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있은 데 이어 18일 본(옛 서독의 수도)에 있는 여성박물관에서 ‘위안부’ 국제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여기 참가한 이산하 시인(‘유레카’ 편집위원장)의 발표문이 인터넷 사회연결망에서 화제다. 현재 동유럽 나치 경제수용소들을 순례 중인 이 시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다.[편집자]

 

▲ 지난 18일 독일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에서 ‘위안부’ 국제 심포지엄이 진행됐다.[사진 : 페이스북]

지난해 한국인들은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보고 모두 감동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여기 독일 제1공영방송의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년) 기자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시민과 학생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학살되는 비극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광주의 진실을 폭로했습니다. 이 영화 자막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 민주화에 공헌한 영웅- 위르겐 힌츠페터”

(Ein Held in Korea fuer die Demokratizierung)

말석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싸운 한 사람으로서 독일 국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책 속의 지식인은 많지만 길 위의 지성인은 드뭅니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밖에 있습니다.

1991년 한국에서는 소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가인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하자 그의 친구가 유서대필과 자살방조죄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친구의 분신자살을 제지하지 않고 심지어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도왔다는 아주 패륜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무려 24년 만에 조작된 사실이 밝혀져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났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강기훈씨는 계속 무죄를 주장했지만 일부 양심적인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침묵하고 방관했습니다. 그때 난 대법원 정문에서 1인 시위를 하며 한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강기훈이 24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고 해서 그동안 침묵한 우리까지 무죄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무죄지만 진실을 외면한 우리는 여전히 유죄다.”

1948년 한국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는 당시 전체 인구 30만 명 가운데 약 5만 명이 학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제주4.3사건’입니다. 주한미군의 지휘와 통제를 받은 군경토벌대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의 반공청년들이 수많은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양민들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어서 빨갱이가 된 것입니다.

한국은 36년간의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미국이 점령했습니다.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태극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 4.3홀로코스트는 바로 그 미군정 때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학살의 발생과 최종적인 책임은 미국에게 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의 양민학살은 인디언학살 이후 제주도가 최대 규모였습니다. 제주도는 '빨갱이 도살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야만적인 학살은 40년 동안이나 은폐되어 왔습니다. 아름다운 섬에서 전체 인구의 약 20%가 죽었고 80%가 살아 있는데 아무도 모를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파묻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한국은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바뀌어 ‘매카시 선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런 군사독재 정권에서 이 학살사건을 발설하는 것은 곧 미국의 도덕적 뇌관을 건드려 ‘빨갱이’를 자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침묵했습니다. 모두 방관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이나 미국의 만행은 열쇠처럼 깊이 묻혀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국판 홀로코스트'는 나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오늘 ‘제주4.3사건’으로 문을 열어가는 것도 바로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기억투쟁 때문입니다. 내가 26살 때 우연히 그 묻힌 열쇠 하나를 찾아내 미국의 제주4.3학살을 폭로한 바 있습니다. 1987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때 일어난 이른바 ‘한라산 필화사건’입니다. 물론 긴 수배 끝에 난 체포돼 구속되었고, 곧 ‘한라산 필화사건’의 법정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권변호사들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의 변호사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업자인 유명한 진보적 작가들마저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작품에 대한 법정증언을 거절했습니다. 적들의 침묵보다 친구들의 침묵이 더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깨닫습니다. 결국 모든 적폐는 나의 침묵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또한 그것들이 모여 우리의 침묵이 되고, 그 침묵의 연대가 바로 침묵의 파시즘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제주4․3학살’을 ‘제2의 아우슈비츠’로 본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한 ‘악의 평범성’에 주목합니다.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난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자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무 생각 없이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저녁에 퇴근해 가족과 즐거운 식사를 반복하는 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죽은 자들의 머리카락으로 짠 기름진 카페트와 옷을 입고 따뜻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학살된 시신의 자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란 감자를 배불리 먹고 나른해지는 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앞으로 구호를 외치고 뒤로 돈을 세는 것이 진화된 악의 평범성입니다. 그리고 지식인의 가치중립적 침묵이 가장 진화된 악의 평범성입니다. 

▲ 심포지엄에서 발표 중인 이산하 시인.[사진 : 페이스북]

일제시대의 일본군 성노예인 ‘종군위안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할머니들이 한 사람씩 죽어갔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오랫동안 방관했습니다. 침묵이 필요한 순간은 혀의 칼날이 베어여 할 것을 베지 않고 베지 않아야 할 것을 벨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벨 때 베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충만한 그 기회주의적 ‘악의 평범성’에 전율합니다. 모든 할머니들은 그 자체가 역사이며 한 사람의 죽음은 곧 한 역사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6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해부터 지금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세계 최장기 ‘기억투쟁’을 하는 정대협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역사를 바꾼 그 날의 용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왜 ‘용기 있는 행동’인가? 바로 이 세상이 ‘죽은 시인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해방 전 20만 명의 소녀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해방 후 2만 명의 소녀들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8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18만 명의 생사를 모릅니다. 다행히 ‘위안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온 할머니들도 우리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어 산송장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가족도 국가도 ‘몸을 버린 년’이라고 멸시하고 조롱하며 헌 고무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죽은 자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며 신음했습니다.

아무도 목소리 높여 당신들은 헌 고무신짝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목소리 높여 당신들은 ‘매춘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의 침묵이 소녀와 할머니들을 ‘매춘부’로 만들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그 모진 핍박의 세월을 홀로 피를 흘리고 홀로 여위어 왔습니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통곡했습니다. 이 땅에 죽지 못해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통곡했습니다.

역사가 고발하듯 어제 침묵한 자들은 오늘도 침묵했고 내일도 침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 있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은 바로 침묵한 우리의 위선과 가식에 대해 던지는 강력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최근의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서 보듯 우리는 가까운 길을 너무 멀리 돌고 있습니다. 그 사이 인권유린범은 한낱 취업사기범으로 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계속 묻는 것은 민족주의나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역시 베트남에서 짓밟은 야만적 행위에 대해서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프랑스 국영TV에서 ‘전쟁의 매춘부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독립전쟁, 미군의 베트남전쟁, 최근 평화유지군의 집단창녀촌에 대한 기록입니다. 거기에 식민지 알제리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프랑스군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이 폭로됩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조용합니다. 인권국가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에 대해 광분하면서도, 식민지 알제리에서 저지른 고문과 군위안소의 여성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습니다. 사르트르나 카뮈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프랑스의 지성들이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국영 방송의 이 전쟁범죄 다큐멘터리가 자기과오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전쟁범죄와 여성인권 파괴에 대해 프랑스의 양심적인 지성들과의 연대투쟁도 모색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미 10년 전 프랑스는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매춘’으로 규정하면서 일본정부의 해결방안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아울러 여러 소설 속에 자주 등장했으나 우리가 애써 침묵했고 일본보다 더 광범위하게 자행한 미군 ’위안부’의 지속적인 여성인권 파괴 문제도 이제 본격적으로 진실을 규명해야 합니다.

침묵도 진화합니다. 나의 침묵, 너의 침묵. 그것이 모여 우리의 침묵이 됩니다. 그것이 또한 모든 적폐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침묵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1948년 제주도 4.3항쟁의 영령들, 1950년 한국전쟁의 영령들, 1960년 4.19혁명의 영령들, 1980년 광주항쟁의 5.18영령들, 그리고 꽃피자마자 져버린 일본군 성노예의 영령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과 세계의 많은 평화의 소녀상들, 그 소녀들이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우리의 침묵과 방관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침묵은 범죄입니다. 침묵은 파시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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