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32/끝)

1. 세계질서의 균열과 변화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21세기 지구촌에 새로운 전략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역사적인 회담이었다. CNN, BBC 등 세계의 주류언론은 이 회담을 ‘북 비핵화와 CVID 색안경’으로 보도했다. 주류언론은 회담을 미국이라는 거대 고양이가 궁지에 몰린 생쥐를 다루듯 묘사했지만 실체는 반대다. 안하무인 군림하던 거구의 늙은 고양이가 새롭게 나타난 호랑이 새끼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타협 공존하려는 극적 전환이 이 세기적 회담의 본질이다. 북의 기류를 대변하는 조선신보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외교적 파급력이 큰 수뇌회담으로 기록될 것이다”, “조미수뇌들의 첫 회담은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한 이유이다. 

▲ 사진 : 뉴시스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북미관계의 기본 방향은 극한대결에서 대화로 선회했다. 또 이런 관계개선의 흐름이 북미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불가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엔 합리적 근거가 적지 않다. 허나 미국이란 제국주의 나라와 협상인 만큼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기대를 모았던 폼페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결과에 대한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7.7)를 보면, 앞으로도 합의이행 흐름에 도전하는 자잘한 역풍과 4.27판문점선언을 겨눈 외풍이 주요 계기마다 등장해 곡절을 겪으며 한발 한발 전진할 것으로 보인다. 

2. 세계 비핵화, 미룰 수 없는 인류의 화두

21세기는 결코 이성적 문명기가 아니다. 역사상 지구 최대국이었던 칭기즈칸의 몽고제국은 군사력으로 거대한 영토와 인구, 그리고 경제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와 오늘의 문명시대가 크게 다르다고 보는데 착각이다. 오늘날 러시아가 한국 규모의 경제력을 가지고도 전략국가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문화와 경제력이 아니라 핵무기 등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다. 21세기에도 현대적 군사력, 즉 세계의 핵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문제가 개별국가는 물론,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이다. 여전히 지구촌은 ‘군사력의 시대, 핵의 시대’이다.

북한(조선)은 미국의 수십 년 경제봉쇄와 핵위협 속에서 핵무력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비로소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전략국가 지위에 올라섰다. 기적적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류 과학기술 발전의 추세로 보면, 21세기 안에 결국 대부분 나라가 북처럼 핵무력을 가질 수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극소수 핵보유 기득권 국가들이 패권적으로 운영하는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가 지속된다면 약소국들의 핵개발 시도는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필연으로, 단지 시간문제임을 북이 먼저 보여준 것이다. 세계가 함께 비핵화로 나갈 수 있다는 신뢰가 없는 이상 개별국가의 욕구와 추세는 막을 수 없으며 더 많은 나라가 암암리에 핵개발에 나설 것이다. 세계 비핵화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21세기 안에, 그것도 반세기를 넘기기 전에 인류가 풀어야할 평화문제이자 생존의 최대 숙제이다.

핵무력 완성(원자탄, 수소탄, ICBM, SLBM 보유)에 성공한 나라는 유엔 안보리상임이사 5개국(미‧중‧러‧영‧프)이 있고, 북한(조선)이 추가됐다. 또 인도가 뒤를 따라가고 있다. 물론 핵능력과 핵 잠재력(일본, 독일, 이란)을 갖고 여차하면 본격 개발할 나라들도 줄지어있다. 북이 핵무력을 완성하자마자 한반도 비핵화와 세계 비핵화를 시도하는 과감한 길을 선택했지만, 사실 ‘선도적 세계 비핵화’ 정책은 기존 핵보유국과 인류의 당면 과제이다.

3. 새로운 전략국가 출현과 선도적 비핵화 전략

역사상 핵무력 ‘개발’ 국가가 중도에 외부 간섭과 압력으로 비핵화한 경우는 있지만, 핵무력 ‘완성’ 국가가 비핵화를 선도적으로 시도한 사례는 없었다. 리비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현재 협상 중인 이란 사례는 미국을 필두로 한 핵 기득권세력의 전쟁 협박과 외압에 의한 제거의 성격이 강하다. 만약 북의 새로운 핵정책이 성공한다면 핵무력 완성 국가가 세계 핵무력 해체시대를 처음으로 여는 게 된다.

2018년 4월20일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 결과는 세계 비핵화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할 만하다. 북은 핵무력 완성국가로서, 책임 있는 핵보유국 지위에서 핵 불사용과 핵기술 불이전을 선포하고 차후 주도적으로 세계 비핵화에 이바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중국처럼 핵 기득권클럽 편입전략을 택한 게 아니라, 출발부터 세계 핵클럽 밖에서 세계 핵 기득권 해체전략을 펴겠다는 새로운 원칙을 선언한 것이다. 바로 한반도에서부터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전인미답의 전략이다. 전원회의 내용을 확인해보자.

