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리해보는 미일 침략사 2

조일관계사를 보면 후안무치 일본의 본질이 보인다

북미정상회담이 가시화되면서 아베의 초췌함이 볼 만하다. 여기저기 북일정상회담을 애걸복걸하는 걸 보니 기가 좀 죽었을지 궁금했는데... 지난달 24일 아베가 직접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로 부산 일본 영사관 앞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에 대한 대응을 요청했다고 하니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다는 사실이 우스워졌다. 5.1절 소녀상 옆에 세우려던 강제징용노동자상은 부산시민들의 밤샘 투쟁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철통같은 대치로 원하는 자리로 가지 못했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불씨가 되는 것을 미리 차단하고, 한미일 동맹을 다지기 위한 아베의 뻔뻔스러움이라니!! 일본이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한 짓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인 납북 문제로 북에 온갖 시비를 거는 아베 집단 일본!! 일본은 왜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무례할까? 그 근원을 이해하려면 조일관계의 역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조-일관계는 조선정부의 주도적인 지위로부터 맺은 교린관계였다

고려 말 등장한 일본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 소탕을 명분으로 명나라에 조공 책봉의 관계를 맺는다. 무로마치 막부는 조선에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형성한다. 조선의 『사대교린』 외교(큰 나라에 대해서는 ‘사대하기를 정성으로 하고’,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신의로 교린하는’ 외교)의 시작이었다. 조선이 일본과 교린외교를 시작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방지하려는 데 있었다. 회유책 말고는 뾰족한 대책도 없었다. 

조선은 해안 침범과 약탈을 막기 위해 명목상 관직이나 혹은 인부(도장, 왕래와 교역허가권)를 주어 이들을 통제하였다. 막부 이외에도 일본 서남부 여러 다이묘들과 통교하면서 왜구를 평화적인 교섭자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대장경의 획득, 사찰 건립비용 마련, 하사품 수수, 무역 등을 이유로 조선을 왕래했다. 조선 조정이 다수의 일본 세력을 상대하는 ‘일대다’의 모습이 조선 교린외교의 특징이었다. 쓰시마 등에 사는 왜인들의 귀순을 장려해 토지와 가옥을 주고 결혼, 생활대책도 알선해주었다. 이들을 투화왜인, 향화왜인이라고 하며, 공을 세운 왜인들에게 벼슬을 주어 수직왜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은 여전했다. 1414년(태종14) 9월, 형조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보인다. 

“왜인들이 우리 변경을 침탈했으니 그 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전하께서 아량과 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무역을 허락하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지성으로 복종해 와서 예물 바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익을 탐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물건을 요구하고, 지나는 고을에서 표독한 짓을 자행하여 칼로 백성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부도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인이 왕래하며 죄를 범하면 대명률로 다스리소서....” 

1419년에는 쓰시마를 정벌해 왜구의 움직임을 경고하는 한편 1426년부터 3곳의 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고 약탈을 막으려 하였다. 1443년 매해 정기 무역선을 50척으로 하고 쌀 200석을 하사하는 『계해약조』를 맺었다. 1510년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조선은 교류 거점이던 쓰시마와의 교류를 중단했다.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1512년에 『임신약조』를 체결한다. 3포 중에서 제포만을 개항한다는 것, 무역선을 25척으로 줄인다는 것, 매년 하사미를 100석으로 줄인다는 것, 쓰시마 도주에게 교역 관리의 임무를 주고 그외 선박은 왜구로 판단해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다시 중단됐던 조일관계는 1609년 다시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는 국서까지 위조하며 매달리는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간청으로 『기유약조』로 복구된다. 

▲ 부산 초량 왜관도(왼쪽), 삼포의 위치(오른쪽)

조-일 정부급 접촉은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회례사, 보빙사, 경차관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물론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 즉위 축하 사절단도 간혹 있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오면 새 쇼군 취임 사절단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양 도꾸가와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축하사절단을 파견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임진왜란과 이후 도꾸가와 막부도 사절단을 직접 한성에 보내고 싶어 했지만, 조선은 이를 한번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민중의 대일 적개심이 극도에 달했고 그 이전 일본 국왕사의 한양 진입로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 경로로 사용된 전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선의 통신사 파견 이외의 조-일 국가간 교섭은 오직 부산 초량에 설치한 왜관을 통해서 쓰시마 도주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왜관은 일본인 거주 지역이다. 조선정부가 설치해 주고 운영자금으로 매해 쌀 100석으로 운영자금을 대주었으며 관리는 일본인들에게 맡겼다. 이들은 조선정부의 예조참판과 동래부사에게 보내는 막부의 서계와 명목적인 헌사 예물을 전달하며 답례로 후한 희사품을 받아갔다. 모든 서계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인정된 관인을 찍은 쓰시마 도주의 문인을 사용해야만했다. 

