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뉴스] 피폭 73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피폭 73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지난 4~9일 6일 간 열렸다. 대회는 두 피폭 도시에서 국제평화행진과 개회총회, 분과 토론회와 부문별 교류회, 평화공원 위령제와 마무리 집회 등으로 각각 진행되었다. (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손미희 공동대표와 류경완 운영위원장이 평화포럼의 초청을 받아 대회 전 일정에 참가한 이번 대회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돌아본다.

▲ 4일 오후 히로시마평화공원에서 ‘피폭 73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ㆍ히로시마대회 개회총회’가 열리는 히로시마체육관으로 종이학평화행진을 시작하는 한국, 미국, 독일, 벨라루시 등의 국제대표단.
▲ ‘피폭 73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ㆍ히로시마대회 개회총회’가 열린 히로시마체육관. 일본 전역의 평화ㆍ인권ㆍ환경단체 활동가들과 국제대표단 2,200여 명이 참가했다. 주 슬로건인 ‘핵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21세기로!’ 아래 탈원전과 에너지정책 전환, 아베정권의 헌법개악 반대와 비핵3원칙 법제화, 오키나와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 핵무기 폐기와 동북아 비핵지대화 등 다양한 슬로건이 제기되었다.
▲ 5일 평화와 핵군축, 헌법개악 반대, 탈원자력과 피폭자 문제 등을 주제로 한 8개 분과회가 열렸다. 1분과에서는 군사평론가 마에다 테쓰오가 ‘조선반도의 새로운 바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국 ‘우려하는 과학자동맹’ 그레고리 쿨락키, 오키나와평화운동센터 타카시 사무국차장과 코리아국제평화포럼 류경완 운영위원장 등이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저지 투쟁, ‘한반도 정세와 동북아 평화 실현의 과제’등을 주제로 각각 발제하고 토론을 벌였다.

 

▲ 헤노코에 건설 중인 거대한 미군기지 매립지에 대해 발표하는 타카시 사무국차장.
▲ 벨라루시에서 온 체르노빌 원전사고 피해자 쟌나 씨.
▲ 대회 사흘째인 6일 오전 히로시마평화공원에서 열린 원폭사망자위령식 및 평화기념식. 행사는 사망자 314,000여명의 명부 봉납과 개식사 및 헌화, 묵념ㆍ타종과 평화선언, 어린이 대표의 평화의 서약, 아베총리와 유엔사무총장의 기념사와 평화의 노래 합창 등으로 진행되었다.
▲ 히로시마대회 폐회식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발표하는 학생들.
▲ 7일 나가사키대회 개회총회.
▲ 1만인 평화 서명 활동을 보고하는 학생들.
▲ 나가사키대회 합창 공연.
▲ 나가사키대회에서 행진하는 국제참가단.
▲ 히로시마 폭심지.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 600미터에서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투하한 16kt의 원자탄 ‘리틀보이’가 폭발했다. 폭심지에서는 폭발 1초 후 직경 280미터의 화구가 형성되고 표면 온도는 5,000도에 이른다. 강한 열선이 방출되면서 반경 1.2km 내의 생명체는 대부분 즉사하고, 2km 내의 가연물은 모두 타버렸다. 동시에 초속 440미터의 폭풍압과 방사선이 동심원으로 퍼져나갔다. 이어서 검은 비에 섞인 죽음의 재가 지옥의 폐허 위에 떨어졌다.
▲ 피폭과 인류평화의 상징으로 세계유산에 등록된 원폭 돔. 도시 건물의 92%가 파괴된 인구 34만 명의 히로시마는 10만이 즉사하고 4만이 연말까지 지연된 죽음을 맞았다. 나가사키 역시 7만4천 명이 사망했고 7만5천 명이 부상했다. 방사능 피폭에 의한 추가 피해는 아직도 2세, 3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히로시마에 살던 조선인 10만 중 2만 명도 목숨을 잃었다.

애초 미국의 핵무기 개발 비밀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표였던 독일은 1945년 7월 핵실험 성공 이전에 항복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상륙작전에서의 미군 피해와 일본 본토의 1억 옥쇄작전에 대한 부담, 천황제 존속 등 전후처리 조건을 둘러싼 항복협상 지체,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 막대한 개발비가 투입된 원폭의 기술적 검증 유혹과 종전 후 동북아 패권 확장의 필요성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원폭 사용을 결행한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_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그 후과는 소련의 남진을 저지한 3.8선에서 전범국 일본이 아닌 조선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9일 아침 현지 상공의 기상악화로 원래 목표였던 코쿠라(현재의 키타큐슈) 대신 원폭을 맞아 1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가사키는 역사의 우연이 빚어낸 비극적 참화의 사례로 남게 된다.

그로부터 73년, 미중 수교와 소비에트의 붕괴, 북의 전략국가 등장과 미 일극 패권의 쇠퇴를 거치며 동북아는 조미정상회담에 이은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배태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종언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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