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30)

▲ 보천보 전자악단 앨범

“로동당시대 사회주의건설의 대전성기로 빛나게 아로새겨진 위대한 김정일 시대를 가장 아름답고 생동한 감회와 추억 속에 감명 깊게 되새겨보게 하였다”고 평가를 받은  ‘추억의 노래’ 특별공연이 2015년 2월 광명성절 3주년을 기념해 대동강 수변무대에서 열려 큰 화제가 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창단돼 한 시대를 풍미하며 ‘우리식 전자음악’의 시대를 열었다는 국보급 예술단체인 만수대예술단 녀성기악중주단,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예술단 소속의 명배우와 연주자들이 출연했다. 매회 매진 관객을 동원하며 결국은 연장 공연까지 한 이 공연은 10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창건 70돐경축 1만명 대공연 《위대한 당, 찬란한 조선》’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주역으로 출연한 이들이 바로 보천보전자악단의 신화로 남은 성악가 김광숙, 전혜영과 윤혜영, 리분희, 조금화, 리경숙, 그리고 작곡가로서 김일성상계관인이자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리종오이다. 

보천보전자악단은 “전자음악을 우리식으로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구상과 정력적인 지도밑에 자라난 주체음악 창작과 연주형상의 본보기집단”으로 만수대예술단의 전자음악연주단을 분리해 조직됐다. 1985년 6월4일 보천보전투 승리 48돐을 기념하며 결성됐다.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과 사회주의애국주의정신으로 무장된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들은 군대와 인민들에게 몇 백만톤의 쌀보다 더 귀중한 것을 주었으며 우리 시대 인간들을 신념과 의지의 강자, 미래에 대한 숭고한 사랑과 확신을 간직한 혁명적 낙관주의자로 키워주었다”고 평해지고 있다. 

그 시작은 당연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음악적 소양이 깊고 특히 예술부문에서 조직사업을 주도한 김 위원장은 새 시대에 걸맞는 음악적 형식과 구성을 고민했고, 만수대예술단의 기악소조를 단초로 해 경음악과 전자음악을 돌파구로 삼았다. 

당시에는 조일관계도 좋아서 대부분의 전자악기가 일본으로부터 들어 갔다. 야마하 같은 경우 키보드를 판매하면 그 악기의 사용법을 가르쳐주는데 그 과정에서 기초적인 전자악기의 활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수준은 기대치 이하였을 것이고, 결국 장룡식을 단장으로 한 연수단 일행이 비공식적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1985년 나고야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진 연수에선 당시 일본 최고의 대중 예술인이 참가했다고 알려졌다. 복수의 증언에 따르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에다 노리오이다. 마에다 노리오는 재즈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피아노 트리오 W3과 윈드 브레이커즈를  이끌었고, 도쿄필하모니 교향악단의 팝 부문 감독으로 활동하며 연주 외에도 편곡과 지휘에 능했던 인물이다. 1981년 도쿄음악제 최우수 편곡상과 1983년 레코드 대상 최우수 편곡상을 수상해 당시에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이 된다.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가 바로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영화음악가인 사카모토 류우이치이다.  도쿄예술대학 재학 중에 뮤지션으로 데뷔한 그는 1970년 후반 솔로와 kylyn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음악그룹 <옐로뮤직오케스트라((YMO)>로 인기를 얻었다. 테크노 팝, 뉴 에이지, 월드뮤직, R&B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으며, 팝 오페라 작곡 및 프로듀싱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영화음악으로 일본인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상 작곡상을, 1987년 <마지막 황제> 영화음악으로 일본인 최초의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했다. 1989년 제31회 그레미상 최우수 OST 앨범상을 수상했다. 실제 YMO는 1978년 결성됐는데, 중국 인민복을 입고 공연하는 등 당시 공연 구성과 음악이 보천보전자악단을 연상케 한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연수단에 참가한 대표적인 인물이 고 김광숙의 남편인 전권이다.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인 전동우의 아들이기도 한 전권은 평양음악대학 출신으로 모스크바음악대학을 유학하고,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입상한 쟁쟁한 경력의 피아니스트였다. 또 대학 시절부터 절대음감과 탁월한 작곡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이후 연수단이 귀국해 일본에서 습득한 기교와 자본주의 음악의 장점을 수용해 한층 향상된 연주실력을 보일 즈음, 1988년 9월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들을 불러 목란관에서 공연을 열었고 큰 호평을 받았다. 초기 만수대예술단의 전자음악 소조라는 이미지로 소규모의 낮은 수준의 연주 실력에 머물렀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악기 편성과 연주자의 기량도 한층 세련돼지고, 그 수준도 높아져 북측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이때가 비로소 음악적으로 보천보전자악단의 시작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의 신화를 이끌었던 주역은 단연 작곡가 리종오와 성악가인 김광숙과 전혜영이다. 

