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후견국’ 낱말 뜻도 모르고 쓰는 언론
불과 석 달 사이에 세 차례나 정상회담을 갖는 등 북한(조선)과 중국의 각별해진 관계에 언론이 관심을 갖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어이없는 건 최근 부쩍 ‘후견국’, ‘후원국’이란 수사(레토릭)를 많이 쓴다는 점이다.
사전을 보니 ‘후견(後見)’이란 역량이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뒤를 돌보아 주는 것을 가리키며, ‘후원(後援)’ 역시 뒤에서 도와준다는 뜻이다. 중국이 북한(조선)을 도와주거나 뒷배를 봐준다고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석 달 동안에 정상회담을 무려 세 차례나 갖는 관계를 여느 나라들끼리의 사이라고 할 순 없다. 그 만큼 긴밀하고 두텁다고 볼 만하다. 북중관계가 전통적인 ‘혈맹’관계로 복원됐다는 분석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돕는 관계라고 보는 건 지나친 속단이자 단견이다.
역량이 부족한 북한(조선)을 중국이 돕는다? 왜, 어떤 근거로 ‘후견’, ‘후원’이란 표현을 쓰는지, 또 북에 어떤 역량이 부족하다고 보는 건지 언론은 전혀 해명이 없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돈독해졌으니 작은 나라가 고개를 숙이며 도와달라고 했으리라는 상식의 잣대로 지레 짐작한 걸까? 아니면 큰 나라 미국과 작은 나라 한국 사이의 예속적인 갑을동맹에 길들여진 시선 탓일까?
북중관계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이런 속단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지한 행태인지는 금방 확인된다.
불과 1년여 전인 지난해 5월3일 북의 조선중앙통신은 ‘김철’이란 개인명의의 논평 <조중관계의 기둥을 찍어버리는 무모한 언행을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조중관계의 ’붉은 선‘을 우리가 넘어선 것이 아니라 중국이 난폭하게 짓밟으며 서슴없이 넘어서고 있다”고 강력 비판해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당시 북의 잇단 핵시험 등을 빌미로 미국이 유엔 대북 제재를 강화한 데 중국이 동조하자 불편한 속내를 터뜨린 것이다. 그동안 ’일부 대국‘ 등 간접화법으로 수위를 조절하던 데서 벗어나 중국을 정면 겨냥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논평의 내용도 사뭇 심각했다. “우리 두 나라 사이의 ‘붉은 선’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의 존엄과 이익,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핵은 존엄과 힘의 절대적 상징이며 최고 이익이다.” “조중 친선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목숨과 같은 핵과 맞바꾸면서까지 구걸할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미국의 힘에 눌리워(중략) 수십 년간 이어온 형제의 우정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린다면 결국에는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사방에서 화가 들이닥칠 수 있다.” “중국은 조중관계의 기둥을 찍어버리는 오늘의 무모한 망동이 가져올 엄중한 후과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북이 이른바 ‘자주권’을 그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조중관계’가 중요하다고 해도 구걸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북중관계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후견, 후원하는 관계였던 적이 없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이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중국이 북의 후견국이 됐다? 소설은 작가가 쓰는 거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후견국(가)’이란 낱말의 개념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레토릭으로 쓰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면, 후견국(가)이란 ‘국제적인 조약이나 협약에 의하여 다른 나라들이 돌보아주도록 되어 있는 나라’를 가리킨다. 도와주는 나라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 나라를 일컫는 것이다.
사전대로라면 언론의 “중국이 북한(조선)의 ‘후견국’임을 과시했다”는 표현은 중국이 북의 도움을 받는 나라임을 과시했단 얘기가 된다. 독자들의 글살이에 책임이 적잖은 언론이다. 어이없는 소리인 건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