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 참모총장 전속고문… 민간인 학살, 5.16쿠데타 배후 의혹

▲ 1950년 6월28일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은 5~800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기록한 참사였으나 폭파를 누가 지시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국의 대통령이 군 참모총장을 누구로 임명할지를 다른 나라 군의 대위에게 물어보는 나라가 있다면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국에서 실제 벌어지던 광경이다.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1918~1996)은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과 한국군 참모총장 고문,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 등의 직책으로 35년간 한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6년 한국에 부임해 전두환 정권이 12.12쿠데타 이후 5.18광주항쟁을 학살로 진압하고 독재를 본격화한 1981년 대령으로 퇴역해 한국을 떠났다.

사실상 참모총장 임명… 한국군 쥐락펴락

그는 대위 시절인 한국 근무 초기부터 미 군사고문단장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하우스만은 자신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1995. 정일화 번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모총장을 교체할 때마다 나에게 누구를 임명해야 되냐고 문의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하우스만은 실제 경무대(당시 대통령 관저)의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군내 동향을 보고했다. 또 한국 정부의 장관들만이 참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유일한 미국인이기도 했다.

참모총장 고문으로 일할 땐 한국군 참모총장과 같은 집무실을 쓰면서 국군의 작전과 행정 전반에 관여했다. 그는 “4.19혁명 당시에도 계엄사령관을 맡고 있던 송요찬 당시 육군 참모총장과 한방에 야전침대 2개를 놓고 자며 밤낮으로 대책을 논의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이런 사정들을 보면 하우스만이 적어도 한국에서 군 문제만큼은 어떤 한국인 장성이나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희생자 합동 추모제가 28일 오전 노들섬 둔치에서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유족회 주최로 열렸다.[사진 : 류경완 담쟁이기자]

한강 인도교 폭파 지시한 진범은?

1950년 6월28일 일어난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아직도 수많은 미스터리를 안고 있다. 38선 인근에 배치된 국군 전력의 불과 4분의 1만이 한강을 넘어 후퇴한 상황이었고 대부분의 군수물자와 장비도 한강 이북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피란 가려는 시민의 행렬을 제지하지도 않고 폭파를 감행했다. 한 미군 장교는 이 때문에 5~800명의 피난민이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1996년 10월7일 하우스만이 사망한 사실을 보고한 동아일보

그렇다면 누가 한강 인도교 폭파를 지시했나? 이승만 정권은 비난여론에 밀린 끝에 1950년 9월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사형했다. 그런데 최창식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해 1964년 10월 그는 무죄를 최종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대신 채병덕 당시 참모총장을 인도교 폭파의 책임자로 몰았다.

하우스만은 채병덕과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하던 전속 고문이었다. 게다가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전쟁 발발 수일 전 퇴역해 한국전 발발 직후엔 일본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고 라이트 군사고문단 부단장도 일본에 있었다. 한국에 남아있던 군사고문단 장교 중 최선임은 통신장교 스튜리스였지만 그는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초기 그가 미 군사고문단의 실질적 책임자였음은 하우스만 스스로도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 고문이었던 크로포드 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채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하우스만은 자기 회고록에서 “내가 지프차로 인도교를 건널 당시 교량폭파가 준비 중이었고 나는 차를 세운 뒤 한국군에게 절대 폭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자신도 폭파로 인해 사망할 뻔했다고까지 주장했으나 하우스만이 인도교를 건너자마자 폭파됐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혐의를 짙게 한다.

여순사건 당시 작전책임자

1948년 10월 일어난 이른바 ‘여순사건’은 진압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 10월27일 여수를 포위한 뒤 시내로 진입한 진압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어도 조금만 반란군으로 의심되거나 저항의 기색을 보이면 가차 없이 사살했다.

▲ 여수 진압 후 여수남국민학교에 끌려온 주민들. 주민들은 저 자리에서 선별되어 충살당했다.[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화보집 <가려진 역사 밝혀진 진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시민들에게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는 위협과 함께 학교 운동장 등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등 의심되는 사람은 모두 끌고 나와 재판 절차 없이 처형했다.

하우스만은 당시 진압을 위한 기동작전군사령부의 작전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은 자신이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압군 사령관의 고문이자 작전 책임자로서 이런 사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백보 양보해도 당시 상황을 방관 내지 묵인했다는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여순사건 이후 국군 내부에서 대대적인 숙군작업이 벌어졌다. 하우스만은 이 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숙군 상황을 취합해 매일 이승만을 독대해 보고했다. 당시 좌익으로 몰려 처형당한 장교 가운데 김종석 중위도 있었는데 그는 하우스만과 친밀한 관계였다.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이 아까운 청년 장교(김종석)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탄하고 그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한 뒤에 슬픈 마음으로 그의 처형 장면을 16mm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하우스만은 이런 좌익인사 처형 장면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교과서’로 활용했다. 자신이 그토록 안타까워했다는 젊은 장교의 처형 장면을 ‘슬픈 마음으로’ 동영상으로 찍은 뒤에 두고두고 교재로 활용했다는 그의 언행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5.16쿠데타 후원한 박정희 멘토

그는 숙군작업 당시 국군 내 좌익성향 인사 명단을 제공한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국군 내 ‘만주군 인맥’으로 불리는 백선엽, 정일권 등도 박정희의 구명에 나섰지만 하우스만의 건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우스만과 박정희의 인연은 목숨을 구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소장은 하우스만을 찾아가 지지를 부탁했다. 하우스만은 휴가를 내어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한 달 가까이 미 중앙정보국(CIA), 국방성, 국무성 고위관료들은 물론 합참의장, 육군 참모총장 등에게 한국 내 상황을 보고했다. 이 덕분인지 미국은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고 그 해 11월 케네디 대통령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면담도 성사된다.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서울 회현동 구 해군본부에 자리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 옥상 휴게실에서 종종 박정희와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다”거나 “박정희에게 장도영을 밀어내고 본인이 실권을 잡아라”, “혁명군(쿠데타군)이 차고 있는 흰색 완장은 떼는 것이 좋겠다” 등 적극적인 조언을 했다고 밝혔다. 이 정도면 단순한 5.16사태의 관찰자나 방조자가 아닌 든든한 후원자 내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앞에선 “김치 애호” 뒤에선 “잔인무도한 놈들”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한국 생활 중 자기 가족이 김치를 즐겨 먹었다거나 한국에 많은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마음속으론 한국인을 경멸했음을 알게 하는 일화가 있다.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마친 뒤 카메라가 꺼지자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놈들 보다 더 잔인무도한 놈들(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며 “이런 잔인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려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데 긍지를 느꼈다”고 발언했다.

하우스만은 그의 이런 역할 때문인지 아직도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창설 시기부터 국군의 역사 자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만큼 민간인 학살, 군사 쿠데타 등 국군이 가진 어두운 일면에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인물이다.

[참고문헌]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논문) 김득중, 2001, 여순사건 53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제임스 하우스만(정일화 역), 1995, 한국문원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2001, 일월서각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