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차 만경대상 평양국제마라톤 대회 참가 위해 찾은 3박4일 평양

▲ 사진 : 나양일 캐나다통신원

이달 초 난생 처음 평양을 다녀왔다. 대학시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을 통일된 한반도에서 같이 살아가야 할 우리 민족”으로 이해하게 된 뒤 30년 만에 조선을 다녀온 것이다. 또 다른 반쪽의 숨결을 직접 느껴본 감격스러운 순간을 ‘통일기를 달고 뛰는 마라톤’을 응원해주는 분들과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분들과 소박하게라도 나누고 싶어 3박4일의 짧은 일정 중 느낀 소회를 전한다.

현재 필자는 세계 6대 마라톤(보스턴, 시카고, 뉴욕, 도쿄, 베를린, 런던)과 평양‧서울에서의 마라톤에서 통일기를 달고 뛰며 “한반도에서의 전쟁반대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라톤”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도쿄마라톤을 완주하면서 4개의 마라톤(평양, 베를린, 런던, 서울)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이번 평양행은 그렇게 남은 4개의 마라톤 가운데 ‘제29차 만경대상 평양국제마라톤’에 참가해 평양거리를 달리며 북녘 동포들과 통일조국의 염원과 희망을 나눠 보려고 오랜 기다림 끝에 추진한 것이다.

평양만의 제한된 지역에서 고작 3박4일의 체류기간을 방문기로 쓴다는 게 어쭙잖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무리다 싶어 평양마라톤을 중심으로 소감을 요약하고자 한다.

출발 전 준비 및 수속

평양마라톤에 참가하고자 하는 외국인은 평양마라톤 외국인 참가자 주관여행사인 고려여행사(본사 영국 소재. 중국 베이징지사)를 통해 마라톤이 포함된 패키지 관광상품으로만 다녀올 수 있다. 지난해 뉴욕마라톤을 마치고 고려여행사 북경지사와 접촉을 시작, 지난 1월초에 접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서류를 준비했다. 2월25일에 뛴 도쿄마라톤과 한 달 남짓 뒤인 4월8일에 평양마라톤을 연거푸 뛰어야 하는 일정 때문에 마라톤 훈련을 열심히 해야 했다. 하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이번 겨울 탓에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만 더해갔다.

2월초 여행사에 조선 방문용 비자신청 서류만 아니라 ‘조선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를 찾아가지 않겠고 취재 및 보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할 때엔 분단국가의 일원임을 실감했다. 이산가족들은 얼마나 서로 그립고 보고 싶을지 안타까움이 새삼스레 일기도 했다. 2월말쯤 나오기로 한 비자가 늦어지고, 특히 여행사에서 현장언론 민플러스 통신원 자격 때문에 추가로 서약서를 내라고 할 땐 어쩌면 못 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필자를 담당했던 직원이 조선에 들어갔다 나오느라 연락이 늦었다면서 3월초에 기다리던 조선 방문비자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평양행 경비는 3박4일 패키지 상품이 1370유로, 조선 비자 발급비용 50달러, 평양마라톤 등록비 150달러 베이징까지의 왕복항공료 750 캐나다 달러, 조선 내 사용경비 대략 300달러가 들었는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00만원 정도였다. 참고로 평양에서 패키지여행은 베이징에서 평양까지의 왕복 항공권과 일체의 숙식 및 관광 일정이 포함된 상품이다. 지난 5일 오후 베이징에 도착해 평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여행사 사무실에서 이번 3박4일 일정을 안내 받았다. 조선여행 전문이란 이 여행사는 올해로 25년째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여행을 안내하고 있다고 했다.

▲ 여행사 회의실에 걸려있는 조선영화 포스터들

4월6일 금요일, 첫째 날 -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6일 아침 일찍 여행사가 준비한 버스로 베이징공항으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흥분되거나 가슴이 뛰지는 않았는데 비행기에 탑승해 고려항공 승무원들의 미소 띤 인사와 조선말을 듣자 ‘진짜로 가는구나’ 실감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을 이륙한 비행기가 1시간 정도 비행했을 때, 승무원이 “지금 우리 비행기는 조중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 가는 중”이라며 “자랑스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안내방송을 했다. 창으로 혹시나 압록강을 볼 수 있을까 내려다봤지만 구름 때문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북녘 땅에 들어섰다는 감격에 가슴이 쿵쾅거렸고, 어서 내려 또 하나의 내 나라 내 땅의 동포들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북받쳤다.

