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협, 유가협, 장기수 어른들과 함께

▲ 8월 25일 오후 1시 인사동 <천강에 비찬 달> 주점이 20주년을 맞아 민가협, 유가협,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감사의 자리를 마련했다.

<천강에 비친 달>(이하 천강)을 찾았다. 인사동에 있는 민속주점이다. “달이 뜨면 온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에 나오는 그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오늘 기자가 찾은 곳은 진보인사들이 문이 닳도록 들락거렸다는 인사동에 있는 술집이다.

골목 안을 돌아 입구에 들어서니, 학창 시절 데모하고 밤새도록 식탁이 부서져라 숟가락,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하던 추억이 생각났다. 벽에는 “고맙습니다. 모든 이들의 버팀목이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가운데, 나이 지긋한 분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통일광장 권낙기 선생님, 임방규 선생님, 민가협 조순덕 의장님, 유가협 장남수 의장님 등 낯익은 분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마침 최근 대북사업을 추진하다 국정원 조작에 의해 구속된 김호씨의 아버님 김권옥 선생도 와 계셨다.
 
주인 우성란(51세) 주인이 <천강> 20주년을 맞아 감사의 마음으로 민가협, 유가협, 장기수 어른들에게 오리백숙이라도 대접하겠다며 마련한 정겨운 자리였다.

우성란 주인은 2000년 장기수 선생님 송환되기 전에 모시고, 이제야 어른들 또 모시게 되었다면서, 이제부터는 격년에 한 번 여름에 꼭 모시겠다는 인사말을 하였다. 연초에는 전대협 동우회에서 모시니 여름날 중에 백중날을 고른 것인데, 노동자들이 쉬는 날이자 부모에게 효도하는 날이라고 한다.

권낙기 선생님이 천강 소회를 한 말씀하셨다. 제일 중요한 것이 ‘성란’이가 시집을 안 간 것이 문제라며 너스레를 떠셨다. 진보연대 빚 갚을 때, 통일 그림을 많이 팔아주면서 애를 썼단다. 권낙기 선생 부인 이옥순 열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매년 제사음식을 빠지지 않고 차려주었다는 대목에서는 와 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자는 처음 와 본 곳이지만 권낙기 선생 말씀만 살짝 들어도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인사들도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임수경 국회의원, 지금 청와대에 가 있는 임종석 비설실장, 이인영 국회의원, 오종렬 의장님, 한상렬 목사님, 문성근 배우 등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다. 아닌 게 아니라 벽에는 구호글씨가 잔뜩했다.

노래패 학생들이 ‘그날이 오면’, ‘어머니’ 노래를 불러 한창 흥이 올랐다. 이 때 느닷없이 우성란 사장이 이제 인사를 드려야 한다면서 넙쭉 큰 절을 올린다. 아까 해도 됐을텐데 격식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주인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천강>에서 유명한 ‘솔잎막걸리’ 한 잔 걸치고 있는데, 우리나라 이광석 가수가 노래에 가세하면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낮인데도 인사동 골목은 시련의 역사를 넘듯 폭염을 넘긴 어른들을 모시고 감사의 음식을 나누며 흥에 취해 있었다.

▲ <천강> 주인 우성란씨가 민가협, 유가협,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리고 있다.

기념촬영 후 우성란 주인에게 <천강 20년> 감회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았다.
주점 이름은 친구들에게 공모해서 지은 것이란다. 가장 재미있었던 일은 수배자들이 들락거릴 때였다고 한다. 

“수배자들이 자주 왔어요. 한 번은 수배자가 두 팀이나 온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다투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그런데 수배자들 잠이라도 재워야 하고, 저 사람들이 잡혀가면 안 되니 손님들을 빨리 내보내야 하는데, 안 나가는 거예요. 가래도 안 가고 오히려 더 많이 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다 국정원 직원들이었대요. 내 참. 그래서 매상 많이 올랐어요. 국정원들에게 감사패라도 줘야할까봐요.(웃음) 이번 20주년 행사 때 <천강>에 왔던 수배자들도 모시려고 하는데, 국정원도 부르려고(웃음)”

전남대 교환교수이자 광주명예시민이기도 했던 미국인 정치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도 단골손님이었단다. 그는 5.18 재단과 잠시 불화설도 있었지만, 광주문제에 대해 공이 많은 진보적 학자이다.

“글쎄 이 분이 누구 소개받고 왔는데, 말도 안 통하고 해서 답답했는데 나중에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오더라구요. 그 교수님들이 하는 말이 서울에 오면 여기밖에 안 온데요. 다른 좋은데 다 놔두고. 깨어있는 소리, 깨어있는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서 여기만 온다는 거예요. 나중에는 홍성담 화가의 ‘천강에 비친 달’ 그림을 가지고 미국전시회도 했어요.”

▲ <천강에 비친 달> 주점 주인 우성란씨가 행사 중에 밝게 웃고 있다.

앞으로 꿈이 뭐냐고 기자가 물었다.

“원래 이 주점을 차릴 때는 프랑스 혁명기에 쌀롱처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 꿈은 이루었어요. 오는 사람들이 한다하는 정치인, 재야활동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고, 누가 그러는데, 여기저기 테이블마다 무슨 신변잡기나 연예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전부 정치이야기만 한데요. 최고의 좌빨식당이 된 거죠. 앞으로 좀 더 기반을 쌓아 협동조합같은 것으로 전환해서 200, 300년 가는 지속가능한 식당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여기가 정계입문하기 전에 386 백수들의 아지트 역할을 한 것이 분명했다. 누구는 하루에 3번씩이나 왔단다. 

“한번은 강금실 장관을 다른 행사에서 만나 인사를 했는데, 그 분이 <천강>에 가면 다 국회의원 된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렇게 주인부터 먼저 보게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법무장관으로 가더라구요. 그 때는 끝발도 좋았는데 요즘 기운이 딸리네요.” 하면서 깔깔 웃는다.

▲ <천강에 비친 달> 주점 정문(왼쪽 위), <천강>이 자랑하는 솔잎막걸리(왼쪽 아래), <천강>내 걸개그림(오른쪽)

<천강>은 오는 11월 24일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실무책임을 맡은 우리나라 이광석 가수는 “함께했던 분들이 <천강>의 추억을 나누는 자리죠. 토크콘서트도 하고, 사연, 사진, 작품들 전시회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천강>과 더불어 변혁을 꿈꾸며 낭만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추억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남기고, 담쟁이 넝쿨에 쌓인 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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