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유럽한민족연대 이종현, 윤운섭 선생을 만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만들어진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파독(독일파견)광부, 간호사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에 광부로 나갔지만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한생을 바친 이종현(82. 재유럽한민족연대 상임고문), 윤운섭(70. 재유럽한민족연대 총무) 선생의 이야기이다. 

두 분 선생이 지난 8일 오후 현장언론 민플러스 사무실에 직접 왔다. 함께 온 우즐라 리 여사(이종현 선생 부인)는 독일인이었고, 명은희 여사(윤운섭 선생 부인)은 한국인이었다. 

이종현 선생은 지난 2016년 5월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 참석차 입국하려다 박근혜 정부에게 입국 불허를 당해 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촛불항쟁 덕으로 정권이 바뀐 뒤론 입국이 가능해져 왕성한 국내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선생은 흰머리 흰 수염에 온통 흰색이었다. 윤 선생은 피부가 원래 짙어서인지 아직도 광산 노동자 티가 나는 듯했다. 오전에 일본 우리학교 문제로 청와대 기자회견을 참석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오신 선생들이 가져오신 일제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정리 : 김장호 편집국장, 사진 : 강호석 기자

 

▲ 재유럽한민족연대 상임고문 이종현 선생. 옆에는 부인인 우즐라 리 여사와 명은희 여사(윤 선생 부인)

기자 : 이번에는 연합뉴스, jtbc,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언론도 많이 나와서 유명해지셨던데 고국 방문 소감이 어떠십니까? 

윤운섭 : 일정이 바빴어요. 오월민중항쟁 행사 전체 일정에 다 참가하고, 일요일엔 감사장도 받고, 장흥 갔다가 부산 가서 민주공원 행사도 참여하고, 다시 광주 가서 단체들과 간담회 하고, 통영 들르고, 서울에서는 권영길 선생 만나고, 수요시위 갔다가 윤미향님도 만나고, 정신없이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따뜻한 대접을 받았고요, 많은 언론 보도 덕분에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습디다. TV 봤다고 알아도 보고, 떡도 사주고.^^
아직 만날 분들이 많은데 박원순 시장이 독일서부터 연락 와서 꼭 만나자고 하는데 선거기간이라 되겠느냐고 해도 꼭 봐야한다고 그래요. 

기자 : 2016년 입국불허되었을 때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이종현 : 막막했죠.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우리가 밉다 하더라도 고국에 찾아온 건데 그걸 못 들어오게 하니 참 슬펐어요. 공항 호텔에 머물면서 동생들 선물 주려고 사온 술을 부인과 둘이 만취가 되도록 다 마셨어요. 밤새 노래도 부르고, 독일말로 욕도 실컷 했지요.(웃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독일에서는 한국 사람들 교육수준을 참 의심했어요. 이명박도 형편없었는데 박근혜를 왜 뽑았나. 창피하고 서운합디다. 
입국 불허돼서 쫓겨난 지 불과 4~5개월 만에 촛불이 터졌잖아요. 지금 문재인 정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니 그게 맘에 들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트럼프가 당장 전쟁이라도 할 듯했지만, 우방국인 대한민국이 반대한다면 전쟁할 수 있겠어요. 

기자 : 박근혜 정부가 싫어하는 활동을 많이 하셨나요? 

이종현 : 추방된 이유가 결국 독일에서 박근혜 당선 무효 시위하고 촛불 들고 하니까 그런 거죠.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합의 반대운동도 크게 했어요. 소녀상 건립위원회를 만들어서 운동을 했는데, 일본대사관 방해가 대단했죠. 수원시에서 시민단체랑 해서 1억원을 모금했어요. 그게 어디 작은 돈입니까? 처음에는 수원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프라이부르그라는 도시에 세우려고 했는데, 일본대사가 독일 시장을 만나서 소녀상 설치하면 자기들하고 맺은 자매결연을 취소하겠다고 압박을 넣은 거예요. 소녀상이 올데갈데가 없어진 거죠. 그래서 레겐스부흐라는 개인 소유의 큰 공원에 세웠어요. 여기에도 일본영사, 대사가 시당국에 계속 전화해서 압박을 넣고, 그 사람 소유 건물에는 일본자본은 투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주 방해를 많이 했죠. 결국 세우긴 세웠는데, 아직 비문을 못 달았어요. 
참 일본사람들이 독일에서 외교활동을 놀라울 정도로 합디다. 우리 대사관은 골치 아프니까 침묵만 지키고. 이제 좀 바뀌어서 총영사가 찾아왔어요.