30여분을 더 날자 평양에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왔고, 옅은 안개 사이로 보이는 평양은 이름 그대로 지평이 평평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양공항 주변으로는 잘 정돈된 규격화된 농지들과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양공항에 착륙해 입국수속을 진행하는데 여행사에서 안내받은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간단히 진행돼 베이징에서의 복잡하고 짜증스런 입국수속과 대비를 이뤘다. 평양공항은 원래 순안공항이라 불렀는데, 최근 이름을 바꾸고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현대적이고 깔끔한 공항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규모가 좀 작을 뿐 매우 깔끔하고 잘 정돈돼 있어 자꾸만 베이징공항하고 비교가 됐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니 이미 평양 현지의 조선국제여행사 안내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유일한 해외동포인 줄 알았는데 프랑스에서 오신 여성이 한분 더 있었다. 필자가 속한 그룹의 3박4일을 함께할 안내원 동무들과 공항에서 한민족끼리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포들을 뜨겁게 환영한다는 그분들의 말씀엔 진정성과 따뜻함이 가득했고 우리는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 평양공항에 마중 나온 안내원 동무들과 함께

여행사에서 준비한 관광버스를 타고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한산했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돼 있었다. 길가엔 개나리와 벚꽃이 피어 있어 평양에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고, 평양시내가 가까워지자 인도에 사람들이 많이 보여 시 외곽과 다른 활력이 느껴졌다. 평양시내로 들어설 때 첫눈에 확 들어온 건 TV방송탑과 유경호텔이었다. 이어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만수대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동상을 볼 수 있었다. 호텔에 가기 전 개선문과 인민대학습당을 잠깐 들렀다가 저녁을 먹었다.

음식들은 코스요리 같았는데 전채류가 먼저 나오고 마지막으로 밥과 국이 제공됐다. 음식들은 맛이 대체로 담백했는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들이선지 김치도 맵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맛과 약간 단 듯한 느낌이었다.

▲ 저녁식사 전채요리들과 식당 벽에 걸려 있는 ‘가화만사성’ 액자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양각도 국제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양각도는 서울 여의도처럼 수도인 평양 대동강 중간에 있는 섬이다. 호텔 고층객실에선 평양시내의 주요 건축물 대부분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호텔은 47층 건물로 꼭대기 층엔 회전전망식당이 있고 1층엔 커피숍, 식당, 맥주집이, 그리고 지하엔 수영장, 목욕탕, 노래방, 이발, 미용, 안마실 등이 있었다.

▲ 양각도 국제호텔, 호텔에서 내려다본 평양시내, 호텔 침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47층 전망대 식당에 올라가 맛 좋다는 대동강맥주를 한잔 시켰다. 조금 있으니 우리 그룹의 멤버들이 우르르 올라와 갑자기 그룹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대부분 평양이 처음이었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데릴은 2년 전에 이어 두 번째란다. 데릴은 2년 전하곤 또 다르게 변하고 발전한 평양 모습을 확인한다며 그때보다 훨씬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소감들과 기대감을 나누며 마시는 대동강맥주는 톡 쏘는 맛이 너무 좋아 꽤 많이 마셨다. 