리종오 작곡가는 음악대학 시절부터 플루트의 명수로 유명했다. 그래서 추억의 노래 공연에서 영상이 나온 것이다. 대학 작곡학부 교원 시절에는 여성기악중주단을 조직해 지도하기도 했다. 만수대예술단을 거쳐 보천보전자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작곡과 지휘를 겸했으며, 보천보전자악단 해산 후 다시 만수대예술단으로 복귀해 단장을 맡기도 했다. 북측 최고의 대중가요 작곡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인격자로서 단원들과 음악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말년에는 국립민족예술단 작곡가로 활동했다. 

새로운 음악을 전파하기 위해 당연히 창작은 기본이었다. 당시 감각이 있고 실력이 출중한 작곡가들이 보천보전자악단으로 모이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모란봉악단에서 부단장을 맡고 있는 인민예술가 황진영이다. 당시 피바다가극단의 작곡실장이었던 인민예술가 강기창의 증언에 따르면 황진영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에서 타악기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독학으로 작곡을 배우고 있었다. 피바다가극단 작곡실에서 함께 할 것을 권유하자 황진영은 영화음악을 하고 싶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1989년 상영된 예술영화 <도라지꽃>에 작곡자로 참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목을 받아, 김 위원장의 지시로 보천보전자악단에 배치가 됐다. 

그 외 1990년대 보천보전자악단의 황금시대를 꾸려간 작곡가들의 면면은 아래와 같다. 인민예술가 구승해, 현 모란봉악단 창작실장이자 인민예술가인 우정희, 삼지연관현악단 내한공연으로 국내에 알려진 모란봉악단 창작실 부실장이자 인민예술가인 안정호, 인민예술가 전권, 공훈예술가 전민철 등이 대표적이다. 

1986년 “도시처녀 시집와요”로 유명한 인민예술가 김광숙이 입단했다. 1988년에는 "휘파람"으로 남북 모두에 널리 알려진 인민예술가 전혜영과 "반갑습니다"로 유명한 리경숙이 입단을 한다. 그 뒤를 이어 “내 나라 제일로 좋아”의 리분희와 조금화, 윤혜영, 현송월 등이 입단하면서 최강의 라인 업을 구축하게 된다. 이 전통을 이어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청봉악단의 김옥주, 김향미, 김성심, 리류경과 모란봉악단의 리옥화와 리설주 여사가 여기 출신이다. 

▲ 북 가수 김광숙[사진 : 유튜브 캡처]

북측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김광숙(1964년 생)은 ‘맑고 은방울 같은 목청을 가진 고음가수’로서 ‘민성’과 ‘양성’을 두루 잘하는 ‘본보기’ 가수이다. 특히 무대에서 풍부한 표정과 제스처를 지닌 김광숙은 “빛나라 정일봉” 등 송가뿐만 아니라, “꽃피는 봄날에” 등 혁명가극의 노래, “영천 아리랑” “황금산타령” 등의 민요, “도시처녀 시집왔네” 등의 생활가요까지 만능가수로 유명하다. 그녀가 부른 “생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노래로 고전적 명곡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광숙과 전권의 중매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고, 김 위원장이 결혼식까지 참석할 정도의 국보적 가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학생소년궁전 성악지도교원으로 활동하다 서거한 김광숙을 애도해 2018년 1월14일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김광숙의 대표곡으로는 '생이란 무엇인가', '새별',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등이 있다. 

▲ 북 가수 전혜영[사진 : 유튜브 캡처]

김광숙이 생활가요를 대중에게 알렸다면, 맑고 우아한 목소리와 탁월한 가창력의 전혜영(1972년생)은 생활가요를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휘파람”(1990년), “여성은 꽃이라네”(1991년), “날보고 눈이 높데요”(1991년)가 대표적이다. 공연에 연기와 율동을 도입한 그녀는 마이크를 이용한 무대 매너 등으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특히 다재다능한 노래와 선곡으로 어느 무대에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생활가요는 물론이고, “우리의 김정일 동지” 등 송가와 “노들강변” 등 민요, “나는야 꽃봉오리” 등 아동가요까지 팔방미인의 스타였다. 

1990년대 당시 인기 절정의 시대를 함께 했던 연주자들은 ‘추억의 노래’ 공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김문혁(신디사이저, 현 피바다가극단 작곡가), 권경학(신디사이저, 현 평양음악대학 교수), 전권(피아노, 현 왕재산예술단 당비서), 리문(엘렉톤, 현재 조선인민군공훈협주단 전자악단 기술지도원), 강철호(엘렉톤, 현 왕재산예술단 작곡가), 송광(일렉트릭기타, 현 금성 제1중학교 교원), 김영일(베이스, 현 문화부 군중문화국) 등이다. 이중 엘렉톤(전자오르간) 연주가 강금철은 어려서부터 손풍금 천재로 알려졌으며,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일본 공연 때에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이 우리에서 선 보인 것은 1991년 9월17일부터 10월27일까지 있었던 일본 공연에서였다. 공연은 북일문화교류협회가 주최하고 NHK와 아사히신문의 후원으로 도쿄, 센다이, 히로시마, 기타큐슈, 오사카, 교토, 고베, 히메지에서 열렸다. 2002년 목란 비디오사가 제작한 "반갑습니다"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노래는 일본 순회공연을 위해 창작된 노래이기도 하다. 