기자 : 새 정부에서 바뀐 것이 또 뭐가 있습니까? 

윤운섭 : 사실 2016년 이종현 선생이 공항에서 추방되었을 때 많은 단체들, 더불어민주당 등이 성명 내고, SNS에서도 수천 명이 이건 아니라고 규탄했죠. 독일 동포들이 박근혜에 대해 항의가 많았어요. 우리 역시 국내 촛불과 똑같이 싸웠죠.
그리고 새 정부가 들어서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종현 선생님과 부인이 영접팀으로 나갔어요. 환영식에 참석해서 발언도 했죠. 처음에는 없다가 나중에 눈치 채고 부른 거예요. 영접팀의 10분의 1을 차지한 거죠.^^ 

기자 : 독일, 유렵 해외동포운동에 대해서 소개 좀 주시죠. 

윤운섭 : 이종현 선생님은 평생을 통일운동에 참여하신 분이고, 유럽에서도 제일 어른이죠. 38년 동안 오월민중제를 2박3일 행사로 꾸준히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인사들을 많이 초청했어요. 광주인사들은 거의 다 초청했었고요. 이창복 의장, 박원순 시장도 강사로 초빙했었죠. 한국진보연대 한충목, 손미희 선생도 왔다갔고, 서준식 참여연대 변호사, 김동춘 교수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왔다갔어요. 호주머니 십시일반 내어 비행기값 다 대고 열심히 했지요.^^ 
국내단체와 독일진보단체랑 연결해주는 가교역할도 많이 했어요. 광주에서 오신 분들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도 만났고, 전교조 오면 독일 전교조 만나게 하고, 진보정당 오면 녹색당도 만나게 하고.

▲ 1980년 5월30일 힌스페터 기자의 광주학살 보도를 보고 독일에서 거리로 뛰처나와 전두환 신군부의 민중 학살을 규탄하는 독일 교민들{사진 : YTN 유튜브 캡처] 

광주학살을 알리고 규탄하는 행동이 광주항쟁 당시에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일어났다. 특히 독일에서 크게 일어났다. 1980년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푸른 눈의 목격자’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취재영상이 독일 전역에 방송되면서, 당시 파독 광부, 간호사 등 재독동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유학생 등 교민 1000여명이 5월30일 베를린에서 전두환 광주학살 규탄집회를 열었다. 독일어로 '한국 민주주의', 한글로는 '광주민주화 투쟁을 지지한다'고 적고, 유럽 곳곳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며 광주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평범한 광부이자 간호사로 살던 교민들은 5.18항쟁 이후 조국의 민주화,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게 된다. 

기자 : 독일에서 매년 오월민중제라는 이름으로 광주항쟁을 기리고 있는데요. 그 내용을 최근 유럽동포운동 현황과 함께 말씀해 주시죠. 

이종현 : 재유럽 오월민중제 행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재유럽한인연대, 베를린 노동교실, 민중문화모임, 코리아 협의회 이렇게 4개 단체가 주축이 되어 오월민중제를 돌아가면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원래 민협이라고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87년에 세워졌는데 쭉 연합운동을 했죠. 그러다가 90년대 중반 해산되었는데 오월민중제는 계속 유지했습니다. 97년쯤에 이제 우리가 하나로 뭉치자. 각자 하니 목소리가 너무 작다 해서 2000년에 재유럽한민족연대를 창립하게 됩니다. 
그 동안 이들 조직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 유럽에서는 반독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200~300명이 독일의 수도 본에 모여 진행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 지지 시위 때는 400명 이상 모였죠. 국내에 중요한 이슈가 돌 때마다 독일, 유럽 동포들도 함께 해왔습니다. 거의 국내랑 호흡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죠. 

기자 : 통일운동도 상당히 활발하지 않았습니까? 