4월7일 토요일, 둘째 날 – 평양 시내관광 

평양에서의 둘째 날이자 조선에서 첫 아침을 맞았다. 날씨는 계속 쌀쌀했지만 내일 달리기를 위해서 몸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했다. 새벽까지 대동강맥주를 마시느라 몸은 약간 무거웠지만 6시에 호텔을 나서 주변의 강가를 따라 5km 정도를 뛰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하는 평양시민들,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산책하는 나이 드신 어른들,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평양시민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인사를 받아주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안개가 걷히면서 대동강 위로 아침 햇살이 잔잔하게 흐르는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여기가 평양이란 걸 알려주는 건 멀리 보이는 주체탑과 유경호텔의 모습뿐 여느 다른 도시의 주말 아침과 다를 바 없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호텔 1층 식당에서 속풀이로 콩나물국을 겸한 아침을 먹었다. 로비는 시내관광을 나가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들이다.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한결같이 “사실 오면서도 너무 경직된 사회가 아닐까 염려와 걱정이 좀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모든 게 다르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밝아서 좋다”고들 말한다.

오늘은 종일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주요 관광지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평양엔 유명한 건축물들이 많았고 시내 중심을 흐르는 대동강과 주변의 자연 풍경이 아름다운데다 도시를 잘 꾸며 놓아 다른 나라 수도와 견줘도 전혀 기울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도 아름답고 멋지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날 버스로 찾아간 유명 시설들은 이렇다. 만경대생가,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 노동당 기념탑, 인민대학습당, 평양 개선문, 만수대 의사당과 동상, 인민문화궁전, 천리마 동상, 조국해방전쟁승리 기념관, 김일성경기장과 평양지하철. 빡빡하게 돌아보았다. 

시간이 짧아 가보지 못한 곳들도 많았는데 금수산 태양궁전, 유경호텔, 모란봉극장, 3대혁명전시관, 만수대예술극장,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국통일3대 헌장 기념탑 등 모두 규모가 크고 예술적인 디자인이 돋보인다는 곳들이다. 다음엔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버스를 타고 유명 시설물들을 찾아다니는 틈틈이 거리를 걷고 있는 많은 평양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추세대로 휴대폰에 눈길을 주며 걷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안내원은 자기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조선 내에서 자체 생산한 스마트폰 보급률이 매우 높고, 특히 젊은이들 같은 경우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고 말해줬다. 거리 곳곳에서 만나고 확인하게 되는 시민들의 웃음소리와 환한 얼굴들이 행여나 하며 걱정하고 무거울 것 같았던 마음속 불안감을 가셔주었다.

오후에 남한의 전쟁기념관과 비슷한 곳 ‘조국해방전승기념관’을 관람했다. 대단한 규모로 건설된 기념관은 여군 안내원이 관람객을 이끌며 설명했는데 기념관 정문을 통과한 뒤 좌우로 펼쳐지는 실감나게 제작된 10개의 전쟁 조각품들이 도열해 있고 그 뒤쪽에 전시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승기념관에선 야외촬영만 허가돼 건물 내부를 촬영할 순 없었다.

전승기념관 정문 오른쪽에 있는 인공호수엔 1968년 나포된 미국의 ‘간첩선’ 푸에블로(Pueblo)호가 실물로 전시돼 있었다. 원산 근해에서 첩보행위를 하다가 조선해군에게 나포된 배를 이곳에 전시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간첩행위와 조선에 대한 적대행위를 나포당시 압수한 첩보장비와 여러 증거물들이 고발하고 있었다. 전승기념관엔 항일무장투쟁 때부터 역사적 기념물들과 전시실을 갖추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은 금지됐다. 여러 전시시설 중 특징적인 곳은 4층에 있는 360도 회전 입체화면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대전해방작전’을 연출한 전시관이었다. 이 특별전시장은 대형 전쟁터 모형과 입체적인 동영상과 효과음으로 마치 실제 대전전투를 바로 앞에서 경험하듯 전시해 놓았다.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당시 조선의 피해는 엄청났다. 특히 전쟁말기 평양은 거의 매일 미군의 융단폭격 공습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43만 여발의 폭탄을 평양에 투하했는데, 이는 당시 평양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고 한다. 이런 파괴와 이후 몇 십년간의 제재와 봉쇄, 그리고 적대행위 속에서 오늘날 평양을 이렇게 건설해온 조선 동포들의 ‘자력갱생의 의지와 자주적 실천’이 그저 놀라웠다. 