평양에서 나리타까지 고려항공 직항기로 입국한 보천보전자악단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친북 성향의 일본인들까지 공항을 가득 메웠고, 도심 곳곳에서는 공화국 국기가 휘날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일관계가 좋았던 시절로 카네 마루신(金丸信)이 악단에 전자악기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첫 공연은 센다가야 일본청년관 대공연장에서 시작됐다. 북측 노래와 일본노래 등 31곡의 본 공연과 5곡의 앵콜곡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본공연에서 불린 북측 곡은, 행복이 넘치는 내 조국(서곡), 아리랑(리경숙), 도시아가씨 시집와요(리경숙), 밀양아리랑(리경숙, 전혜영), 옹헤야, 장군별(김광숙),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김광숙), 저 언덕을 넘어서(김광숙), 오늘도 웃으면서 안녕하세요(김광숙), 처녀시절(전혜영), 어머니(전혜영), 휘파람(전혜영), 생이란 무엇인가(김광숙), 황금의 사과나무를 산에 심었네(김광숙), 여성은 꽃이라네(리분희), 엉겅퀴의 노래(리분희), 수확의 노래(조금화), 말을 할 수 없어(조금화), 너를 사랑하는(조금화), 군밤타령(조금화), 내 나라 제일 좋아(김광숙, 전혜영, 리경숙, 리분희, 조금화) 등이었다. 앵콜곡으로는 반갑습니다(리경숙), 사랑의 봄볕(김광숙),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와라(전혜영),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킨다(조금화), 친근한 이름(김광숙)이었다. 

1990년대를 관통한 보천보전자악단의 성공가도에는 이 시절 보급된 화면반주음악장(가라오케)과 화면반주기(노래방)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남측과 크게 다르지 않게 청소년과 대학생, 청년들이 주로 이용했는데, 당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일례로 청년중앙회관에 화면반주음악장이 문을 연 것은 1992년 12월14일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을 했는데, 일과가 끝난 시간과 휴일에는 줄을 서서 노래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민요와 생활가요, 통일가요, 애국주의가요 등 수백 곡이 담긴 화면반주기에서 역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전자음악이었다. TV에 나온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루의 수고를 달래곤 했던 것이다. 이때 인기가 많았던 곡이 “생이란 무엇인가”, “여성은 꽃이라네”, “휘파람” 등 대부분 보천보전자악단의 곡들이었다. 

▲ 북 '추억의 노래' 공연이 인민대극장에서 열렸다.(2015년)[사진 : 조선신보 제공]

잘 나가던 보천보전자악단은 2000년 후반부터 사양길에 들어선다. 내적으로 소조 활동이 활발했고, 2010년에는 “돌파하자 최첨단을”을 발표하는 등 재기의 몸부림도 있었지만 결국 2013년 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발전적인 해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란봉 소조는 모란봉악단으로, 소백수 소조는 은하수관현악단으로 이어졌다고 알려졌다. 그렇지만 당시 사건이라 불릴 만큼 획기적인 변화의 주역이었던 보천보전자악단은 음악으로 살아 그 레퍼토리는 현재에도 다양한 형태로 편곡 연주되고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은 인민이 사랑하는 시대적인 명곡과 국보적인 노래를 수많이 창작하고 노래했다.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경례를 받으시라” “우리당이 바란다면” 등의 지도자에게 바치는 송가와 “사회주의 지키세” “우리의 총창우에 평화가 있다” 등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찬가, 그리고 “조선의 노래” “꽃파는 처녀” “진달래” “녀성해방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 등의 고전적 명작 특히 혁명가요와 민요를 시대적 미감에 맞게 편곡한 노래들은 혁신의 수준이었고, “내 나라 제일로 좋아” “우등불” “아직은 말 못해” 등 일상생활의 감정을 노래한 생활가요를 새로운 장르로 안착을 시키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를 통해 보천보전자악단은 “주체의 음악예술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고 사람들을 사상정신적으로, 문화정서적으로 교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주체성과 민족성이 철저히 구현된 ‘우리식 전자음악’을 창조해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감성에 맞는 좋은 노래들로 한 세대를 풍미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인민들에게 사상정신적 량식을 준 보천보전자악단이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 앞에 세운 공로는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적처럼, ‘혁명적 문학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인 보천보전자악단은 혜성처럼 나타나 전설로 남은 ‘통속적’ 예술단체로서 북측의 음악사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도시처녀 시집와요 
http://www.youtube.com/watch?v=8Og0apk-K4w

처녀시절  
http://www.youtube.com/watch?v=wvGXzfr8M2Y

지새지말아다오 평양의 밤아
http://www.youtube.com/watch?v=r-Sy-iBHYJg

김광숙 – 샹송 “사랑은 푸르다 L'AMOUR EST BLEU
http://www.youtube.com/watch?v=UllgudMyiIg

김광숙 – 러시아 가요 백만송이 장미
http://www.youtube.com/watch?v=pDyXObyBHVc

조금화 “우등불”
http://www.youtube.com/watch?v=gE7OiyQE4es

리설주 “ 아직은 말못해”
http://www.youtube.com/watch?v=bMlZsqMao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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