회의에서 채택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함에 대하여>란 결정서의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당의 병진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림계전 핵시험과 지하핵시험,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초대형 핵무기와 운반수단 개발을 위한 사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여 핵무기 병기화를 믿음직하게 실현하였다는 것을 엄숙히 천명한다.”

이어 “핵시험 중지는 세계적인 핵군축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며 우리 공화국은 핵시험의 전면 중지를 위한 국제적인 지향과 노력에 합세할 것”이라며 “우리 국가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당시 로동신문은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는 핵무기 없는 세계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려는 당의 평화애호적 입장이 엄숙히 천명됐다”고 했다.

상호군축은 냉전시기 미-소간에 전략무기 감축협상으로 시도된 적이 있으나, 부분적 상호 핵무력 감축이 목표였지 전면 비핵화는 아니었다. 전략국가의 비핵화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문제이다. 당연히 새로운 원칙과 창조적 공정이 필요하다. 가령 중국이나 영국이 선도적 비핵화를 한다면 다른 핵보유국과 주변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같다. 결국 북한(조선)이란 한 나라에서의 핵 제거 문제가 아니라 쌍무적 상호군축, 쌍무적 안전보장과 다자적 국제 안전보장 문제로 귀착된다. 우크라이나의 핵이전과 집단안전보장 사례는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무용지물임이 입증됐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어느 핵보유국도 먼저 비핵화에 나서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북의 핵문제가 아니라 모든 전략국가의 미래 핵문제이다. 가까운 미래, 아니 당면한 지구촌 핵권력 해체의 합리적 방법에 관한 원칙과 선례를 공동으로 만드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북의 장기적 세계 비핵화 전략과 북미가 합의할 수 있는 당면한 비핵화 수준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북의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비핵화는 세계의 완전한 대북 안전보장을 의미하는데, 북미를 포함해 상당규모의 상호군축과 법적, 제도적 장치의 완성이 수반된다. 적대적인 전략국가 사이의 정치, 군사, 외교에 걸친 총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10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반면 북미간 ‘합의할 수 있는 완전한 비핵화’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핵과 군사적 문제를 단계적, 과도적 조치로 풀면서 정치외교적 관계정상화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정치우선 해법이다. 그래서 6.12싱가포르 정상회담은 북 비핵화가 초점이 아니라, 전략국가인 북미가 상호 공존의 길을 선택하고 천명한 역사적인 정치합의인 셈이다. 

▲ 사진 :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4. 1석5조의 지략, 북의 준비된 비핵화전략

북이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다음 주도적으로 비핵화 전략을 추진하리라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필자 역시 북이 어렵게 달성한 핵무력 완성의 다음 단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법적 핵보유국 지위확보의 길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런데 북은 사실상 과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가지고 단계적 비핵화의 길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공인 핵보유국이 아니라 비공식 핵보유국 지위에서 비핵화를 결단하고, 기존 핵클럽에게 비핵화에 필요한 현실적 안전보장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북 비핵화의 정도는 북의 의향이 아니라 이미 미국과 다른 전략국가의 북 안전보장 수준 문제로 전화됐다.

북의 제7기 3차 전원회의 결정으로 시작된 북의 주도적 비핵화 전략으로 북을 둘러싼 국제관계도 하루아침에 전변했다. 1) 트럼프 행정부가 대결전략에서 상호공존의 협상전략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 북의 핵개발과정에서 발생했던 북중갈등이 완전히 해소되고 북중관계가 다시 사회주의 혈맹으로 전격적으로 복원됐다 3) 남북관계가 4.27판문점선언으로 사실상 종전을 선언하고 획기적인 평화, 번영, 통일의 관계로 전변됐다. 4) 북이 경제발전에 집중할 계기가 마련됐다 5) 동북아시아에서 오랜 냉전체제가 해체될 여건이 마련됐고 일본은 북미관계에서 완전히 소외돼 피동에 놓이게 됐다. 결정적으로는 북이 비핵화를 선언했음에도 전략국가의 지위와 영향력은 계속 유지하게 됐다.

