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농민운동조직 ‘비아 캄페시나’ 이야기

1993년 경북 상주. 죽창을 만들어서 버스에 싣고 여의도까지 갔던 농민들이었다. 면사무소 책상을 들어 엎고, 공무원, 경찰들 앞에서 눈 한 번 곱게 뜨지 않던 젊은이들의 혈기가 지역을 뜨겁게 달구던 시절이었다. 자가용이 흔하지 않던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버스를 타고 온 면과 마을을 샅샅이 누비며 농민들을 만나던 시절이었다. 밥 때가 되면 농민회원 누구 집에서나 밥을 먹었고, 밤이 되면 농민회원 누구집이나 숙소가 되던 시절이었다. 시내 한 복판에서 농민대회를 하고 대로를 가로막아도 아무도 말 하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터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우루과이가 어디지? 라운드는 또 무슨 말이지?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이 협상이 타결되면 농민들이 다 죽는다”는 호소가 농민들을 서울로, 서울로 모이게 하던 때가 1993년이었다. 

세계 농민들의 연대와 단결

그 해 1993년 5월16일 지구 반대쪽 벨기에 몽스에서는 국제농민운동조직 ‘비아 캄페시나’가 창립됐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농민들의 저항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한국의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세계 곳곳에서 농민들이 격렬하게 투쟁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에 맞선 세계 농민들의 연대와 단결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는 현재 82개국의 182개 농민조직, 2억 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고 한국에서는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2004년부터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비아 캄페시나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국제농민운동조직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신자유주의 농업모델의 세계화와 그것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는 방식-국제기구, 정부, 초국적기업 등에 대한 투쟁을 20년 넘게 멈추지 않고 치열하게 벌이고 있으며 저항을 넘어 ‘식량주권’이라는 대안 속에서 새로운 농업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것을 위한 실천을 풀뿌리 지역 농민대중조직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아 캄페시나의 역할과 활동, 그리고 기여를 생각할 때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연결”이다. 비아 캄페시나를 통해 국제 차원의 운동과 지역 차원의 운동이 ‘연결’된다. 또한 국제적 차원의 의제와 지역적 차원의 의제가 ‘연결’된다. 비아 캄페시나를 통해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세계 소농들이 ‘연결’된다. 또한 농민과 어업인, 목축인, 임업인, 이주민, 원주민 등 농촌에서 소외 받는 이들이 ‘연결’된다. 더불어 지금보다 더 정의롭고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연결’된다. 이 연결을 통해 서로를 강화하며 서로의 꿈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는 활동을 하는 곳이 ‘비아 캄페시나’다. 

▲ 세계농민단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지난달 17일부터 21일까지 서울에서 국제조정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자유무역에서 농업을 제외하자‘는 반FTA 연대를 결의했다. [사진 : 한국농정신문 홈페이지]

비아 캄페시나와 한국농민운동의 “연결” 역시 서로를 강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왔다. 비아 캄페시나 소속의 농민들은, “WTO가 농민을 죽인다”며 칸쿤에서 자결하신 이경해 열사와 홍콩, 발리, 나이로비 등지에서 한국농민들의 투쟁을 봐왔다. 전 세계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빈곤으로 몰아넣는 국제기구들과, 이들과 결탁하고 있는 정부 등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투쟁을 명료히 인식하고 그 투쟁을 향해 더 강력하게 나아가게 됐다. 한국농민운동은 비아 캄페시나에서 제기하는 농업개혁, 농민의 권리, 식량주권, 농생태학, 페미니즘 등을 받아들이면서 한국농민운동을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아 캄페시나의 투쟁은 국제적 차원에서부터 풀뿌리 지역차원까지 다양한 공간과 다양한 영역, 다양한 의제로 벌어진다. 

지난해 7차 국제총회에서는 핵심투쟁을 ‘자본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에 맞서는 투쟁’으로 결의하고 ‘▲농생태학 실천 ▲씨앗에 대한 농민의 권리 강화 ▲토지·영토·물 등에 대한 개혁 ▲유엔 농민권리선언 제정 ▲초국적 기업과 자유무역협정 및 세계무역기구에 대항하는 투쟁 ▲기후와 환경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 그리고 ▲농촌 여성의 페미니즘’을 향후 4년간의 행동계획으로 설정했다.