이종현 : 그렇죠. 임수경씨가 베를린을 통해 북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 일 때문에 당시 민협이 영광스럽게도 반국가단체가 되었죠. 90년대 조성우씨 등이 와서 범민련 결성 회의도 베를린에서 열렸어요. 남북해외가 모여 범민련 구성을 논의한 곳이 독일입니다.  90년 1차 범민족대회에는 유럽에서 65명이 평양에 가서 북부조국 동포들에게 마음을 전달했죠.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서경원, 황석영, 홍성담 등등에 또 무슨 간첩사건들. 정부에서 빨갱이라고 볼만 했어요(웃음). 강원도 한 국회의원이 언제가 베를린에 와서 독일 좌파의 성지에 왔다고 농담을 하더라고요.^^ 

8.15 범민족대회 추진위원회 1차 회의가 서울 수유리에서 열렸는데 내가 참가했었죠. 그 외 일본 3명, 미국 2명 등 해외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거기서 이창복 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죠. 방에서 두 사람씩 자게 됐는데 밤중에 나가보니까 두 젊은 학생이 서 있어요. 왜 그러냐하고 물으니까, 선생님을 지킵니다 하더라고요. 기가 차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 당시 학생조직 한총련 최고지도부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왔데요, 그때 학생지도부가 수배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지시가 내려간 모양이더라고요. 대학생들이 우리까지 지키러 나왔구나 하면서 희망이 보입디다. 젊은 학생들이 지켜준다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 재유럽한민족연대 총무 윤운섭 선생(2대 의장)

기자 : 해외동포들의 민주화, 통일운동이 참으로 역경 속에서 오늘까지 왔네요.

윤운섭 : 사실 민플러스가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해외에서도 아직도 고국방문을 못 하시고 계시는 분들, 강제추방 당한 분들의 명예회복이 되도록 보도해주셔야 합니다. 신은미씨를 비롯하여 일본 등지 해외에서 많은 분들이 아직도 못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 분들의 명예부터 회복시켜야 합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나쁜 짓을 했으면 반드시 사과가 뒤따라야 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과거 정부의 일로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고 하고 다시 회복해주어야 합니다. 그냥 슬쩍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그런 일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독일 민협만 해도 과거 임수경 때문에 반북가단체되었는데 지금 그 일인자(임종석)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는데 이런 거 풀어주어야 합니다. 

기자 : 해외에서 무명의 민주화 인사, 통일애국 인사들 소개 부탁합니다. 

윤운섭 : 이희세 선생, 정규명 박사, 최기영 박사, 정성배 박사, 김성수 박사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오월민중제 할 때, 광주 영혼을 빌고, 유럽에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했던 인사들, 돌아가신 분들 이름까지 적어서 절하며 기리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분들을 말씀하셨는데 녹음으로 알아듣기가 힘들고 다 받아 적지도 못하였다. 추후 자료를 찾아내어 소개하려 한다. 독일, 유럽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지에서 무명의 민주화, 통일애국활동을 하신 분들에 대한 기록, 고초를 겪으신 분들 명예회복 문제를 다루는 게 필요하다는데 공감했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도 기다린다. 

기자 : 파독 초기 시절 에피소드 한두 가지 말씀해 주시죠.

이종현 : 65년도에 독일에 광부로 갔습니다. 그런데 67년도 7월인가 베를린 동백림 사건이 터집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거꾸로 많이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건이 터지기 몇 개월 전에 우연한 기회에 정규명 박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가려니까 학습방법과 진학방법 등도 알고 싶어 정규명 박사 등 지인들을 만나고 같이 하룻밤 자기도 했는데 몇 개월 지나니까 동백림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6개월 후 재판이 있었는데 정규명 박사는 사형선고, 그 다음에 윤이상 선생이 심하게 형을 받았죠. 독일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그것이 참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 요구로 찾아갔는데 점차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8년 3년 광부 의무 기간이 끝나 가는데, 대학에 적을 두어 독일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죠. 그런데 비자 유효기간이 2개월밖에 안 남아 연기신청을 해야 했어요. 한국 대사관이 본에 있었는데 독일 지인이 혼자서 가지 말라는 거예요. 가려면 독일 사람하고 같이 가라. 당신 나라는 위험한 나라다. 막 잡아가는데 당신도 잡혀갈 수 있다. 참 한국사람으로서 정말 창피했습니다. 

윤종현 : 좀 보충을 하면, 적폐청산은 국내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해외적폐도 청산해야 합니다. 안기부 등이 나서서 동포사회에 엄청난 분열공작들을 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경우 동포들이 여러 층이지만 독일은 거의 파독 광부, 간호사 출신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박근혜 동상 세우자는 사람들도 아직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니까 바로 만세 부르는 사람들도 있던데, 죄지은 사람들도 많아요. 세월호 문제 이야기할 때 우리에게 반대 데모하고, 그거 끝나면 어디 가서 저녁 먹고 하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다 조사해야 합니다. 박사모, 안기부 다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기자 : 광주항쟁 진상에 대해 인터넷상에서 왜곡이 심하다고 특별히 강조해 말씀하시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까?  

