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35)

1) 니카라과

앞에서 쿠바 혁명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쿠바 혁명은 농촌의 게릴라전과 도시의 대중운동을 결합한 양면 전략이라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쿠바 혁명의 전략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나 멕시코의 사파티스타가 반복합니다.

산디니스타나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 시대 출현한 게릴라 운동입니다. 두 운동 모두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자율성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이는 서구의 자율운동과 같이 신자유주의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저항운동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측면이죠. 이를 통해 산디니스타와 사파티스타는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수립합니다.

먼저 산디니스타를 살펴보죠. 산디니스타는 혁명가 산디노를 기념하는 조직입니다. 산디노(1895~1934)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로부터 니카라과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혁명가였지요. 1934년 미국이 조종하는 군부독재세력 소모사와 투쟁하다 결국 희생되었습니다.

그 후 니카라과는 소모사와 그 일족이 미국의 배후 조종 아래 니카라과를 지배해 왔어요. 소모사는 무려 약 6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니카라과를 지배했습니다. 1961년 폰세카가 FLN(인민전선)을 창설하여, 소모사와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63년부터 산디노의 저항 전통을 계승한다면서 이름을 산디니스타로 바꾸었지요. 인민전선은 도시게릴라 전법에 기초했지만 1976년 지도자 폰세카가 암살되면서 밀림으로 후퇴합니다. 이들은 장기간 근거지 수립을 위해 노력합니다.

군부 독재자 소모사의 외자 의존 개발정책 덕분으로 도시에서 산업화가 진전되고 노동자가 증가하자 노동운동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산디니스타의 잔존 세력 일부가 다니엘 오르테가의 지도 아래 과감하게 도시 봉기를 택했습니다. 오르테가는 카스트로의 본을 받아 1977년 수도의 군 병영을 습격했습니다. 그런 다음 농촌의 밀림으로 되돌아갔지요. 

▲ 1979년 봉기 당시 화염병을 던지는 산디니스타 전사. 화염병의 펩시 상표가 눈길을 끈다.[사진 : 나무위키]

2) 혁명과 내전 그리고 민주적 승리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는 민주세력이 반독재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12인 위원회’가 이웃나라 코스타리카에 망명정부를 세웠죠. 산디니스타는 쿠바 혁명의 본을 따라 농촌에서의 게릴라전과 도시에서의 대중운동을 결합하였습니다. 산디니스타는 사회주의 세력이지만 12인 위원회가 주도하는 민주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1978년 1월10일 민주신문 <라프렌사> 편집장이 소모사의 명령으로 암살되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농촌에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산디니스타가 도시로 진격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1978년 8월 산디니스타의 도시 게릴라들이 1000명의 국회의원을 인질로 붙잡았습니다. 미국의 카터 정부가 소모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1979년 6월4일 총파업이 일어나고, 7월9일 민주정부를 수립되었습니다. 7월19일에는 산디니스타가 수도 마나과에 들어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혁명 이후 산디니스타는 인권을 개선하고(고문, 사형 폐지, 여성 평등, 민중 교육 등) 국유화,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산디니스타는 민주주의, 다원제, 보통선거를 유지했습니다.

3) 내전과 민주적 승리

산디니스타의 혁명은 쿠바 혁명을 본받았으니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어요. 산디니스타 혁명의 진면목은 그 이후에 드러납니다.

산디니스타는 급속한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주의 개혁모델에 따른 겁니다. 토지 개혁, 국유화 등입니다. 그런데 산디니스타는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 자체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혁명 이후 곧 니카라과에는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콘트라(반군)이죠.

내전이 왜 일어났는가 보죠. 토지개혁으로 농촌 지주와 원주민 추장이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CIA는 과거 소모사 방위군 잔존세력을 지원하였습니다. 여기에 급속한 국유화 이후, 혁명에 협력했던 민주세력이 반군에 가담하여 콘트라가 형성되었습니다.

산디니스타는 이에 대항하여 대중이 참여하는 지역 평의회, 산디니스타 방어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수입과 수출을 봉쇄하여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많은 대중이 이 때문에 정부를 원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내전에 지친 대중은 1990년 대선에서 콘트라를 대표하는 차모로(민주세력 12인 위원회 대표)를 지원했습니다. 오르테가는 권력에서 물러났으며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일어났지요.

차모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지요.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플레와 외채 위기의 망령이 되살아났어요. 이를 통해 거꾸로 사회주의적 개혁이 오히려 효과적임이 입증되고 산디니스타가 조직했던 지역 평의회 덕분에 노동자와 민중의 지지가 돌아왔습니다.

1996년에는 비록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였고 특히 수도 마나과를 장악했습니다. 2006년 마침내 오르테가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민주세력은 지리멸렬해졌으며, 2011년 선거에서도 산디니스타가 승리하면서 니카라과의 사회주의적 개혁은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 보듯이 산디노이즘은 투쟁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했어요. 한편으로 사회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켰습니다. 다양한 민중 직접 참여조직을 개발했어요. 내전이라는 가혹한 조건 아래서도 다원주의를 고집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정권을 상실했으나, 결국 민주 선거를 통해 산디니스타는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시간은 걸렸지만 산디니스타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모델을 확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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