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24)

문 : 앞에서 마르크스, 레닌과 마오가 각기 자기 시대, 자기 사회에 적절한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마르크스주의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요?

답 : 기다렸던 물음입니다만, 답변은 막연할 것 같아요. 실망할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또 듣기에 따라서 당파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지식이 동원될 텐데 엄밀성이 결여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비춰보는 거울로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 자주적 마르크스주의

나는 몇 번 나 자신의 입장을 자주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 그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위의 물음에 답하려 합니다. 나는 인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실천적 의지(감정도 여기에 속한다)의 영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유(판단)의 영역입니다. 후자에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사유와 이런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가치판단까지 포함합니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때는 주로 사회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합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객관적인 과학이죠. 우리는 이런 사회과학으로부터 우리가 지향해갈 가치, 즉 이념과 그것을 실현할 전략전술을 짜게 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에는 철학의 영역이 있습니다. 마르크스 철학은 존재론(유물론)과 인식론(변증법)을 거쳐 인간론을 다룹니다. 이때 인간론은 인간의 실천적 의지의 영역과 관련되죠. 인간의 실천적 의지를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또는 집단의지로 조직하는 데서 핵심적인 문제가 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마르크스 철학 가운데 인간론 특히 실천적 의지론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철학은 그 동안 실천의 역사를 통해 볼 때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 철학이 인간을 사회과학의 차원에서, 또한 구시대 사회의 인간상에 기초해 단순히 욕망하는 존재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새로운 시대에 마침내 감추어진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실천적 의지의 차원에서 철학적으로 파악해 본다면 바로 자주적인 인간입니다.

2) 자주성의 의미

자주성이라 하니 사람들은 단순히 민족의 자주나 민중의 자치라는 개념만 생각합니다. 그런 자주성 개념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이념에 이미 포함했던 개념입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토대가 된 것이 정치적 자주성 개념입니다.

물론 나는 정치적 자주성을 옹호합니다.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자주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자주성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기쁨을 느끼는 예술가나 운동가가 자주적 인간의 구체적 예가 됩니다. 나는 이런 자주성 개념이 결국 ‘동지애’로 귀착한다는 것을 내 책(<자주성의 공동체>)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자주성을 끌어들여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과학과 결합하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자주적 마르크스주의이죠. 

▲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사진 : 한국인성개발원 블로그]

3) 재정 지출 축소

이 정도 나의 입장을 전제로 하고, 이제 우리의 과제인 신자유주의 시대 현실을 이해해 보죠. 우선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상당히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유주의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신자유주의라면 대개 레이건, 대처 등이 취했던 재정정책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정부의 민영화, 영리화, 자유화)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복지 감축, 연금 개혁 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업의 세금을 대폭 경감하고 규제를 완화합니다. 이를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핵심은 기업 세금을 줄이는 것이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정부지출을 줄이는 겁니다. 주로 재정적 차원의 이야기이죠. 이것은 과거 복지국가 정책과 반대됩니다. 복지국가란 기업에서 세금을 더 걷어내, 재정지출을 증가해서 수요를 진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은 정부는 복지국가에 대칭적입니다. 신자유주의라 하면 정부 지출 축소로 보고, 자주 이를 복지국가에 대립하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4) 작은 정부론의 한계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재정지출 축소라는 재정정책 쪽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재정지출이 축소되었을까요?

작은 정부를 들고 나온 여러 정부들이 과연 작은 정부였을까요? 예를 들어 레이건 정부는 복지를 축소했지만 정부의 지출은 결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레이건 정부는 막대한 전쟁비용(이른바 ‘스타워즈’)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런 재정정책은 신자유주의 시대 일관적으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복지지출조차 약간 확대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바마 케어란 복지 확대였습니다. 그저 약간의 확대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정부, 정부지출 축소를 복지국가에 대립시켜,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정부지출 축소란 전체적으로 봐서, 경제의 성장에 따른 기업의 여력에 의존하고, 전쟁비용이냐, 복지냐는 그때마다의 선택지였을 뿐입니다.

5) 문재인 정부와 박근혜 정부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볼까요? 누구나 인정하듯이 우리 정부는 이미 충분히 작은 정부였습니다. 재정지출의 많은 부분이 군사비입니다. 그러니 정부의 선택폭이 거의 없었죠.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작은 정부를 떠들기는 했지만 별로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습니다. 더 작게 할 게 없었으니까요.

겨우 논쟁이 된 것은 개발독재 시절 세워졌던 정부기구를 한두 개 민영화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미 민영화의 문제점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그조차 본격적으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또 기업세 축소와 관련해서도 기업세가 이미 워낙 낮아서 축소할 여지도 없었지요. 겨우 몇 프로(3~4%?) 줄이는 정도죠.

거꾸로 신자유주의 극복과 관련해 복지정책이 제안되더라도 그 수준이 겨우 무상급식이나 떠드는 정도에 그쳤지요. 그거 몇 푼 늘린다고 갑자기 온 나라가 행복에 겨워 떠들었지요.

문재인 정부가 공무원을 확대하겠다고 하자, 이것이 마치 신자유주의 극복 정책으로 간주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이 역시 재정이 허용하는 한계에 그칩니다. 기업세는 늘릴지 말지 깜깜합니다.

작은 정부와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문재인 정부나 박근혜 정부가 별 차이가 없어요. 그걸 차이라 하면 차이겠지만 이런 재정지출과 정부의 확대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합니다. 재정이란 기업세에 좌우되고, 기업세란 경기에 따라 결정되는 거니까요. 게다가 남북대결을 강화해 국방비를 늘이면서 복지를 떠든다면 반북진보만큼이나 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의 병폐는 여전히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 사회를 놓고 본다면 대표적으로 비정규직 등 사회의 양극화, 중소기업과 농업의 몰락 등이 대표적인 병폐입니다. 그외 여러 병폐가 언급됩니다만 이런 병폐는 정부 재정정책의 틀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현상은 자본의 전개 전체 맥락에서 봐야 하며, 결국 금융자본의 세계 지배로부터 설명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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