오후엔 평양의 지하철을 타볼 기회가 있었다. 영광역에서 타서 개선문에서 내렸다. 짧은 구간의 두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었는데, 승차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여태껏 타본 지하철 중에서 제일 깊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하철 역사는 김일성 주석 벽화로 깔끔하게 잘 꾸며져 있었고 지하철 차량들은 약간 구식으로 보였지만 지하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기운차 보였다. 공장에서 3교대 근무를 마치고 퇴근한다는 한 노동자는 “동포와 만나 반갑다”며 선뜻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내일 즐겁게 달리고 평양을 잘 구경하고 가라”고 인사를 건넨다. 말이 통해 더 정겨운 평양 동포들이 그저 감사했다. 

이날 마지막 일정으로 평양시민들의 먹거리와 쇼핑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슈퍼마켓에서 쇼핑시간을 가졌다. 슈퍼마켓의 이름은 광복지구상업중심이란 곳이었는데, 중국식 표기처첨 느껴졌다. 마켓 입구의 환전소에서 조선돈으로 환전해 들어가 본 내부엔 식료품, 기호식품, 술, 공산품, 가전제품 등 일반 생활과 관련한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소주 큰 병의 가격이 조선돈으로 1만9400원(2달러가 좀 넘음)이었는데,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2500원 정도여서 필자가 사는 곳과 비교해보면 매우 싼 가격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곳 역시 사진은 안 된다고 해서 촬영을 할 순 없었다. 

▲ 평양지하철 티켓과 광복지구상업중심 영수증

저녁식사 후 다시 호텔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대동강맥주를 한잔 마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평양시민들이 사는 아파트마다 불빛이 반짝이는 평양의 밤은 아름다웠다.

4월8일 일요일, 셋째 날 – 평양마라톤 

드디어 마라톤을 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 4시반부터 일어나 달리기 옷차림을 준비했는데 날씨가 추워 옷을 몇 벌 입을지 고민하다가 일단 두 벌을 챙겨가 기온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기온이 낮았는데 날씨는 맑았다. 아침식사 뒤 마라톤 출발장소인 김일성종합운동장으로 이동했는데 주변엔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평양시민들이 가득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어쩌다가 외국선수단의 맨 앞에 자리하게 돼 경기장 입구에 있는 동안 안쪽 경기장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관중석엔 5만 평양시민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관중석 구역별로 응원을 이끄는 치어리더의 몸짓에 맞춰 337박수 응원전을 펼치며 박장대소하며 웃고 즐기는 소리들로 떠들썩했다. 8시30분 운동장 출입구를 따라 운동장으로 들어서는데 5만 관중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가슴을 뛰게 만든다. 경기장 가까이 앉은 동포들에게 연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얼마나 소리 높여 외쳤는지…. 그렇게 많은 평양시민들을 만난 것도 대단한 경험이었다. 관중들은 9시에 마라톤 참가자들이 출발한 뒤엔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축구경기를 관람한다고 했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바람이 좀 잦아들어 웃옷을 한 벌 입고, 그 위에 싱가포르에 사는 후배가 만들어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마라톤복을 입었는데 이게 나중에 화를 불렀다. 출발 전에 여행사에서 통일기를 달고 뛰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를 해 한반도기는 달고 뛸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마라톤을 다 뛰고 골인지점에서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작은 통일기를 허리에 차는 가방에 챙겼다. 또 다른 제약은 경기장으로 돌아와 다시 평양시민들을 만나려면 마라톤을 4시간30분 안에 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상식 진행을 위해 그 시간 이후로는 경기장 출입문을 닫아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14시간의 시차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정해진 시간 내에 달려야 평양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는 부담감이 무겁게 작용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뛰는 수밖에….

