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8) 낙랑군과 낙랑국

<삼국사기>를 보면, 낙랑군과 낙랑국이 등장하는데, 얼핏 동일한 실체를 서로 다르게 이름붙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낙랑군과 낙랑국은 엄연히 다르다. 낙랑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중국 한나라의 군현이며, 낙랑국은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독자적인 소국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견해가 확고하다. 그러다보니 낙랑국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비롯한 낙랑국의 역사는 한낱 설화로 치부되고 있다.

평양의 낙랑국

‘낙랑군 재(在) 평양설’은 역사적으로 파산됐다. 일제가 발굴했던 유적유물들은 조작됐거나, 침소봉대됐다. 해방이후 일제 강점기보다 10배 이상의 낙랑무덤을 발굴 조사해 본 결과, 낙랑무덤은 한식묘제가 아니라 조선식 묘제이며, 낙랑무덤 발굴 유물들은 대부분 중국식 유물이 아니라 조선식 유물이라는 점들이 확증됨으로써, 낙랑문화는 중국의 한식문화가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조선식 문화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결정적으로는 평양지역에 1세기 말부터 고구려식 무덤이 확산됐다는 것이 드러남으로써, 이 시기부터 고구려의 지배영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해에도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3세기 초의 고구려 벽화무덤이 새롭게 발굴됐다. 현재까지 평양지역에서 발굴된 3세기까지의 고구려 벽화무덤은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고산동 20호 무덤(3세기, 인물풍속도), 안학동 9호 무덤(3세기, 사신도). 평양시 승호구역 금옥리 벽화무덤(1~2세기), 평안남도 남포시 우산리 1호 무덤(3세기,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등이 있다. 

▲ 기원전 1세기 초 낙랑국

평양의 낙랑문화 창조자들은 어떤 세력일까? 중국의 한 무제는 고조선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사람들의 완강한 투쟁으로 압록강 계선 북서쪽 요동반도 지역만을 장악했을 뿐이다.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지역에는 낙랑국이 들어섰다. 나라를 세운 주인공들은 고조선 유민들이며, 낙랑국은 평안북도 남부, 평안남도, 황해도와 강원도 서북부 지방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소국들 중에서 비교적 큰 나라였으며,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했고, 군사력도 만만치 않았다. 낙랑국의 국왕은 최씨가문이 장악하고 있었고, 평양의 낙랑토성을 수도성으로 삼고 있었다.

낙랑국은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의 비옥한 땅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었던 만큼, 짧은 시간 내에 국력을 비상히 강화했으며, 기원 전후 시기에는 예성강 임진강의 중상류, 북한강 중류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다. 그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첫 부분에 낙랑과 백제가 이웃나라로서 평화적 관계를 맺기도 하고 여러차례 전쟁도 했으며,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한 기사, 그리고 같은 책 신라본기의 첫부분에도 낙랑군사들과 싸운 기사들이 있는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삼국사기〉권 23 백제본기 시조왕 11년 4월, 13년 5월, 17년 봄, 18년 11월, 권1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 4월, 남해 차차웅 원년, 유리니사금 13년 8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는 비극적 로맨스로 끝난다. 그들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늪에 빠진 것이다. 당시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하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에 접근했다. 한나라 역시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낙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데로 나갔다. 특히 낙랑국은 우수한 철제품 생산지였으므로, 한나라와 무역관계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고구려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고구려로서는 후한 침략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배후에 있는 낙랑국을 빨리 통합해야 했다. 또한 한반도 서북부의 비옥한 땅을 차지해 농산물 공급 원천지를 확보하는 것 역시 매우 절실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고구려는 낙랑국 통합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기원 32년 4월 고구려 왕자 호동은 남옥저 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헛갈려 낙랑국 동쪽 변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지역을 순행하던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다. 그는 호동이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호감이 생겨 왕궁으로 데려와 자기 딸(낙랑공주)과 혼인시키려 했다. 낙랑국왕 최리는 고구려의 압박을 둔화시키고, 자기의 운명을 더 연장해 보려는 얄팍한 속셈에서 낙랑공주를 호동왕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다. 

고구려의 대무신왕(재위기간 기원 18~44년)도 이 결혼에 동의하고 낙랑공주를 데려오게 했다. 고구려 왕실 역시 나름대로의 속셈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속셈은 이 결혼을 통해 낙랑국이 고구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고 전쟁 대비에 소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계책은 적중했다. 고구려는 결혼동맹으로 낙랑국의 경계심이 완화되자, 불시에 군사를 보내 투항을 강요했다. 낙랑국왕 최리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수도성을 포위당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낙랑국은 고구려의 속국으로 굴러 떨어졌다. 〈삼국사기〉에 실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는 이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 없는 북과 나팔 이야기를 꾸며 넣었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는 사실에 가깝다. 

