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38)

1) 유럽연합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는 지역연합 체제입니다. 이 지역연합 내부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이상이 구현되었습니다. 세계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는 자본과 상품의 이동은 자유롭지만 아직 노동의 이동은 제약됩니다. 반면 유럽연합에서는 자본과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할 뿐만 아니라 노동까지도 자유롭게 이동합니다.

그렇다고 유럽연합이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통합된 국가는 아닙니다. 아직까지 국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국가의 권능 가운데 상당한 권능을 갖추었습니다. 의회가 있어 사회, 환경 등에 관련된 법도 결정하고, 중앙은행도 있어 화폐도 발행합니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각 국가의 재정정책도 제약받습니다. 화폐, 재정, 사회, 환경 등에서 통합국가로서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국가에 필수적인 단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한 국가라면 마땅히 잘 사는 곳에 세금을 더 많이 걷어 못 사는 지역을 지원하죠. 국가는 계급적 불평등과 아울러 지역적 불평등도 해소합니다. 그렇지만 유럽연합의 내부에서 부자인 독일과 프랑스는 가난한 그리스나 스페인을 위해 단 한 푼도 쓰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갈등과 대립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유럽연합은 이제 내부적으로 이런 갈등과 대립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위기 증상에 대응하여 영국에서 코빈이 등장한 것이고 그리스에서는 시리자가 등장했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단행했고 그리스는 그렉시트 목전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런 결정은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유럽연합은 장차 하나의 국가가 되어 지역적, 계급적인 불평등조차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리스의 선택이 옳은 것이겠죠. 아니면 유럽연합은 더 이상 지역적, 계급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와해되고 말까요? 그러면 영국이 앞장 선 나라가 되겠지요.

2) 아, 그리스여!

“그리스 현대사를 보면 특히 1945년 전후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와 이렇게도 닮았을까요.”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원천이었습니다. 동로마 천년 왕국 시절 정교(정통 기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오스만 터키의 침략 이후(15세기 말) 식민지가 되었지요. 1821년 그리스 정교 교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힘에 의존하지 못하고 유럽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결과 오히려 유럽 출신 왕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1831년 바바리아 왕자, 1863년에는 덴마크 왕자가 그리스 왕이 되었습니다.

1908년 군부 쿠데타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한 다음, 귀족세력이 지지하는 왕과 부르주아가 지지하는 수상이 서로 대립했습니다. 1940년 10월 무솔리니, 그리고 히틀러가 그리스를 침공한 후,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게릴라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전후 미국의 점령 하에서 공산주의자의 무장 저항(내전)이 벌어졌으나 실패로 돌아가 1949년 다시 입헌군주제가 부활했습니다. 공산주의의 반나치 투쟁과 전후의 득세, 점령 미군의 개입으로 내전의 발발, 패배 이후 독재 체제라는 패턴은 이상하게도 한국의 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1967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군부독재에 대항해 1973년 아테네 대학생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군부는 이를 유혈 진압했으나 위기를 느낀 군부가 1974년 터키와 시프러스 전쟁을 일으켰지요. 하지만 오히려 전쟁에서 그리스는 패배했고 그 여파로 시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1975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 이후 신민주당(자유주의 세력)과 범사회주의운동당(민주주의 세력)이 교대로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권력교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87년 이후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권력 교체와 유사합니다. 한마디로 그게 그거였습니다.

3) 유럽연합과 그리스

그리스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것은 1981년입니다. 유로화가 결제화폐로 사용된 것은 1999년부터인데, 그리스가 유로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입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할 때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했습니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은폐(월가가 부채담보증권을 발행해 재정적자를 은폐)하고 가입했습니다. 화폐 교환시 그리스 화폐가 고평가되었습니다.

화폐의 고평가는 재산을 가진 자에게 이익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불로소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상품의 가격도 고평가되었으니까요.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은 몰락했습니다. 그 이후 10년 만에 그리스는 경제적으로 위기에 빠졌습니다.

산업이 몰락하니 수입은 줄어드는데, 실업자는 느니까 정부의 지출은 증가했습니다. 노동자가 빚을 갚지 못하니 은행의 부채가 터졌죠. 설상가상으로 2008년 금융위기가 덮쳤습니다.

외국 자본을 들여 투기를 일삼았던 그리스 은행이 부실화되자 정부는 IMF, ECB(유럽중앙은행) 등으로부터 긴급 융자를 받아 은행을 살렸습니다. 은행 빚이 정부 빚으로 되었죠. 정부는 빚을 갚기 위해 대대적인 긴축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연금 삭감, 공무원 축소, 민영화, 정부 재산 매각 등 우리가 익히 겪었던 IMF 긴축정책이 그리스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4) 시리자의 저항

그리스 공산당은 나치 시대 레지스탕스의 주역이었고 내전에서 미군과 투쟁했습니다. 1967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공산당은 민주화 투쟁의 중심이었습니다. 1975년 민주화 이후 합법화되면서 사회당과 연정에 이르렀으나 1990년 사회주의 진영이 해체되면서 분열되었습니다.

