사구성, 누성, 우전(?)성 등 6~7개 성을 빼앗고 개선했다. 이 작전 이후 백제는 오랫동안 감히 고구려에 대항하지 못했다. 407년 타격작전 이후 고구려는 409년 7월 독산성을 비롯한 ‘국동6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이주시킴으로써 390년대 이후 새로 차지한 지역의 방어를 강화했다. 

392년 이후 약 15년간 고구려-신라 연합 대 백제-가야-왜 연합의 대결전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백제, 왜는 신라에 대해서는 이따금 침범했지만 고구려는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고구려는 삼국통일정책을 더 힘 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게 됐다. 고구려는 백제를 제압하는 한편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399~400년 신라 구원투쟁 이후에도 고구려는 신라에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왜군의 침략과 준동을 막아주었다. 고구려군은 470년대까지 신라 땅에 주둔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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