그 후 5년이 지난 37년 고구려는 군사를 동원해 낙랑국 수도성을 들이쳐 낙랑국왕 최리를 처단했다. 속국을 다시 공격했던 이유에 대해 전해지는 자료는 없다. 하지만 유추해볼 수 있다. 대체로 모든 속국들은 본국의 지배와 간섭을 싫어한다. 힘이 없어 마지못해 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낙랑국왕 최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기존에 우호적 무역관계를 맺고 있던 후한 세력에게 은밀히 고구려를 쳐줄 것을 요청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또한 속국처지에서 벗어나려고 군수품 생산을 늘이고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책동을 간파한 고구려는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낙랑국을 아예 멸망시키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낙랑국이 멸망하자 일부 지배층은 신라로 망명했고(〈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조에 ‘고구려왕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투항하니 6부에 나뉘어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살수계선(오늘의 대동강의 지류인 황주천) 이남 지역에서 낙랑국 재건을 선포하고 그 명맥을 유지했다.

후기 낙랑국

살수 이남계선에서 다시 일어선 낙랑국의 통치자는 역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아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낙랑국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몇 년 동안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봐, 최씨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기원 37년에 낙랑국이 멸망한 이후 7년이 지난 기원 44년에 이르러서야 후한이 사신을 보내 낙랑국의 재건을 축하했다. 이렇게 늦게 사신을 보낸 까닭은 그동안 낙랑국 재건을 둘러싸고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원 44년 후한이 사신을 보낸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나온다. 그러나 양측의 기록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27년 9월조에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이남이 한나라에 속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반면에〈삼국유사〉낙랑국조에는 이 때 한나라가 ‘사신’을 보낸 것으로 돼 있다. 어느 쪽의 기사가 옳은가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하다. 그런데 〈삼국사기〉기사는 모순점을 갖고 있다. 당시 후한으로서는 낙랑을 칠 이유도 없었고 바다 건너 군대를 파견할 여력도 없었다. 당시 중국측 역사서 〈후한서〉의 어느 구절에도 이 때 후한이 바다 건너로 군대를 파견했다는 기사가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렇다면 군대를 파견해서 낙랑을 쳤다는 〈삼국사기〉기사는 잘못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기사가 옳다. 당시 후한은 자신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된 후 다시 재건돼 무역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 해석이다. 재건된 낙랑국은 이후 낙랑국과 대방국 두 소국으로 분리됐다가 3세기 말 고구려에 의해 통합됐다. 

▲ 기원 후 1세기 중엽의 조선후국과 낙랑국

고구려의 후국 조선

고구려는 옛 낙랑국의 북부지역에 ‘조선’이라는 소국을 세우고 후국으로 삼았다. 그 지역을 곧바로 성읍으로 개편하지 않고 후국을 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그 곳이 옛 고조선의 수도성이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 유민들은 그 지역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로 성읍으로 개편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 지배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타산했을 것이다. 둘째로는 살수 이남계선에서 낙랑국이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재건된 낙랑국 주민들에게 고구려가 낙랑국 자체를 멸망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옛 낙랑국 지배층이 후한과 결탁한 것에 대해 응징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기원 37년 이후 고구려 남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후한서〉나 〈삼국지〉의 고구려 전에 고구려는 남으로 조선, 예맥과 접하고 동으로 옥저와 접했다고 한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옥저가 남으로 예맥과 접했다는 것을 놓고 볼 때 고구려의 서남에 조선이 있고 그 동쪽에는 예맥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삼국지〉예전에는 조선의 동쪽에 예가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와도 부합된다. 만일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방에 있었다면 〈후한서〉가 마한의 북쪽에는 낙랑이 있었다고 하면서 고구려 남쪽에는 조선이 있었다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낙랑군의 경우 그 조선현은 군치가 있었던 작은 현에 불과하였고 그 북쪽에는 여러 개의 현들이 있었으니 ‘남으로 조선과 접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후한서〉의 이 기사는 지금의 평양지역에 조선이라는 소국이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 보성리&#160;벽화무덤
▲ 보성리&#160;벽화무덤&#160;출토&#160;유물

오늘날 평양지역에 한의 낙랑군이 없었다는 것은 최근 북한(조선)에서 발굴된 벽화무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북에서는 최근에 3세기 초엽의 벽화무덤을 평양 낙랑지역 보성리에서 발굴했다. 북측의 발표에 따르면 이 무덤은 지하에 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흙을 씌운 외칸으로 된 돌칸 흙무덤으로 길이 300cm, 너비 268cm, 높이 184cm 이다. 벽 안쪽에는 검은 색 안료로 벽화를 그렸는데 북쪽과 동쪽, 서쪽 벽에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북쪽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과 그 아내의 것으로 보이는 수레그림이, 그 아래에는 창을 든 군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개마무사대열이, 서쪽 벽에는 북쪽을 향해 달리는 말과 건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북한(조선)의 고고학 연구학자들은 이 무덤에 대해 "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의 내용, 그곳에서 나온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이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벽화를 통해서는 고구려 무덤 벽화가 선각화로부터 검은색으로만 그린 단색화 과정을 거쳐 채색화로 발전했다는 것이 해명됐다"고 밝혔다. 이 벽화무덤 발굴은 이미 3세기 초에 평양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지배가 확고히 정착됐음을 확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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