9시 정각에 출발 신호가 울렸고 조선의 초‧중‧고‧일반부 육상선수들과 해외 참가자들이 경기장문을 나서 바로 앞 개선문을 지나 42.195km를 달리기 위해 평양시내로 힘차게 내달렸다. 거리에선 아침 찬바람에도 평양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박수와 함성으로 응원을 보내주고, 아이들은 길가에서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을 내미는 모습이 다른 도시의 대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평양의 명소들과 고층 아파트들을 지나 외곽으로 나서자 날씨가 나빠졌다. 21km 반환점은 평양시내 외곽의 대동강변이었는데 반환점을 돌 때부터 눈보라가 날리고 바람이 거세져 몸을 앞으로 내보내기조차 어려웠다. 바람이 너무 차서 뛰는 동안 추위를 계속 느꼈는데 급기야 30km 지점에서 저체온증 증상이 나타난다. 기력도 없고 졸리고 정신이 몽롱해져 발을 앞으로 내딛지만 자꾸 헛딛는 느낌이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걸으면서 갖고 있던 에너지젤을 먹었는데 급수대가 없는 곳이라 물을 마시지 못해 갈증이 너무 심했다. ‘4시간30분 내에 뛰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옷을 한 벌 더 입지 않은 후회를 잔뜩 하면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멀리 급수대가 보였다.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나서야 기운이 좀 회복돼 눈발 날리는 평양거리를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막바지에 시민들과 아이들의 박수와 응원이 힘이 됐다. 개선문을 돌아 경기장으로 들어서기 전 허리춤에서 통일기를 꺼내 들었다. 조그만 깃발이었지만 평양시민들의 환호와 엄청난 함성과 박수가 골인 전 경기장을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던지…. 그 순간의 감격은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트랙을 돌면서 관중석의 동포들에게 외쳤다. “반갑습니다. 저 조선사람입니다. 우리 꼭 통일합시다!” “조국통일!”을 외쳐주는 동포들의 함성에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떨구며 결승선을 밟았다.

4월9일 월요일, 넷째 날 – 평양을 뒤로하고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원래 아침 10시에 이륙할 예정이었다. 안개가 평양주변에 짙어 40분 정도 출발이 지연됐다. 짧은 평양체류가 너무도 아쉬웠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나흘 내내 친구가 돼준 이남철 안내원 동무와는 의형제를 맺었다. “형님, 꼭 다시 만납시다!” 인사를 건네는 그와 깊은 포옹을 나눴다. 언제라고 약속은 못하지만 꼭 다시 만나기로 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마라톤이 아닌 평양행을 준비해 다음엔 더 오래 머물며 다른 곳도 찾아보기로 다짐하며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의형제 동생 이남철 안내원 동무와 건배, 그리고 마지막 날 평양공항에서 안내원 동무들과 가념촬영. 

이번 평양행을 통해 몇 가지 느낀 점은 우선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이 많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폐쇄된 사회, 또는 자유롭지 못해 살기 어려운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 평양을 다녀오며 잠시 머문 중국과 비교할 때 개인 소감이지만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평양시민들의 삶을 깊숙이 접해볼 수 없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평양의 동포들은 거리를 힘차고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고, 일상의 모습들도 남한이나 중국이나 캐나다의 모습과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동포들은 편안하고 환한 표정이었으며, 잠시지만 같이 얘기를 나눌 때엔 친절하고 상냥했다. 

또 폐쇄된 사회라서 바깥세계와 교류할 인터넷이 차단돼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중국도 인터넷에 대한 통제와 차단이 거의 조선과 비슷한 수준처럼 보였다. 중국에서도 스마트폰을 통해서는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에 접속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메일(Gmail)이나 핫메일(Hotmail)도 차단돼 호텔과 공항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들에 비춰보면 조선의 인터넷 통제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짧은 생각에, 조선은 인터넷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나 미국의 할리우드 등을 통한 문화제국주의적 침투와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의 사회와 인민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끝으로 이번에 직접 확인한 평양거리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생지옥”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조선은 다른 사상을 배경으로 다른 시스템 속에 당당한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반도에 이미 꽃피는 봄은 왔지만 분단의 겨울은 아직도 서로를 춥고 아프게 하고 있다. 조만간 진행될 남북정상회담이 따뜻한 봄바람이 돼 분단의 겨울을 걷어내고,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고 왕래하는 통일된 한반도의 봄을 일구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통일된 조국의 서울에서 평양으로, 아니면 평양에서 서울로의 마라톤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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