전농과 전여농 역시 이 투쟁에 다양하게 결합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투쟁과 새로운 농업 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인 ‘농생태학’과 씨앗을 지키는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고 있다.

자본에 빼앗긴 농민의 권리

현재 관심 이슈인 「농민과 농촌지역민 권리에 관한 유엔 선언」과 관련된 비아 캄페시나의 활동을 살펴보자.

비아 캄페시나는 2000년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자본에 빼앗긴 농민의 권리를 찾기 위해 유엔 내에서 법과 제도, 공공정책으로 농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활동이 유용한 도구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 왔다. 유엔의 선언문이 국제조약처럼 각 국가 내에서 강제적인 법으로서 집행의 의무는 없지만 1948년에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확고히 하는 각 국가의 기본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국가의 헌법 및 법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8년 동안 이를 지지하는 NGO 및 정부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선언문은 농민과 농촌지역민의 인권, 식량주권에 대한 권리, 토지·물·종자·생물다양성·전통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발전권, 사법권 등을 담고 있다. 비아 캄페시나는 선언문 작성 작업을 위해 2013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5차례에 걸쳐 유엔 인권이사회 실무그룹 회의는 물론, 각 국가들과의 협상을 진행해 오고 있다. 

아직 채택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채택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될 것으로 조심스레 낙관하고 있다. 올 6월에 있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농민과 농촌지역민 권리에 관한 유엔 선언」 채택여부를 투표로 결정할 예정인데, 이사국 47개국 중 미국과 영국 2개 나라만 반대하고 34개국이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이 인권이사회에서 통과되면 유엔 총회에서 마지막 채택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선언문은 “농민과 농촌지역민들이 인류 발전과 지구생태계, 먹을거리를 위해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빈곤, 기아, 폭력, 추방 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자원의 착취, 자원의 집중, 먹거리 체계의 불균형 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농민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먹거리, 지속가능한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또한 법 체계 밖에 있는 불법 이주민, 토지 등 생산자원이 없는 농민과 농촌지역민,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 받고 있는 여성과 여성농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인권임을 밝히고 있다. 

▲ 지난달 21일 강원도 철원군 현장을 방문한 비아 캄페시나 국제조정위원들이 철원평야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 한국농정신문]

“농민인권 강화, 절박하다”

한국정부도 인권이사국으로서 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언문에 대한 농민 및 농민단체들의 의견을 청취하려는 적극적인 입장 없이 토지권, 종자권 등 몇몇 조항을 문제 삼으면서 기권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반대하고 있고, 지본의 편에 서 있는 정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입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농민을 외면하는 반농민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초국적기업들에게 권리를 빼앗기고 생존 위협에 신음하는 한국 농민들에게는, 농민의 권리를 국가가 보장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는 이 선언문의 제정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언문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외교부와 농림축산식품부에게 농민단체의 입장과 농민들의 바람을 전하고 있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국내법과 상충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는 말만 몇 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의 법이 농민의 권리보다 자본과 기업의 권리를 더 우선시 하는 법이기 때문에 오히려 농민의 권리는 침해당하고 있으며 농촌의 붕괴는 먼 미래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농민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절박성을 모르는 것일까? “현재의 국제·국내법으로는 농민들을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2012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결정에 이어 새로운 선언문을 만들기로 했던 정부 간의 합의를 모르는 것일까?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정부가 농민의 인권을 강화하는 이 선언문에 찬성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다음달 18일부터 진행될 38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 선언문 채택 여부에 대한 국가들의 투표가 있을 예정이다. 기권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번에는 어떤 입장을 취할지 농민들은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나아가고 있다. 소수자, 약자 모두가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진보의 발걸음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농민들의 투쟁 역시 마찬가지다. “투쟁을 세계화하라! 희망을 세계화하라!”는 비아 캄페시나의 구호 속에서 세계 소농들의 연대와 단결은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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