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해된 동티모르인들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인들[사진출처 : TRIPOD. 문답으로 알아보는 동티모르. 스티븐 R. 샤롬, 노암 촘스키, 마이클 앨버트 등]

동티모르
티모르 섬은 16세기 후반부터 동서로 나뉘어 각각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후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일부로 병합되고, 동티모르는 1975년에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곧장 동티모르를 무단 침공하여 20만 명 이상을 학살한 뒤, 1976년 이곳을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선포했다. 

미국의 동티모르 학살 지원 : 1975년 12월 유엔 안보리는 인도네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시 미국은 기권표를 던지고, 인도네시아를 제재하자고 주장하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압력을 행사해 제재 결의를 방해했다. 

1975년 12월 초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했다. 수하르토는 무력 침공에 대한 미국의 의중을 물었다.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 미국은 이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포드가 답했다. 키신저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우리도 이 문제에 최선을 다하겠다. 당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우리도 주변에 함구를 지시하겠다.” 

이후 미국 정부는 한동안 동티모르 양민 학살을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호도했다. 또 학살이 극에 달했던 1999년까지 학살에 필요한 무기를 인도네시아에 공급했다. 

동티모르의 독립 : 무려 25년의 독립투쟁 끝에 1999년 8월20일 유엔 선거감시단의 감독 아래 동티모르의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78.5%가 독립에 찬성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가 저지르는 강간·방화·학살은 끊이지 않았다.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인종청소는 더 심해졌다. 심지어 구조 활동 참가자, 유엔기관 종사자, 외신기자, 외교관마저 표적이 되었다. 

유엔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학살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지원과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방해로 독립 이후 지금까지도 학살의 정확한 피해 규모와 희생자 수에 대한 유엔 차원의 공식조사가 없는 실정이다. 

미국은 왜 학살을 지원했을까? 인도네시아를 지원하는 대가로 동티모르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석유자원 등을 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가장 큰 이슬람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이슬람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 말라버린 강바닥에서 사금을 찾는 사람들. 미국에 본사를 둔 광산회사 프리포트 맥모런 소유의 서파푸아 금광에서 매일 20만톤의 광산 폐기물을 쏟아내어 수천 헥타르의 산림과 강이 황무지화하고 있다. [사진출처 : nebelstern1915 블로그, 파푸아의 골드러시, 2017.05.27] 

서뉴기니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제국의 침탈로 파푸아뉴기니는 동쪽은 영국과 독일, 서쪽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서파푸아는 1952년 유엔결의에 띠라 독립국가 수립에 착수했다. 1961년 12월1일 네덜란드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고 처음으로 파푸아뉴기니의 국기를 게양했다.

미국의 서파푸아 독립 방해 : 미국은 인도네시아(*수카르노 시절)와 빅딜을 통해 원주민의 삶터인 서파푸아를 인도네시아에 넘겨주기로 한다. 동서 냉전 때 중도적인 자세를 견지하던 인도네시아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습에 불만을 품자, 미국은 서파푸아를 마치 제 것처럼 인도네시아에 넘겨주고 이를 공산화를 억제하는 지렛대로 이용했다. 대국 인도네시아마저 좌경화된다면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패권전략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빅딜의 대가로 미국은 서파푸아의 금광 등 지하자원 독점채굴권을 챙겼다. 인도네시아는 특공대를 투입해 국가 수립을 준비하던 서파푸아 의회 대표들을 고문, 감금하고 저항하는 현지 주민도 무차별 학살했다. 

자주독립에 관한 유엔 결의사항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시되었다.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가 여기에 반발했다. 미국은 한발 물러나 유엔 임시행정관의 관리 아래 주민투표로 정부 수립 여부를 결정하자는 ‘자유선택안’이라는 속임수를 제시했다. 1962년 8월15일, 미국·인도네시아·네덜란드 사이에 뉴욕협정이 발효되었다. 미국이 세운 유엔행정관이 파견되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는 즉각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5월, 유엔행정관이 철수하자 파푸아 의회를 해산하고 서파푸아를 아예 자국에 귀속시켰다. 

서파푸아 인민의 저항은 무참히 짓밟혔다. 인도네시아군은 저항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마을의 남녀노소 전원을 학살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978년 5월 서파푸아 독립군 지휘관 5명이 인도네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자진 투항했으나, 인도네시아군은 이들을 인두로 지져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재래식 변기에 버리고, 살려주기로 약속한 주민 125명도 모두 사살했다. 