공산당원 중 청년세대가 유럽의 자율운동을 받아들여 환경과 여성, 직접행동 등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공산주의자가 2001년 조직한 정당이 ‘좌파, 행동, 생태 연합’입니다. 이 정당은 시나스피스모스(Synaspismos), 그리스어로 ‘연합’으로 불립니다. 이름이 유럽의 자율운동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시나스피스모스의 기본 정책은 신자유주의 개혁 반대, 반테러법 반대이며, 이라크 전쟁과 코소보 전쟁 반대, 이주민 제한 반대입니다. 시나스피스모스는 2001년 제노아 국제 반신자유주의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처음 정책연합에서 출발하여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선거연합으로 발전했습니다.

2004년 그리스에서 아테네 여름철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빚 잔치였죠. 정부의 재정적자는 더욱 심각하게 되고, 긴축이 강화되자 국민의 불만이 높아갔습니다. 2004년 총선에 좌파 진보세력이 시나스피스모스(좌파 중+중도 좌)를 중심으로 선거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이때부터 명칭은 ‘시리자(급진 좌파연합)’로 변경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 공산당의 신좌파그룹과 트로츠키주의자(좌파 중+극좌)도 가담했습니다.

총선에서 시리자는 3.3%를 획득하여 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당선된 6명의 의원 전원은 시나스피스모스 당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시리자는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치프라스가 아테네 주지사로 당선되었고 2007년 9월 총선에서는 5%를 돌파했습니다. 이 승리의 덕분에 그리스 공산당(좌파 중, 중도 우), 민주사회주의자(좌파 중, 우)도 참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긴축반대’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좌파의 대동단결이 이루어졌습니다.

2008년 2월 당 대회에서 치프라스가 당수가 되었습니다. 2009년에는 4.6%를 얻어 13명의 의원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출구는 왼쪽에 있다”는 구호를 내세워 16%를 얻었습니다. 1당인 신민주당이 정부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진행된 2차 선거에서는 27%를 획득해 제1야당이 되었습니다.

4) 시리자의 배반

시리자는 2012년만해도 “채무 불이행(디폴트), 긴축각서 폐기”를 선명하게 내걸었습니다. 특히 시리자 중 극좌파는 불가피하면 “유로존 탈출(그렉시트)”을 공공연하게 주장했습니다. 이외 은행을 국유화하며 공기업의 재국유화를 주장했으며, 직접민주주의와 자치 강화, 평의회를 통한 작업장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2013년 7월 선거연합을 단일 정당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계기로, 시리나 내에서 시나스피스모스의 주도권이 강화되었습니다. 2014년 9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시리자는 마침내 26.52%로 제1당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권이 목전에 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당은 정책적으로 우경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은 이때 ‘테살로니카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그동안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주장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국가의 생산적인 재건”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채무불이행, 긴축각서 폐기”라는 주장이 사라지고, “재협상”이란 주장이 강조되었으며, “은행의 국유화, 공기업의 재국유화”라는 주장도 사라졌습니다. 대다수 당원은 이를 전술적인 후퇴로 간주했으나 2015년 이후 그것이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자가 정권을 획득한 것은 2015년입니다. 시리자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과반수에 2석 못 미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시리자는 그리스 독립당과 연정을 구성했습니다. 이어지는 협상과정에서 시리자는 유럽연합의 요구를 국민투표에 붙였습니다. 시리자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재협상했지만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습니다. 시리자를 대표하는 치프라스 총리는 결국 2016년 9월13일 유럽연합의 요구를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이 협상 결과는 비참한 내용이었습니다. 관광업 부가세를 증가했으며, 500억 유로에 해당되는 국유재산을 채권단의 감시 아래 매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시리자의 일부(안타르키아 연합- 트로츠키파, 신좌파 그룹)는 이에 반대하며 탈당하면서 유럽연합을 탈퇴하자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시리자는 비판에 부딪혔지만 이어지는 총선에서 다시 승리했습니다. 결국 그렉시트는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시리자의 승리는 역설적으로 유럽연합의 중심국 독일의 승리였습니다.

5) 결론

결론적으로 그리스는 그렉시트 이후 불안 때문에 감히 단행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려 할 때 두려움에 빠지는 거죠. 이 두려움이 그리스 대중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리스는 위대한 조상의 관광 자산과 에게해(海)를 끼고 발전된 해운업이 있으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닌 데도, 막상 당사자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빚만 내면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그 결과는 유럽연합이 약속한 그리스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융자를 갚기 위해 그리스는 국유재산의 많은 부분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럽연합에 더 많은 빚을 내기 위해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우울한 결론이군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길은 진정 없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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