5. 비핵화 전략이 낳은 북중관계의 거대한 변화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사실상 ‘사회주의 진영’의 의미는 사라졌다. 냉전해체 이후 미국 일극패권시대에서 각자 살길을 찾는 게 사회주의 나라들의 현실이었다. 여기서 과거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과 전통은 훼손됐다. 사회주의 대국이라 자처하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북중 혈맹도 과거사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1990년대부터 최근 2010년대까지 북중관계는 과거 모택동시대 혈맹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원했다. 1992년 한중수교와 최근까지 북의 핵개발 문제를 두고 북중 사이엔 심각한 견해차가 노정됐다. 북미관계와 북중관계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얽혀있는데, 미국의 대북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중국이 이해관계 탓에 사실상 용인한 게 북중관계가 어긋난 근본원인이다. 중국의 과거 핵개발 모델을 북도 뒤따른 건데 자기네가 할 땐 좋고 북은 바쁘다는 논리는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 이후 북의 주동적 조치로 오랜 북중갈등은 완전 해소됐다. 이를 명분과 계기로 중국은 새로 등장한 사회주의 전략국가 북한(조선)을 미국보다 먼저 인정했다. 이제 대북관계에서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외려 미국보다 한발 앞서 나가고 있다. 북의 입장에서 보면 북미관계에서 승리인 동시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 역사적인 북중관계의 복원이자 진척인 셈이다. 7.6북미고위급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대북 압력설’을 거론한 데서 보듯 미국은 당황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불과 석 달 사이에 무려 세 차례나 진행된 극적인 북중정상회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앞으로 북중관계는 과거 모택동시대 이상으로 발전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소련해체로 사라졌던 사회주의 전략국가끼리의 협동과 국제공조 시대가 다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분열되고 미국과 일본이 갈등하는 국면에서, 중국이 과거를 털고 새 전략국가로 성장한 북을 먼저 인정하며 ‘제재로부터 사회주의 전략국가간 긴밀한 협동과 공조’로 방향을 튼 결과다.

이는 중국 대북전략의 대반전이다. 중국이 차후 대북문제에서 미국의 이이제이 추종노선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북과 협상중인 미국에겐 커다란 손실이며, 현실적인 대북 압박수단을 하나 잃게 됨을 뜻한다. 또 당면한 한반도 평화협상 문제, 특히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서 북중공조가 긴밀히 이뤄질 것을 예고한다. 더불어 차후 중‧러가 추진하는 세계 다극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북의 위상과 역할이 더 높아지리란 걸 의미한다. 북중정상회담에 관한 언론보도로 확인해보자.

시진핑 총서기는 2차 북중정상회담에서 “현재 조선반도 정세가 심각하고 복잡하게 진화하는 관건적인 시각에 40여일 만에 다시 방중해 회담한 것은 (김정은)위원장 동지와 조선 당중앙이 중조 양당과 양국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음을 체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3차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답례연설에서 “오늘 조중이 한집안 식구처럼 고락을 같이하며 진심으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모습은 조중 두 당, 두 나라 관계가 전통적인 관계를 초월하여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내외에 뚜렷이 과시하고 있다”면서 “습근평 동지와 맺은 인연과 정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고 조중 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부단히 승화 발전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는 역사적인 여정에서 중국 동지들과 한 참모부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협동할 것이며 진정한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북중간 전격적인 관계개선 흐름도 현재 진행되는 북미관계와 6.12북미합의를 불가역적으로 만드는 강한 추동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 사진 :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6. 복잡한 여건 속 북미관계의 대전환

북미가 6.12싱가포르 공동성명에 이르게 된 감출 수 없는 배경은 바로 북의 핵무력 완성이다. 이는 미국의 대북 핵개발 저지정책의 실패이자 미국이 주도하는 NPT 체제의 위기를 의미한다. 더불어 미국 정치의 이단아인 트럼프의 선택으로 협상에 의한 북미대타결이 현실화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내리막길에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등장은 미국 주류정치권과 네오콘의 패배를 뜻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미국의 정쟁은 대선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트럼프 정부는 출발부터 불안한 정부였다. 트럼프는 지금도 연일 주류정치를 대변하는 CNN, NYT 등 언론들과 싸우고 있다.

북미공동성명을 둘러싼 미국 내 공방에서 잘 드러나듯 새로운 대북정책을 수행하는 트럼프 정부에는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새 대북정책에 반대하는 군산복합체와 주류정치 기득권세력이 대북정책에 대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주류정치세력 역시 트럼프 이상으로 북의 비핵화 전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이들이 트럼프의 대북정책에 반대하는 건 정책적 차원이 아니라 정략적 이유가 더 크다. 트럼프의 외교 공적 쌓기를 처음부터 막으려는 것이다. 중간선거와 트럼프의 재선을 막아 트럼프 시대를 조기 종료시키는 것이 이들 주류세력의 당면 목표이다. 어쩔 수없이 북미관계를 개선한다 해도 차기에 민주당이나 공화당 주류의 주도 아래 진행하려는 게 이들의 의도이다. 그래서 설사 트럼프가 대북협상에 실패한다 해도 북미관계 개선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는 건 아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며 곡절을 겪겠지만 결국 차기 행정부도 트럼프의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만약 트럼프가 대북협상에 실패해 역사적인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이 중단되면 재선 도전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와 미국은 다시 전례 없는 핵전쟁 위기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트럼프는 이미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트럼프의 선택이 자신과 김정은 위원장의 관계를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만들었다. 협상이 깨지면 배가 엎어지고 결국 트럼프는 물에 빠진다.

