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규칙> 문정인-홍익표-김치관 대담집

여름휴가 기간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요즘 서점엔 휴가철 추천 도서로 20종이 넘게 나와있다. 자연스럽게 <평화의 규칙>이란 책에 손이 갔다. 아무래도 문정인 교수 이름 때문일 것이다. 이미 7월6일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를 마쳤으니 너무 늦게 손에 잡은 책일 수도 있다. 

통일뉴스 김치관 편집국장이 진행을 맡고 대통령 외교안보특보 문정인 교수와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개월 동안 진행한 대담을 엮은 이 책은 가장 최근의 상황을 담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담자들은 4.27판문점선언을 “세기의 기적, 한반도의 봄”이라고 불렀다. 문정인 교수는 “한 편의 초현실적인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며, 판문점선언 서명식을 지켜보던 북의 김여정 부부장이 “현실인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 소감을 소개한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4.27판문점선언의 감격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싶다면 그 배경부터 과정에 이르기까지 1장에 잘 나와 있다. 물론 부록엔 4.27 판문점선언문과 6.12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첨부돼 있다. 

한반도는 국제관계 패러다임 교체의 진원지

가장 인상깊었던 건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는 문 교수의 발언이다. 지금까지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국제관계 패러다임은 4세기 로마의 정치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Flavius Vegetius Renatus)가 남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금언이었는데, 이걸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문 교수의 대단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문 교수와 홍 의원은 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던 이 패러다임이 21세기 최후의 냉전대결 지역인 한반도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는 게 하나의 역설이라고 분석한다. 이것이 대담집이 말하고자 하는 제1의 평화의 규칙이고,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베게티우스의 명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전쟁을 준비하는 게 아니고 평화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평화의 규칙이고 한반도가 세계에 입증하고 있는 역사의 새로운 교훈입니다.”(본문 28쪽)

성역과 금기를 넘나드는 거침없는 비판과 통찰

대담자들은 한미동맹이 ‘신줏단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한미동맹이 미일동맹보다 약화된 것이 아니라, 역사상 단 한 번도 한미동맹이 미일동맹 위에 있었던 적은 없다고 갈파한다. 
이뿐이 아니다. 과거의 낡은 관념을 뛰어넘어 새롭게 살펴봐야 할 이슈들을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다룬다. 주한미군 문제, 북핵해법, CVID논쟁,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 북 붕괴론, 사드 배치, 대북 제재 등의 이슈에 대해 사고의 전환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담집이다. 

우리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 

2부 ‘우리는 지정학적 숙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란 제목도 도발적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전략과 한반도와의 관계에 대한 조망이 그림처럼 연상된다. 대담자들은 미국의 아시아중시정책(피봇투아시아), 아시아태평양 정책에 대응해 중국이 서쪽으로 향하는 일대일로정책(피봇투웨스트)을 구사한다면서, 러시아가 동방정책으로 동진하는 양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대담자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중국 천하질서 시대로부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2차 대전 후 미국 패권질서 안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 안의 세력균형론, 강대국 결정론에 매몰된 시각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강대국 질서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숨도 못 쉴만큼 강고하다기보다는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대처하면 앞날을 결정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해요.”(본문 109쪽) 

“우리 스스로 주도적으로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하면 한반도 숙명론은 허구에 불과합니다.”(본문110쪽) 

“너무도 오랫동안 인식에 뿌리박혔던 세력균형 결정론, 강대국 결정론에서 벗어나자.”(본문 303쪽) 

여기에 ‘동맹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며, ‘복종이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견해도 덧붙인다. 기자는 여기서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는 평화의 규칙을 실현하는 근본적인 방도가 “민족의 주도성”이라는 또 하나의 평화의 규칙임을 보았다. 

대북 협력도 새롭게 고민해야 

3부 ‘북한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는 북 사회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이뤄진다. 많은 이슈들이 다뤄지지만 남과 북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시사적인 전망도 함께 준다. 

“다만 하나 걱정스러운 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사라지고 북한과의 교류를 막는 장애가 다 제거된다면, 거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제 파트너로서의 독점적 지위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은 경제 협력 파트너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는 거죠.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될 수 있고 미국이나 유럽도 그렇죠. 방금 거론한 골드만삭스 같은 국제 투자은행들도 성장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투자를 당연히 고려할 것이고요. 우리가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과거와 같은 패턴, 즉 노동집약적이거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을 북한에 이주해서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한다는 식의 낡은 사고에 갇혀있다면, 도리어 북한이 우리를 효율적인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북한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우리도 경제의 큰 미래를 생각하고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무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합니다.”(본문 61쪽) 

행동하는 통일시민이 필요한 시기

4부 ‘미래를 향한 첫걸음’은 현 정부 통일외교안보 라인의 역할과 외교역량을 점검한다. 독자들이 알고 싶은 실속있는 정보에다 외교통일 역량에 대한 비판과 조언도 함께 준다. 

북미관계가 주춤하고,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리는 이 여름에 한반도가 주도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낙관과 함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교훈도 잊지말자고 속삭이는 저자들과 시원한 대화를 나눠보자. 
대담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이 이제는 한반도 평화의 길에서 “행동하는 통일시민”으로 만나자고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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