이종현 : 한국 간다니까 독일에서 이 이야기를 꼭 해달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자제들이 하는 이야기가 인터넷 보면 광주항쟁이 북에서 조종한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부모님은 다른 소리를 하느냐는 거예요. 학생들이 처음 접하다 보니까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별을 못하는 거죠. 사실 이런 거를 왜 정부에서 강력히 막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광주항쟁과 관련한 가짜뉴스는 법을 만들어서라도 강력히 단속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기자 : 동포사회 3, 4세대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겠군요. 최근 동포운동 상황은 어떻습니까?

윤운섭 : 사실 옛날에는 국내에서 돈 좀 보내달라 하면 길에 나가 음식도 팔고 모금도 하고 해서 국내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힘들어요. 그 동안 독일에서 오월민중제 행사를 하면 150명, 200명이 모여도 음식을 다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스스로 음식을 만들고 돈도 내가면서 하지요. 단체들이 보조한다 해도 행사참가비가 꽤 듭니다. 개인 참가비가 13만원 정도입니다. 2박3일을 먹고 자야 하니까요. 교통비는 최소 30만원. 보통 500~700km를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못 온 분들도 있습니다. 또 나이도 들어가고 해서 앞으로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하는 것도 과제입니다. 
오월민중제 마지막 날 토요일은 언제나 불고기 파티를 합니다. 내년 민중대회는 청소년 2세들을 초청해서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기자 : 이번에 5.18재단 광주아시아포럼에서 감사장 받으셨죠?

윤운섭 : 네. 이종현 선생이 발언도 했습니다. 오월정신이 세계화되어야 합니다. 사실 국내운동에 아쉬운 점이 외국에 대한 사업이 매우 부족한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참여연대, 더불어민주당 다 그래요. 국내에서 힌스페터 기자 돌아가신 것도 모르더라니까요. 독일인 중에 전 재산을 한국 민주화를 위해 기부하신 분도 있구요. 오월 광주항쟁기념식을 위해 국내에 들어오려다 추방당한 녹색당 당원들도 있어요. 함께 팔목 끼고 시위하는 분들은 물론이구요. 이런 분들을 못 챙깁니다. 한반도 국제평화포럼, 5.18재단, 각 단체들에서 이런 일들을 잘 해서 오월정신을 세계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부분도 할 일이 많아요. 나부터가 베를린 노동교실출신이고, 전태일 열사 추모식도 합니다. 전노협, 민주노총 발대식 때 녹색당 연대사도 보내고 했지요. 올해도 김세균 교수가 오월민중제 강사로 오셨지요. 
자유한국당 수구보수들이 오히려 해외운동의 중요성을 아는 것 같아요. 지금 해외유권자가 선거를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에서는 51% 나왔지요. 

기자 :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독일 역시 분단사회였고, 한국 대통령들 무슨 통일관련 선언하면 다 독일 가서 하고 하는데, 독일 자체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이종현 : 이런 질문은 민플러스에서 처음 받아보네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독일사회에서는 김정은 위원장 뭐뭐 이야기하면 항상 욕이 들어갑니다. ‘나쁜 사람이다. 무서운 원자탄 개발한다’ 그래요. 북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어요.
북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서로 공존해서 살자는 이야기인데,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토론하기가 힘들어요. 서방의 눈이라는 게 딱 정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TV토론, 정치토론 같은 좋은 프로그램에서도 그 한계가 분명해요. 요즘 코리아 문제가 독일에서도 핫이슈인데, 토론에서 한국문제 5명 정도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토로하면 진보, 보수, 중도 할 거 없이 좋을 이야기 다 나옵니다. 그런데 평화협정 같은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합니다. 결국 결론은 북에서 잘못하고 있다는 식이죠. 얼마 전 한 분이 북에서 원하는 것이 평화협정인데 이걸 왜 반대하나? 하니까 대답도 못 하더라고요. 
촛불혁명으로 고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해외동포들 입장에서는 정말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조국은 하나 아닙니까? 비록 해외에 살고 있지만 조국통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기자 : 독일사회가 북에 대해 일방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진보, 보수가 균형감 있는 사회 아닌가요? 

