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39)

1) 월드컵 대신 철학을

한동안 마르크스 백문백답을 쉬었다. 선거철이니, 어쩌면 한가한 철학 이야기를 누가 들을까 싶어서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한다. 그러고 보니 월드컵 시절이네! 하지만 축구 보다가 꼴 안 들어가 답답할 때는 철학이 제격이다. 치맥보다 철학이 열 올리는 데는 더 낫다(저자는 이글을 지난 6월20일 썼다/ 편집자).

지금까지 나는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의 정치, 혁명사를 대개 훑어내려 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야말로 순수철학에 해당되는 마르크스의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인간론이 포함된다. 이름만 들어보아도 난해할 것 같다는 짐작이 들 것이다.

정치, 역사 철학은 그래도 현실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어, 어느 정도 쉬웠다. 하지만 존재론, 인식론 등은 순수한 개념의 전쟁터이니, 나 자신도 주저한다. 이 난해한 잔을 피하고 싶어 지금껏 뭉개고 있었는데! 하지만 어쩌랴? 그게 내 운명이라면, 피하지는 않겠다. 

▲ 칼 마르크스.[사진 : 구글 검색]

2) 80년대말 철학 논쟁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은 마르크스 철학과 주체철학의 관계이다. 내가 특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 관계 속에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철학과 관련된 모든 핵심 논제들이 잠복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한때 이 문제가 논란의 핵으로 부상한 적이 있다. 80년대 후반, 소위 철학논쟁의 시대에서였다. 소위 ‘철학의 근본문제 논쟁’(그외 철학논쟁으로 역사의 고유성을 논하는 ‘역사법칙 논쟁’이란 것도 있었다. 이 논쟁은 그런 논쟁과 구분된다.)이라 한다. 열기는 그때 정말 뜨거웠던 것 같다. 수많은 문건들이 연일 쏟아졌고 그 중에는 공개적으로 출판된 책도 있다.

생각난 김에 이리저리 당시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 중 대표적인 저서라면 <주체사상 비판1>(이진경 저, 벼리, 1989)와 <한국 사회변혁과 철학논쟁>(김창호 편저, 사계절, 1989)이다. 책장 구석에 박혀 있는 책을 다시 꺼내보니 옛날에는 책을 참 촌스럽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글자도 작아서 이제 내 눈으로는 보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저자의 운명도 기구하다.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 이진경은 현재는 무정부주의자이다. 최근 코뮌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주체철학을 옹호하는 편인 김창호는 노무현 정부 국정홍보처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NL이 갔던 길을 가버렸다. 그들의 운명과 그때의 논의 사이에 모종의 함수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내 기억으로 그때 논쟁은 유감스럽게도 뭔가 핵심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말꼬리 잡기식으로 전개되었고, 원전의 뜻을 이해하기보다는 서로 말을 비교해 차이를 밝히는 소위 원전 고증 논쟁으로 그쳤다.

예를 들자면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존재론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보는데, 주체사상은 철학의 근본문제가 이제 바뀌어 인간론의 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로 대두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다른 게 아니냐? 그러므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뭐 이런 식이다.

3) 주체철학과 마르크스의 철학

좀 우습게 되었다. 어느 것이 철학의 근본문제였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철학자는 항상 자기 문제가 철학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제일철학이라 했고, 최근 독일의 훗셀(하이덱거의 스승이다)은 자신의 현상학적 인식론을 전개하면서 그걸 제일철학이라 했다. 이런 것은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내용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론에서 주체철학이 마르크스 철학과 다른 것은 사실이다. 주체철학은 인간의 자주성을 본성으로 보지만 마르크스 철학에서 인간은 사회적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이 차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 철학과 다른 인간론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북쪽이나 사회주의 전체의 역사적 과정에서 그런 주장이 나온 배경을 살펴볼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런 차이가 등장하는 철학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인간론이 다르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에서도 다르다는 것일까? 철학에서 존재론은 인식론의 기초이고, 인식론은 인간론의 기초가 된다. 최종적인 인간론이 다르면, 그 이전의 존재론적인 문제나 인식론적 문제도 다른 것인가? 아니면 양자는 같아도, 최종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게 왜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변증법을 들고 나왔는지,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을 이해한다면, 주체철학이 과연 그런 마르크스의 철학을 계승하는지 아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유물변증법이란?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선 마르크스의 철학이 무언지 설명해야 그 다음에 가서 주체철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논의부터 시작해야 인간론적 문제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마르크스 철학으로, 존재론적 인식론적 문제로 가 보자. 앞으로 상당히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인간론의 문제로, 그리고 두 철학의 차이의 문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역사 정치철학 제외)은 ‘유물변증법’이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일반인은 이런 유물변증법을 몰라도 된다. 자연과학을 지지하면 유물변증법을 지지하는 것이다. 유물변증법은 자연과학을 지지하기 위한 철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가? 있다. 신이 세계를 시시각각 만든다는 창조론자, 이 세계는 맹목적 우연이 지배한다는 우연론자 등이 여전히 활개를 친다. 이런 창조론이나 우연론에 기초해서 사이비 과학이 등장한다.

한때 신과학이라는 것이 등장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빠져들었다. 요즈음 소위 자연의 목적론적 진화(대개 창발론이라 하기도 한다)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아직도 영구기관을 제작했다는 설이 인터넷에 심심치 않게 퍼진다.

그런 사이비 과학이 옳고 그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유물변증법을 알아야 한다. 자연과학적 지식을 이용하면 되는 일반인은 몰라도 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려는 지식인은 이런 유물변증법을 알아야 자연과학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잘못하면 사이비과학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본격적인 것은 다음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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