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새로운 아시아 질서의 시작

‘새로운 북미관계’의 함의

세기의 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개항의 공동선언 합의는 그야말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일괄타결의 의미를 갖는다. 70년을 쌓아온 적대관계, 지구촌의 마지막 냉전질서가 드디어 해체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표현된 문구만 보고 과거 제네바 합의(1994년)나 북미 공동커뮤니케(2000년) 보다 진전된 내용이 없다고 하나 항시 문제는 이를 강제할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이번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양대 핵보유국 간의 합의라는 점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나 서명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합의들과 질을 달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성명은 근본적이자 불가역적 합의로 이후 전개될 모든 북미관계 전환의 바탕이 될 것이다.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의의는 오랜 기간 긴장과 적대의 북미관계를 대화와 화해의 관계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한반도를 지배해온 냉전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사변이다. 이 점을 로동신문은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적대적인 조미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조선반도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도록”하기 위한 정상회담이라고 보도하였다. 공동성명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3가지 원칙적 합의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노력을 천명하였다.

우선 주목할 점은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이라는 과거에는 없던 표현이다. 이는 북미간 관계정상화, 즉 수교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양국 수교만을 의미한다면 굳이 “새로운 북미관계”란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동성명은 양국이 “새로운 북미관계 발전과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번영, 안전을 추동하기 위하여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양국이 수교와 더불어 세계의 평화, 번영, 안전을 위한 국제문제 공동 대처 또는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에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의미다. 일본은 물론 중국, 러시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은 그야말로 아시아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 양국이 협력한다는 대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CVID는 처음부터 없었다

국내외 수구보수성향의 언론과 전문가는 물론 일부 진보적 전문가조차 공동선언에 북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란 의미의 이른바 CVID가 들어 있지 않아 사실상 미국이 패한 회담이었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북핵 폐기에 관한 확실한 담보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CVID란 문자 그대로 북의 모든 핵무기, 핵시설, 핵원료, 핵 개발 인력까지 언제, 어느 곳이든 미국이 원하는 대로 검증하여 다시는 핵을 갖지 못하도록 폐기, 반출한다는 의미다. 누가 보더라도 패전국에나 적용될 강제적 방식이다. 이렇듯 CVID는 북의 굴복을 전제로 한 것이자, 북이 절대 수용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고집한 적대관계 지속용 명분이었다. 이것이 담기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언론과 이른바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을 북이 굴복해 열린 일종의 항복회담으로 보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북미관계에 훼방을 놓으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의 귀국 후 첫 일성이 “더 이상 북한(조선)으로부터 핵 위협은 없다.” “오늘 밤은 푹 자길!”인데서 알 수 있듯 핵보유국끼리 상호 핵 공격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대화와 담판의 성격을 갖는다. 국내 수구세력들이야 알 리 없겠지만, 미국 지배층이 북의 핵공격 위협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진 바다. 여기에 북이 화성14형, 화성15형으로 미 본토 타격능력을 보여주자 미국은 더 이상 ‘최대 압박’을 운운하며 시간을 끌 수 없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밝힌 대로 미국이 먼저 정상회담을 제안했던 것이다. 몸을 낮춘 쪽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싱가포르 공동성명이다. 

사실 핵개발국과 핵보유국 사이의 대화와 핵강국(전략국가)끼리의 대화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핵합의를 파기하고 재협상 조건으로 말도 안 되는 12가지 요구를 내건 거나, 과거 부시 정권이 북과 체결한 제네바 합의, 북미 공동커뮤니케, 9.19공동성명 등을 파기하고 CVID를 내건 것은 본질상 같다. 상대가 모두 핵개발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핵개발 단계에 있는 국가와는 대등한 협상을 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대화하고 합의도 하지만, 또 언제든지 필요하면 파기해 버린다. 지난달 김계관 외상이 볼튼 등 대북 적대세력의 리비아 방식과 CVID 주장에 “우리의 핵이 아직 개발단계에 있을 때 이전 행정부들이 써먹던 케케묵은 대조선 정책”이라고 강하게 반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누가 보더라도 대등한 협상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어쩔 수 없이 북한(조선)을 핵개발국이 아닌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CVID는 북미정상회담에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만약 미국이 CVID를 고집했다면 정상회담은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부가 대외적으로 이를 계속 내세우는 건 오랜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의 원칙이었고, 또 이를 거둬들이는 순간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또 담판에서도 패배했다는 반대여론에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 정부가 이후 협상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트럼프 정부는 북과 ‘핵보유국간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해 협상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CVID를 관철했다는 언론플레이로 체면을 지켜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북의 최대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북미간 높은 신뢰를 쌓아가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미군철수로 이어진다