북미협상의 본질이 새 사회주의 전략국가 북한(조선)의 등장을 봉쇄하는 게 아니라 북을 인정하고 공존하기 위한 협상이란 점을 앞서 설명했다. 즉 북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상태의 협상이다. CVID는 미국의 가능한 목표도 선택 권한도 아니다. 협상전술일 뿐이며, 핵 검증은 북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협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정부가 내부 정쟁에 밀려 명분용 여론조성 차원을 넘어 실제 일방적인 북핵 제거를 관철하려는 순간, 협상의 전제는 깨지며 배는 엎어진다. 북의 핵무력 완성 능력을 얕은 협상술로 제거하려는 기도는 신뢰를 훼손하고 협상을 파탄으로 몰아갈 뿐이다. 북은 불안한 입지에도 협상을 결단한 트럼프를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한반 한발 나아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6.12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지난 2000년 북미공동코뮤니케에 견주면 추상적이다. 6.12공동성명의 기본 내용이 합리적이고 포괄적임에도 추상적인 이유는 트럼프 정부의 취약한 정치환경 때문이다. 합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외려 합의수준은 높고 그를 실행할 의지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관계정상화, 평화체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북미 쌍방의 미래 의무를 명시한 성명 내용은 한국, 동북아, 미국 모두에게 전면적이고 파격적이라 세세하게 열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큰 그림과 방향을 합의하고 신뢰를 형성하며 단계적으로 실현하면서 여기에 유리한 정치환경을 만들어가는 게 북과 미국 모두에게 유리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지금 얘기할 것과 나중에 얘기할 수 있는 것, 앞에 놓아야 할 것과 뒤에 다뤄야 할 것을 잘 구분하고 배열하지 않으면 협상은 역풍으로 좌초할 가능성이 있다. 바둑에 비유하면 ‘수순의 묘’가 대단히 중요한 협상이다. 포괄적 선언 이후 가능한 것을 앞에 놓고 어렵고 힘든 과제는 뒤에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당장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아무리 난제라도 풀어낼 실마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7. 4.27시대, 분단에서 평화통일로

북과 미국의 평화공존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6.12공동성명에는 미국의 대북정책과 대한반도정책이 함께 담겨 있다. 즉 북한(조선)만 떼어놓은 북미 평화공존이 아니라 남북 적대관계도 청산한 미국의 대한반도 미래 정책을 포함하고 있다. 크게 보면 미래 북미간 평화공존의 방향은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비동맹 중립화, 한반도 통일로 귀결되리라고 본다. 그것이 미국이 동북아에서 그나마 영향력을 유지할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후 예상되는 4자(남북미중) 코리아 평화협정을 통해 모든 외국군 철수는 불가피하다. 또 북미, 남북의 교류협력이 강화되고 관계정상화 과정에 평화가 조성되면 외국군이 있어야할 이유도 없다. 외국군(주한미군)이 나가면 한반도는 중립적 평화지대가 될 기회가 열린다. 미국이 후퇴하는 통일 코리아가 미국과 대립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코리아 중립화는 미국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한다. 미국은 통일 코리아가 중국에 급격히 기우는 것을 우려한다.

세상에는 대세라는 게 있다. 모순이 깊어져 그 해결을 위한 노력과 염원이 모이고 커지면, 어느 순간 거대한 기운으로 낡은 질서와 관성을 허무는 양질전환이 이뤄진다. 코리아 반도의 대세는 자주, 민주, 평화통일로 이미 기울었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자리를 위해 노력해주신 트럼프 대통령께 사의를 표합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한 말이다. 의례적인 사의 표명이 아닌 새 시대의 획을 긋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한국 보수도 분단해체라는 대세를 직시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나갈 수밖에 없는 외세이다. 한국 보수가 북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무지가 결합돼 부정적 흐름에 편승하다보면 일본 아베 정부 꼴을 면할 수 없다. 단기적인 당리당략만을 좇아 아베 정부를 흉내 내고 따라가면 결국 다다를 곳은 낭떠러지다.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성큼 다가온 것은 다음 세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며 우리 세대도 과업을 이뤄냈다 자부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한국 진보에게는 새롭게 조성되는 유리한 국면에 자기혁신을 서둘러 대중성을 확보하고 역사적인 4.27시대를 자주통일과 장차 진보집권으로 완수해야할 무거운 과제가 놓여있다.

그동안 <여명의 눈동자>를 애독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독자 여러분께서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셨습니다. 글을 쓰는 2년여 동안 촛불항쟁으로 정권이 교체됐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4,27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 동트는 여명이 지나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저는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며 새로운 주제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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