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0)

1)

철학은 세계관이다. 자연 법칙이 있고,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있다 할 때, 그 방법론의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 세계관이다.

이런 방법론(기본 가정, 연구방법, 실천전략 등)은 이미 자연과학자들이 실천해 온 것이다. 자연과학자 대부분이 준수하는 일정한 틀 내에서 방법론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철학은 이제 그런 방법론을 정당화한다.

유물변증법도 철학적 세계관의 하나이니,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라 볼 수 있겠다. 다른 세계관, 맹목적 우연론이나 신학적 세계관은 근대 이후 최근까지 전개된 자연과학에 한계를 설정하려 한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보다는 회의와 불신의 눈으로 대한다. 반면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은 지금까지 자연과학적인 연구를, 그 가정과 방법, 실천전략을 철저히 지지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런데 우스갯소리지만,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의 관계를 실제로 보면, 철학자인 나는 약간 기분 나쁘다. 대개 자연과학자는 유물변증법의 자연과학에 대한 연모를 짝사랑으로, 아니면 심지어 스토킹 당하는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거기에 까닭이 있다.

사실 자연과학자 가운데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다. 자연과학자 중에는 신의 흔적을 찾아 자연을 연구하다가 위대한 발견을 이룬 사람들도 많다.

빛에 대한 연구를 보자, 20세기 현대과학은 빛의 연구 때문에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 과학자들이 빛을 연구했을까? 그건 간단하다. 빛은 오래 전부터 신의 흔적이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창문으로 유명한 고딕 성당은 이 신적인 빛을 가득 받아들이려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지상에 신이 존재한다는 흔적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빛을 연구했다. 이런 점에서 종교적 세계관이 때로 과학을 발전시키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런 자연과학자는 유물변증법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나서면, 기분이 어떨까? 찜찜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학자의 연구 동기가 무엇이든, 그들의 연구 성과는 자신이 의도를 배반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연에서 신비, 기적, 신을 제거하는데 기여했다. 결국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유물변증법을 지지한 셈이 된다.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엥겔스와 마르크스.[사진 : 구글검색]

2) 환원전략

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유물변증법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로 넘어가 보자. 이 가운데 변증법은 또 나중으로 돌리고, 우선 마르크스의 유물론부터 시작해 보자.

유물론의 정의는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은 유물론이란, 인간이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인다. 이건 인간론적 차원의 정의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레닌의 유물론 정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유물론은 의식 밖에 실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규정된 정의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론의 차원, 인식론의 차원은 더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차원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이 문제는 쉽게 통속화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질에서 관념이 나올 수 있는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유물론이다. 나올 수 없다고 본다면 관념론이다. 간단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많은 논란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 ‘나온다(생산, 구성)’라는 틀이 중요하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자연과학자는 실천적 전략으로서 자주 환원주의를 택한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한 세계로 환원해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런 실천전략은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알다시피 화학은 소립자 물리학(물리화학)으로 환원된다. 생물학은 분자생물학을 통해 그 기초가 놓인다. 세계는 소립자의 층위, 화학의 층위, 생물의 층위가 있고, 여기서 높은 층위는 낮은 층위에 의존하고 이것으로 환원된다.

이 환원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이 환원의 관계를 철학자들은 명확하게 규정하려고 끝없이 논쟁한다. 복잡 치열한 논쟁은 생략하고 다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체로 이 환원의 관계는 생산, 구성의 관계로 규정된다. 이처럼 생산과 구성이 강조되는 것은 기술적인 제작이라는 근대과학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겠다.

이런 환원전략은 자연과학의 대표적인 실천전략이며, 자연과학은 이를 통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자연 세계 속에 많은 존재들이 불필요한 것으로 사라졌다. 한때는 프롤로지스톤이란 것이 있었다. 연소과정에서 나오는 불길이 그것이다. 하지만 화학은 연소를 물질과 산소의 결합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프롤로지스톤이란 존재를 제거했다.

한때는 우주에 에테르가 충만했다. 빛이 파동이라면 텅 빈 우주에 빛을 전달하는 물질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즐겨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를 찬양했다. 빛이 파동만이 아니라 입자적 측면도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이런 신비한 존재인 에테르를 제거했다.