‘핵보유국간의 상호주의 원칙’이란 상호간의 핵공격 위협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가는 협상 원칙이다. 로동신문이 보도한 ‘북미정상 “단계별, 동시행동원칙” 합의’는 이의 다른 표현이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바로 이런 원칙 아래서 봐야 한다. 이는 미국에 대한 북의 핵공격 위협을 제거해 가는 동시에 미국의 북에 대한 핵공격 위협도 제거해 간다는 의미다. 비핵화 과정인 동시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정이기도 하다. 양자는 구별되면서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북의 비핵화가 그에 상응한 미국의 핵공격 위협의 제거라고 할 때 그 지리적 범위는 한반도를 뛰어 넘는다. 주한미군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괌, 미 본토에서도 북에 대한 핵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북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일본이나 괌, 미 본토의 비핵화를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면 북의 입장에서도 남의 비핵화, 즉 주한미군 관련 비핵화와 미국이 종이에 써준 각서만 믿고 자기네 모든 핵과 미사일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비아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가다피 정권은 미국과 수교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말만 믿고 핵을 폐기했다가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CVID를 관철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와 관련해선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 발언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북의 비핵화에 대해 ▲미사일 엔진시험장과 발사대 파괴 ▲20%의 비핵화만 완료되더라도 불가역적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그에 상응한 미국의 조치에 대해 ▲협상기간 중 한미연합훈련 중단 ▲주한미군 철수,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검증에 대해 ‘완전한 비핵화’를 검증하되 그 방식은 “미국이 하는 것과 북한(조선)이 하는 것의 조합”이라는 ‘상호 검증’을 제시했다. 이것은 트럼프 정부가 바라보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핵심적 인식을 드러낸다. 또 CVID의 핵심인 검증과 불가역적 비핵화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대응입장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20% 비핵화 완료에 의한 불가역적 지점’ 발언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그냥 다 핵무기를 없애자는 식이 아니라 임계점에 도달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조치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초기 핵심적 비핵화 조치가 이뤄지면 불가역적 비핵화가 된 것으로 본다는 이른바 ‘핵심적 핵능력 제거(front-loading)’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폼페오 장관이 북미정상회담의 목표로 여러 차례 밝힌 ‘북의 미 본토 타격능력의 제거’ 목표에 부응하는 북의 비핵화 조치를 불가역적 비핵화 조치로 본다는 것이다. 즉 북의 핵시험장 폐쇄, 미사일 엔진 시험장과 발사대 폐쇄, 그리고 일부 언론이 보도한 ICBM 관련 핵과 미사일 폐기 등이다. 

아울러 검증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인원이 투입될 것”이라고 확언하면서도 미국과 북한(조선)이 북과 남을 검증하는 ‘상호 검증’을 제시했다. 이런 발언은 ‘상호주의’ 원칙에서 당연한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북한(조선)은 검증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주한미군 기지와 시설에 대해 북의 검증을 용인하는 것은 패권국인 미국이 타국에게 검증을 받는 첫 사례로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아마 북과 미국은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등 평화체제 구축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미군철수 시사 발언은 북의 ‘핵심적 핵능력 제거’라는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미국의 비핵화 조치의 일환이다. 한미연합훈련은 핵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통한 대북 핵공격 위협이고, 주한미군은 자체에 방대한 핵공격 능력을 보유한 시설과 장비, 병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렇듯 북의 ‘핵심적 핵능력 제거’와 미군철수로 1차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아시아 질서의 시작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별개로 이루어질지 아니면 거의 동시에 이뤄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종전선언만 발표돼도 한반도 질서는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에 유엔군 참전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의 종료 결의를 유엔안보리에 제기할 것이다. 미국을 포함해 현재의 유엔안보리는 여기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안보리 결의 83호’의 종료가 결의되면 한반도에 있는 유엔사와 유엔군은 해체와 철수가 불가피하다. 물론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유엔군과 별도로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둔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북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유엔이 종료를 선언한 이상 계속 주둔할 명분은 없다. 남은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폼페오 장관이 2년 반의 시한을 제기한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북)의 ‘주요 비핵화’를 앞으로 2년 반 내에 달성할 수 있다는데 희망적(hopeful)”이라고 밝혔다. 정치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도전과 관련되지만 또한 주한미군 철수로 대표되는 미국의 한국 내 비핵화 조치의 시한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CNN은 “트럼프가 보다 적은 수의 미군이 있는 아시아를 그리고 있다”고 보도하고, 워싱턴포스트는 “북미정상회담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정학적 질서를 예고한다(Trump-Kim summit portends a new geopolitical order in Asia)”고 보도했다. 가까운 미래에 한반도는 공동성명이 제시한 대로 평화와 번영, 그리고 안전이 담보되는 새로운 체제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아시아 질서를 만드는 주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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