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 발표 “강호순 사건으로 물 타기 시도”

▲ 지난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남일당 빌딩 옥상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들을 강제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무리하게 특공대를 투입,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건물 옥상에서 경찰이 강제진압을 시작한 가운데 시위대가 설치한 망루가 불타고 있다.

지난 2009년 1월 용산 남일당 빌딩 옥상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 5명과 진압에 투입된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는 당시 경찰 지휘부가 농성 현장에 화염병 등 휘발성 물질이 있어 화재 등 사고 발생 가능성이 컸음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진압을 강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특공대 제대장이 작전 연기를 건의했지만 당시 서울청 경비계장에게 묵살 당했다. 

또 당시 경찰 지휘부는 용산참사에 따른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하고 경찰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대응하려 한 것도 밝혀졌다. 

5일 통신사들에 따르면,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이같은 내용 등을 담은 용산참사 사건에 대한 인권침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경찰청이 사과할 것과 유사사건 재발방지 및 인권증진을 위한 정책 개선 등을 권고했다. 

용산참사는 2009년 1월19일 철거민 32명이 용산 남일당 빌딩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에 돌입하자 이튿날 새벽 서울경찰청 경찰특공대가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원 6명이 숨지고 30명이 부상당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진상조사위는 당시 경찰이 철거민들과의 충분한 협상 노력 없이 진압작전을 개시했다고 판단했다. 특공대원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만인 20일 아침 6시30분께 옥상으로 투입됐다. 경찰 지휘부는 농성자들을 ‘범죄자’, ‘꾼’ 등으로 지칭하며 협상의 여지가 없는 진압 대상으로만 판단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세운 작전계획엔 우발상황을 대비한 안전장비로 300톤급 크레인 2대와 에어매트 3개, 소방차 6대 등이 필요하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톤 크레인 1대만 배치됐고 에어매트는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고 고가사다리차와 유류화재 소화에 유용한 화학소방차는 현장에 오지도 않았다. 일반소방차 2대만 배치됐는데 작전을 세울 때 참고했던 2005년 오산세교지구 망루농성진압작전에서 소방차를 23대 배치했던 것과 비교할 때도 크게 모자란 수치다. 

이런 사실을 파악한 당시 경찰특공대 제대장이 “작전이 불가능하니 작전을 연기하자”고 건의했지만 서울청 경비계장은 “겁먹어서 못 올라가는 것이냐”며 묵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특공대가 옥상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등 저항하는 과정에서 1차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특공대원들은 소화기를 교체하지도 못한 채 2차 진압에 투입됐다. 

진상조사위는 “진압작전계획상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1차 진입 후 유증기 등으로 화재발생 위험이 커졌는데도 경찰 지휘부는 작전의 일시 중단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현장에서 사망자를 발견하고도 16시간 이상 지난 뒤에야 유가족들에게 사체 확인을 해줬을 뿐 부검 필요성 등에 대해 통지하지 않고 유족들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부검을 강행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 지휘부는 사건 발생 이후 경찰 조직을 동원해 여론몰이에 나섰다. 전국 사이버수사요원 900명에게 1일 5건 이상의 반박글을 올리고 각종 여론조사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경찰 내부문건에서 확인한 데 따르면 1월24일 게시물과 댓글 약 740건, 여론조사와 투표 참여는 590여건이 이뤄졌다. 

사회적 파문이 커지고 경찰 지휘부가 검찰에 기소될 위기에 처하자 다른 사건을 통해 물 타기를 시도한 것도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강호순 사건은 2005년 10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장모 집에 불을 질러 장모와 처를 살해한 이래 2008년까지 경기도 서남부에서 7명의 여성을 연쇄 납치, 살해해 충격을 준 사건이다. 강씨는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된 2009년 1월24일 검거됐는데, 당시 언론들은 관행을 깨고 이례적으로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청와대쪽의 지시를 실행에 옮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위는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들에게 사과하고 경찰이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활동을 금지하라”며 “철거용역 현장에서 경찰력의 행사, 변사사건 처리 규칙과 경찰특공대 운영규칙 등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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