이종현 : 독일정부를 이끌고 있는 메르켈은 기독당 출신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사민당과 같지요. 그래서 연정을 통해 장기집권하는 거구요. 그런데 독일이라는 나라가 아직도 미국의 반 속국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독일 국방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미국 원자탄이 수십 개 배치되어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도 독일에 있고요. 경제도 그렇지만 국방이라는 차원에서는 80%이상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거죠. 미국에게는 맥을 못 씁니다. 몇 년 전 총리 손전화기를 미국이 도청했는데, 한 마디 하기는 했지만 시원한 대답 하나 못 들어도 뭐라고 못하는 게 독일입니다. 

다음 약속 때문에 여기서 인터뷰를 마쳤다. 파독광부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기자가 노동운동 출신이라 그런지 두 분 선생의 인상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소박한 정감이 들었다. 

2018 광주아시아포럼에서 진행한 이종현 선생 발언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인사 드릴 수 있어 너무 기쁩니다. 저를 위해 애써주신 518기념재단 여러분들! 그리고 모든 분들께 먼저 감사 드립니다.

재유럽 오월민중제를 대표하여 독일에서 온 이종현입니다.

지난 2016년에도 518기념행사에 초청 받아 "유럽에서 5.18광주항쟁에 대한 활동”을 주제로 발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처와 함께 오다가 모두 인천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다음날 독일로 쫓겨났습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조국에서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깜깜하다 못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집에서 출발한 저희 부부는 절망과 분노 속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장장 70여시간의 여정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몸이 힘든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혼돈과 울분으로 뒤엉킨 감정은 억제하지 못하여 앓아 누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까지 문제가 없던 입국이 박근혜 정부에서 금지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저의 공개적인 사회운동인 것 같습니다. 먼저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을 했습니다. 또 세월호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진상을 밝히라고 적극 활동했습니다. 굴욕적인 위안부협상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독일에 소녀상 건립을 위해 연대활동을 했습니다. 더한 것은 박근혜가 미워하는 5.18기념행사를 계속 진행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희는 독일에서 1981년부터 매년 광주영령들의 뜻을 기리고, 그 영혼을 위로하는 재유럽 오월민중제를 2박3일의 일정으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80년 5.18 광주의거에서 해외에 사는 우리들도 시민의 권리가 무엇이며, 이를 침해 받으면 민중은 분노하고 불의에 항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희생 되신 영령들께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어,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제37주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37년을 추모식에 참석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이번 제38주년에도 물론 참석할 것입니다. 저희 부부도 여기 광주에 참석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당연지사지요. 우리 생전 어떠한 경우든, 어디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오월민중제에는 꼭 참석하는 것이 광주민주화 영령들에 대한 사람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산 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960년대 말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권리 찾기부터 시작한 조국의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은 이제 50여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잔악했던 군사독재의 마지막 뿌리도 이번 촛불이 불살라버렸습니다. 이제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결코 지치지 않겠습니다. 5.18 민중항쟁을 거울삼아 한반도의 통일과 번영, 평화와 인권을 위하여 재유럽 오월민중제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세월 오월민중제에 부모들과 함께했던 2세들이 학업과 취업으로 한동안 뜸했는데, 이제는 다시 그 아들딸인 3세들의 손을 잡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은 우리들보다 더 앞장서 촛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세월호의 아픔도 같이 나누며 그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습니다. 희망을 봅니다.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터넷에 광주민주항쟁을 비열하고 악랄하게 왜곡비방하는 영상을 올리지 못하도록 막아주십시요.

잘 아시다시피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구합니다. 특히 외국에 사는 2세 내지 3세들은 조국에 대한 정보를 거의 인터넷을 통하여 얻고 있습니다. 옳고 바른 진실을 원하는데, 사악한 자들이 올린 영상은 이들에게 너무 많은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우리는 TV에서 광주의 처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봤습니다. 터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학살을 멈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독일 모든 시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어찌 그날을 잊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80년 이후 출생자들도 이제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장이 아니라 역사로 광주의거를 배우고 있습니다. 세월은 무섭습니다. 그래도 진실은 살아있고 또 살려야 합니다. 올바른 역사만이 민족을 바로 세우고 참된 민주사회를 이룩합니다. 

다시 한번 부탁 드립니다. 5월 광주의 참된 이념이 절대로 훼손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1980년 5월, 바로 여기 우리 광주의 정신이 촛불혁명을 촉발시켰으며, 드디어 그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밝은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저의 조국, 이 한반도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5월18일

재유럽오월민중제를 대표하여 이종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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