3) 관념이란?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면 관념도 물질로 환원할 수 있는가? 유물론자들은 환원이라는 실천전략을 과감하게 연장해서 관념도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다. 거기에 반해 관념론자는 이 관념이야 말로 지상에 남은 최후의 신의 거점으로 보고, 여기서 최후 결전을 치르자는 식으로 저항한다. 거의 결사항전, 전원 옥쇄의 각오이다.

유물론자는 이 저항 앞에 어쩌면 무기력하다. 스스로도 약간 의심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관념만은 물질로 환원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뒤로 도망칠 준비를 한 채 발을 앞으로 내미는 형국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념은 과거 프롤로지스톤이나 에테르와 달리 쉽게 환원될 것 같지 않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관념의 고유한 특징 때문이다. 관념은 무게가 없다. 비유적으로 철학자는 자기 생각 때문에 머리가 무겁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철학자의 머리를 저울에 달아 보더라도 보통 사람보다 무게가 더 나갈 것 같지는 않다.

또 관념은 장소도 없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두 여인의 관념이 동시에 떠오르지만 행복하게도 두 관념이 서로 한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 질투하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실제 두 여인이 이걸 알면 둘 다 끝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물질들처럼 관념도 시간적인 좌표를 갖지 않는가? 기억에 속하는 관념에 시간의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념도 많다. 내가 외우고 있는 구구단은 5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구구단이 아니다. 나는 영원한 법칙으로서 구구단을 외운다.

무게도, 장소도, 시간도 없는 이것을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관념’이라 부르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 특히 동물에 이르면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능력이 발전한다. 인간이 가진 ‘의식’의 능력도 이런 지각 능력이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동물의 지각은 서로 차이가 있다.

소는 도축장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소는 슬퍼하는 것인가? 즉 슬픔의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위험 상황에서 나오는 무조건 반사 행동으로서 눈물을 흘리는가? 반면 나는 때로 슬픔이란 관념이 없이(즉 슬픔을 모르는 채) 슬퍼하는 행동(눈물, 기분저하 등)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슬플 경우 대부분 내가 슬프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이런 이야기 속에 이미 관념이라는 말의 어떤 특징이 제시되어 있다. 내가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관념이 관념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마치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처럼 마음의 스크린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관념은 독일어로 ‘Vor(전)’-‘Stellung(세워져 있음)’이라 한다. 말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관념은 이차원적이다. 먼저 우리는 실제 사물에 대해 지각한다. 그런 다음 그 지각을 마음속에 떠올린다. 그것이 관념이므로 관념은 지각의 지각이고, 자주 자기의식적인 것, 자각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4) 컴퓨터와의 사랑

인간이 관념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많은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 인간의 언어 능력, 세계에 대한 능동적 인식(지각, 판단 등 사유), 감정과 의지의 자유, 공동체 구성 능력 등 다른 동물에서 발견되지 않던 많은 능력이 이런 관념의 능력으로부터 설명된다.

그렇다면 이제 앞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마치 생명 과정이 분자적 힘으로 환원되듯, 이런 관념의 능력조차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는가? 오늘날 컴퓨터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기초적인 행동 능력조차 컴퓨터로 생산하고 있다. 얼마 전 알파고가 나와 세계 바둑의 고수들을 절절매게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마침내 인류의 꿈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인류는 물질로부터 사유(지각, 판단)의 능력조차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알파고가 인간이 사유 능력을 충분히 생산하는가는 문제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알파고가 인간처럼 관념을 가지는 것인가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단순한 지각, 판단 등 사유 능력과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천지간의 차이처럼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과학의 환원전략을 연장하여 관념조차 물질로부터 생산할 수 있다고 보기는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인가? 컴퓨터 과학이 발전하면 인간처럼 관념을 갖는 존재가 생산될 것인가?

감정은 관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컴퓨터가 관념을 생산할 수 있다면 감정을 지닌 컴퓨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고 모반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컴퓨터, 기분 좋은 세상이 아닐까? 그런 세상이 오면 난 차라리 컴퓨터를 사랑하겠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느 시인이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는 시를 썼는데 맥락은 다르지만, 좋은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절대 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도 있다.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인간의 관념적 능력만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어느 편인가?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