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 수원 화성 전경(사진 출처 수원박물관 홈페이지)

정조는 읍치의 이전과 읍치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 등을 신속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기관찰사에 서유방, 수원부사에 조심태를 임명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제2의 도시로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이자 없는 돈 6만 냥을 빌려주자는 상업진흥책을 내놓았다.

수원 사람에게 이자 없는 돈을 꿔주어 장사 밑천으로 삼게 하여 상권을 진흥시키려는 정책이었다. 6만 냥이라는 돈은 당시 쌀값을 1석 당 5냥으로 계산하더라도 1만2000석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더하여 조포사(造泡寺) 승려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그들에게도 돈을 빌려주어 종이신[紙鞋]을 만드는 본전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수원을 ‘상왕의 도시’, ‘조선조 제2의 도시’로 건설하려는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하게 된다.

1793년 1월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조선조 제2의 도시로 또한 본인이 노후에 머물 곳을 상정한 새로운 신도시 건설 구상을 실현시킬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신읍치가 들어선 팔달산 주변 지역은 북쪽에 광교산이 우뚝 솟아 숙지산과 여기산 등을 제외하면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물줄기도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에서부터 발원하여 수원천이 도시의 중심으로 흐른다.

화성의 도시계획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행궁’은 유수가 통치하는 중심 치소가 되고 매년 아버지 원침(園寢)을 찾아올 왕의 처소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순조가 1804년 성인이 된 뒤에는 왕위를 물려주고 정조가 직접 내려와 상왕으로서 통치하는 ‘궁(宮)’이 될 것이었다.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평소에는 수원부의 동헌으로 기능하였다. 행궁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생활공간은 평소 유수의 거처이지만 원행 때는 임금의 임시 처소로 사용된 유여택, 내당인 복내당, 혜경궁의 침전으로 사용된 장락당 등으로 구성된다.

둘째, 이동식 담장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의 낙남헌은 양로연과 과거시험 시상식 등 행사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셋째,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진휼행사를 베풀었다. 신풍루 주변 공간은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였다. 행궁을 호위하기 위하여 친군위들이 숙직하던 남북군영 행각, 매년 원행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한 외정리소, 행궁의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비장청·서리청·집사청도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 화성성묘전배도 (사진 출처 백과사전)

그리하여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 사이 행궁을 둘러싸는 5.7km에 달하는 성곽이 건설되고 도시기반 기설도 새롭게 조성되었다.

먼저 성 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남북대로와 행궁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하여 사거리를 만들고 이를 ‘십자로’라 불렀다. 이곳에는 상가가 들어서고 민가들이 주변에 조성되었다.

도시는 성곽 안팎 주민들의 거주 구역은 2개의 부(部)로 나누고 다시 그 안에 4개의 거주지로 편성되었다. 네 개의 행정 단위는 자내(字內)를 써서 ‘남성자내(南城字內)’, ‘서성자내(西城字內)’, ‘북성자내(北城字內)’, ‘동성자내(東城字內)’라 하였다.

4대문도 임금을 맞아들이는 북쪽문인 장안문을 가장 크고 화려하게 건설하고 원행과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남쪽문 팔달문을 그에 버금가게 건설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관청, 도로, 다리, 상가 등의 도시기반 시설은 물론 저수지와 둔전을 만들어 생산기반 시설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 조경도 중요시 여겨 도로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다. 그리하여 화성에는 버드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밤나무 등을 가리지 않고 심어 숲을 이루어서 울창한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 조경의 측면에서 소나무, 뽕나무, 측백나무, 느릅나무, 오동나무, 가래나무, 버드나무, 연, 대나무 등을 심었으며 특히 미로한정에서 국화를 완상하는 ‘한정품국’, 북지에 곱게 피어난 연꽃 등은 수원의 대표적인 꽃이 되었다.

소나무는 지금도 ‘노송지대’로 남아있고 창룡문 지역과 운동장 사거리부터 만석거 사거리까지의 도로는 낮에도 걷기에 무서우리만치 소나무가 빽빽하였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도시조경적인 측면에서 남지, 동지, 북지, 용연 등의 인공 연못도 팠다. 이 인공 연못의 조성으로 수문과 배수의 역할은 물론 각종 꽃과 나무를 심어 도시의 미관을 한층 격조 높게 하였다. (다음에 계속)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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