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5.16쿠데타와 기무사 ‘쿠데타 음모’의 공통점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중에 계엄령 선포와 내란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나자 인도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신속수사를 특별지시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이 군사계획엔 ▲서울 시내에 탱크 200대와 장갑차 500대, 무장병력 4800명과 특전사 1400명을 투입할 것 ▲전국에 육군으로만 편성된 기갑여단, 공수특전여단, 기계화보병사단을 배치해 지자체를 장악할 것 ▲비상계엄 선포 2개월 내 국회를 장악할 것 등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이 명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프랑스어: coup d'état)란 무력(武力)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빼앗는 일을 뜻한다. 주로 선거 등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세력이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찬탈하는 행위를 통칭해 쿠데타라 부른다. 

▲ 5.16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상단 외쪽), 덜레스 CIA국장(상단 외쪽 두 번째), 박정희 소장(하단 왼쪽), 5.18당시 글라이스틴 주한미 대사(상단 오른쪽 두 번째), 워컴 주한미군 사령관(상단 오른쪽), 전두환 소장(하단 오른쪽).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쿠데타는 모두 3차례 감행됐다. 5.16 박정희 쿠데타와 12.12 전두환 쿠데타는 교과서에 언급돼 잘 알려졌지만 해방 직후 미군정 아래 실시된 1948년 5.10단독선거와 정부수립 과정에서 계엄령이 선포돼 제주 4.3학살과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여운형과 김구 선생이 암살돼 국민의 안중에도 없던 친미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 쿠데타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 한다. 

4.19혁명을 뒤집은 5.16 박정희 쿠데타

친일파를 등용해 미국에 사대굴종하며 분단을 획책한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19혁명으로 쫓겨났다.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는 미군정 시기 등용된 친일파와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친미세력들이 더 이상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없게 되자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육사 출신 정치장교 250여 명이 하사관과 병사 3,500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도하, 청와대와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한 사건이다. 

박정희는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당시 군작전지휘권을 가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같은 계획을 사전에 승인 받았음은 물론이다. 

▲ 미 국부무가 발간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의 미국의 대외관계’ 문서에 따르면 델레스 당시 CIA국장은 1961년 4월21일부터 26일까지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모의 중’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모두 8차례에 걸쳐 작성했으며 일자별 주요 내용을 요약,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자료 SECRET OF KOREA]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1961년 5.16쿠데타 발발 약 한 달 전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 중’이라는 계획을 모두 8차례에 걸쳐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64년 5월3일 BBC 인터뷰에서,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 군사 정변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친미 이승만 대통령을 물리적 폭력시위로 강제로 내쫓은 4.19 혁명을 반미혁명으로 판단해, 조속히 친미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발발한 반미 쿠바혁명 때문에, 쿠바혁명을 모방한 반미혁명이 전세계로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크게 우려했으며, 4.19 혁명도 이러한 제2의 제3의 쿠바혁명으로 판단, 시간이 더 지나서 혁명이 공고해져 쿠바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서둘러 친미혁명을 일으켜 반미정부를 전복시켜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위키백과 - 5·16 군사정변> https://ko.wikipedia.org/wiki/5%C2%B716_%EA%B5%B0%EC%82%AC_%EC%A0%95%EB%B3%80

‘서울의 봄’을 짓밟은 12.12 전두환 쿠데타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당시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논의를 시작하고, 긴급조치에 의해 처벌받은 재야 인사들을 복권했다. 친일분단 군사독재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12·12 쿠데타로 등장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24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국보위 설치 등의 조처를 내리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하는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찬탈한 1979년 12.12 쿠데타 발생 직후, 미국은 ‘한국상황보고’라는 비밀전문 4건을 작성했다. 이 전문은 한국시각 13일 새벽2시까지의 상황이며 ‘초기단계의 쿠데타가 서울에서 진행 중’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 군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킨 그 시각 용산의 유엔사령부 벙커에서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워컴 주한미군사령관은 군부의 쿠데타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 받았으며, 새벽까지 군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적고 있다.

▲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12.12쿠데타 주동자로 채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사진 : 나무위키]

쿠데타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마의 범행에 일정한 패턴이 드러나듯 우리 현대사 속의 쿠데타도 마찬가지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친미로 위장한 친일파라는 사실은 1948년 첫 쿠데타 때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 

다음으로 매번 여운형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 이석기 전 의원처럼 있지도 않은 빨갱이 간첩을 등장시켜 국민여론을 호도해 자신의 만행을 가리는 분단독재 행태를 보인다. 

무엇보다 8.15광복, 4.19혁명, 서울의 봄, 촛불혁명 등 친일사대 분단독재 세력에게서 국민 자신이 권력을 되찾아 올 때마다 미국의 지휘권 아래 있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기무사가 기획한 이번 쿠데타 음모도 한치의 예외가 없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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