1961~2007년 현재까지 서파푸아에서 자행된 학살·고문·강간 및 원주민 마을 파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이로 인한 희생자도 10만 명을 상회한다는 것이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공식 주장이다. 

미국 기업의 자원 착취 미국 기업은 1967년, 인도네시아에게 서파푸아의 금광과 구리 광산에 대한 30년 독점채굴권을 획득하여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매장량 세계 1위의 금과 구리,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천연자원은 프리포트 맥모란을 비롯한 세계적 규모의 광산업체와 유니온, 텍사코, 엑슨 모빌, 쉘, 아집같은 굴지의 정유회사들이 독식하고 있다.

이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서파푸아 환경은 급격히 파괴되었다. 맥모란이 운영하는 그라스버그 광산은 하루 19만 톤의 폐수와 60만 톤의 폐석을 쏟아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1996년 현재 오·폐수 방류로 광산 부근 70km 이내의 하천에는 생물이 살 수 없고, 인근 연안의 어획량도 지역에 따라 50~80%까지 감소했다. 환경오염으로 원주민의 불평이 고조되자, 미국은 현지 지형에 적합한 소형 폭격기(OV-10 Bronco)까지 공급하면서 인도네시아군의 원주민 학살을 지원했다. 이는 18~19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맥을 발견한 백인들이 현지 인디언을 무차별 학살하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주민들의 훌라춤이 통제되는 그림. 미국 정부와 경찰,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훌라를 제어했으며 어떤 특별한 모임에서도 훌라를 금했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는 훌라의 춤과 노래에서 일부 흔적만 남는다. [사진출처 : 세계의 섬 문명사(7)]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의 흑역사 하와이(Hawaii) 월간중앙 201707, 204호]

하와이
영국의 영향 아래 있던 하와이의 여러 섬은 1810년 카메하메하 1세에 의해 단일왕국으로 통일되었다. 국호를 하와이왕국으로 정하고, 영국과 미국 등지에게 국가 승인도 받았다. 입헌왕국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하와이를 파멸시키는데 개신교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 선교사들이 기독교와 함께 양키식 자본주의 문화를 주입함에 따라 유기적 공동체 의식을 미덕으로 여기던 원주민들은 가치관의 혼돈을 겪으며 점차 균열되기 시작했다. 

1849년 하와이왕국과 미국 사이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75년에는 양국의 관세조차 철폐됨에 따라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미국의 농장주와 이들이 불러들인 아시아계 노동자의 이민이 급증한 것도 원주민의 정체성을 파탄 내는 한 요인이 되었다. 1893년 1월, 마침내 미국의 스티븐스 장관은 하와이왕국의 전복을 지시했다. 미 전함 보스턴호의 해병대원 약 200명과 선교사 등 현지 미국인들은 하와이 왕궁을 점령하고 여왕을 골방에 감금한 다음 하와이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1897년 미국은 자신이 세운 하와이 괴뢰정부와 본국 사이의 형식적인 합병조약을 체결한 뒤 하와이를 사실상 미국의 영토로 만든다. 

1778년 당시 최저 40만에서 최고 80만 정도로 추산되던 하와이 주민이 230년이 지난 2007년에는 채 20만 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와이 원주민이 미국 정부 때문에 겪은 수난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괌 해군기지. 항공모함이 정박할 정도로 크다.[사진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panzercho.egloos.com]

괌·푸에르토리코·사모아
괌은 1898년 미·서 전쟁에서 이겨 스페인에게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으며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덤으로 넘겨받은 뒤 지금까지 미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2008년 5월 하와이 대표와 함께 유엔총회 경제·사회이사회의 원주민 포럼에 나온 괌의 작가 겸 사회운동가인 줄리안 아권은 괌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정책 폐지를 요구하며 괌의 미 해군기지로 인해 원주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인권유린 실태를 성토했다. 

푸에르토리코 역시 괌과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 인구 400만 명의 대다수는 과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의 후손이다. 이들의 법적 지위는 혼란스럽다. 미국 시민이면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고, 자치권은 있으나 그들의 대표는 미 의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다. 이에 대해 미 연방대법원은 ‘미국 영토에 편입되지 않은 미국의 영토’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하와이와 뉴질랜드 사이에 위치한 서사모아 역시 현재까지 식민지로 남아있다.

민주주의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해온 미 제국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자치령이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으며, 남의 땅을 강제 병합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이를 반환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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