아무튼 조선은 통신사(전후기를 합쳐 이렇게 표현)를 막부의 거처인 에도까지 파견하였는데 1811년까지 총 19회였다. 반면 막부의 국가 사절인 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한 것은 70회이다. 조선 국왕과 막부 쇼군이 대등한 관계임에도 파견된 사절의 횟수가 이리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통신사의 파견 목적이 양국 간의 우호 교린에 있었던 데 비해, 일본 국왕사의 파견 목적은 주로 통교나, 하사품에 대한 경제적 욕구와 대장경을 달라는 호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꾸가와 막부 시절 에도에 파견한 조선 통신사의 의미를 통해 당시 조일관계의 본질을 살펴보자. 조선통신사 일행은 대략 사오백명 정도로 쓰시마 섬에 도착한 후 일본은 무려 1400여척의 배에 1만여 명이 영접 나와서 마중하였다. 통신사 접대비가 막부의 1년 예산과 같았다니 엄청난 규모였다. 1655년 통신사는 총 485명에서 100명이 오사카에 남고 385명이 에도를 방문했다. 당시 에도에서의 하루 식량이 쌀 20섬, 간장 1말, 식초 1말반, 된장 5말, 소금 3말, 기름 7말, 닭 100마리, 기러기 10마리, 비둘기 100마리, 농어 400마리, 도미 20마리 정어리 50마리, 연어 10마리, 가다랭이 1000마리 전복 200근, 꼬치고기 500마리, 계란 400줄, 파 100단, 나물 150단, 무 2000개, 알토란 5말, 송이버섯 100개, 두부 200모, 겨자 1말, 양갱 50상자, 조청 20근, 콩과자 50근, 시루떡 100근이었다고 한다. 일본이 이토록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통신사를 접대했던 이유는 막부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즉 도쿠가와 막부는 집권 초기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국제관계를 통해 과시하려 했다. 또한 조선 침략에 대한 보복의 두려움도 불식시키기 위해 우호 교린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부는 일본인들에게 이를 오히려 주변 제국이 막부에 복속하는 형태, 조공을 받치러온 복속 사절로 인식시켰다. 조선의 교린외교를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으로 활용한 셈이다. 그런데 1788년 도꾸가와 막부는 통신사 접대 비용을 절약한다는 구실로 통신사는 에도가 아니라 오사까 또는 쓰시마에서 영접하게 한다는 이른바 역지행빙(易地行聘)을 들고 나왔다. 일본 봉건제가 내부로부터 와해되며, 막부의 재정난이 심각해진 것이 문제였는데 이때도 일본은 이 문제를 《조선멸시관》으로 합리화하며 사기 행각을 벌린다. 《정한론》의 시작이었다.

▲ 조선통신사 행렬도(대영박물관 소장)

18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조선멸시관≫

나카이 치쿠잔의 글을 보면 조선멸시관의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한인을 만리나 항해하여 오게 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옛 일을 생각하면 천년이나 속국이었던 소이(小夷)를 시세에 따라 인교를 맺고 예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원래부터 보잘 것 없는 사절은 지금은 속국(屬國)이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천하의 재율(財率)을 기울여 영접할 것은 없다.’(나카이 치쿠잔 『초마위언』) 즉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었는데 조선통신사를 국빈 환대할 필요가 없으며 조선의 문화적 우월감을 없애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면서 조선 적대시 정책을 정부에 건의했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것은 일본이 왜곡 날조한 역사서 <일본서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통신사 연기의 명분을 합리화시킨 후 그 대안으로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쓰시마 섬에서 국서교환의 절차를 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서는 조선에 대하여는 재정 궁핍 만을 이유로 들어 연기를 요청했다. 

한편 통신사 연기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항례를 중시하는 조선의 전통적인 대일정책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통신사행이란 『교린체제』 아래서는 양국 사이의 우호확인을 위한 가장 상징적인 외교행사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변경할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 역지통신을 거부하면서 막부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면서 대일관계의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일본의 의견을 묵살할 수 없고 조선도 흉년과 가뭄 홍수 등이 계속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결국 연기하자는 제안을 받아드리게 된다. 연기를 요청하는 서계가 접수되고 몇 차례의 교섭 끝에 24년이 지난 1811년에 쓰시마섬 역지통신의 형태로 교섭이 재개된다. 종래의 통신사와 비교할 때, 실질적으로 양국관계의 긴박성이나 상호관계의 현실성이 희박해졌음을 의미한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과 일본 모두 서구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동아시아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었다. 서구에 어떻게 대처해 가는가가 훨씬 중요한 과제로 부상되면서, 전통적인 교린체제 유지는 더 이상 양국의 대외관계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 후 쓰시마섬과 부산초량의 왜관을 통해서만 외교를 하게 되었다. 

정말 섬나라 근성이 일본인의 민족적 특징일까? 

일본 역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인의 기질에 새삼 놀라게 된다. 혹시라도 반일감정으로 인한 편견이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그런 면이 있을 수 있겠다. 우리라고 자국 중심의 이기성이 없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우리민족의 기질과는 많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분과 대의를 중시한다면 일본은 이익이냐 손해냐를 중심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지면상 일일이 쓸 수 없지만 세종 때만 해도 대장경을 내놓으라는 애걸복걸 생떼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번 주면 다시 더 큰 것을 내놓으라고 안달한 것을 보며 이들에겐 체면이나 예의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교린외교를 날름 이용만 해온 일본은 19세기 초입부터는 오히려 조선을 집어삼킬 야욕을 갖게 되며, 그것도 자기 힘이 아닌 미국의 힘을 빌려 군국주의화를 추구한다. 그들을 상대하자면 일본의 기질을 역사를 통해 뼛속부터 알아야 한다, 다음 편에는 본격적인 정한론과 일본의 함포외교, 즉 조정론(조선정복론)의 대두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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