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세기 미·일의 조선침략사(1)
1. 19세기 미국은 조선을 침략한 게 아니라 교역을 원했을 뿐이라고?
1866년 셔먼호의 대동강 침입부터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까지 모두 전형적인 미국 포함외교다. '포함(砲艦)'은 해상군사력을 의미한다. 또 포함외교란 수교와 교역을 하자면서 전열함 전함 등을 앞세워 약소국에 무력시위를 하며 외교를 강요, 압박한다는 것을 말한다.
스페인의 대항해 성공 이후, 유럽은 경쟁적으로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확장한다. 강력한 해군력은 국력을 뒷받침해주는 필수요소가 됐다. 산업혁명 이후 범선은 증기선, 철갑선으로 대체됐으며,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은 국가들의 해안 방어로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결국 두려움에 가득 차 서구 국가들의 '통상'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왜 구미 열강은 노골적으로 식민지를 점령하여 약탈하는 대신 ‘통상’과 ‘교역’을 요구했을까? 식민지로 점령해 다른 열강들에게 긴장을 유발하고, 식민지 치안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공업제품을 비싸게 팔고 원료를 싸게 가져오면서 폭리를 취하는 편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신식민지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배웠지만, 사실 식민 지배의 형태는 19세기부터 다양했다.
이제 조선 이야기로 돌아오자,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교역 좀 하자는데 문을 아예 걸어 잠그니, 결국 침략 명분만 준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포함외교 자체가 침략이었다.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의 침입 이후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의 반외세 항전에 눌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갔지만 우리 역사가들은 ‘미국이 처음부터 침략의도가 없었었기에 철수한 것 아니냐’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필자는 앞의 칼럼에서 미국의 조선 침략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당시 아시아 정책의 필연적 산물임을 주장했는데, 근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미·일의 결탁과정을 좀 더 다뤄야 할 것 같다. 원래는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정리하려 했지만 모든 과정이 외세에 의해 굴절됐음을 알게 되니, 이를 좀더 세밀히 분석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이때나 지금의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문제는 너무 유사하다. 현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시, 자주와 통일과정과 맞물린 하나의 문제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며 외세에 대해 치열한 이해가 필요하다.
2. 18세기 조선인근에 출몰했던 이양선들의 실체
조선에서 이양선에 관한 기록은 17세기부터 나타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잉길리’ 선박이 영흥 앞바다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1614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캡틴이 에드먼드 사리스를 일본 대마도로부터 조선 연안으로 보내 직물시장 개척 가능성을 조사시켰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19세기에는 이양선은 수 없이 많아져 조선 해안 측량, 교역 요구, 구조 등을 요청했다. 조선 공식 기록만 35회에 이르나 실제는 훨씬 더 많다. 1848년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대양 가운데에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이 많다. 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 기록했다. 미국 선박의 첫 기착은 1853년(철종 4년) 부산 용당포 앞바다였고, 1855년 6월 강원도 통천에 미국 선원이 표착한 적이 있다.
이무렵 미국은 막 독립(1789년)해 서부 진출에 열중하면서도 18세기 말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시작했다. 미국은 13개 주로 이뤄진 대서양 연안국가로 출발해, 태평양으로 직항할 수 없었고 대서양을 남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광주로 가서 청과 무역했다. 주요 수출품은 면이었는데, 청에 대한 수출이 20%가 넘었다. 미국 자본가 로버트 모리스 소유의 차이나호는 1784년 청나라 광주 상륙 첫 시기에만 순이익으로 4만 달러를 벌었다. 1789년까지 광주무역에 종사한 미국 상선만 15척 이상으로 영국의 61척에 비하면 작지만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1844년 미-청 망하조약 체결 후 무역량은 더욱 늘어났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의 해양 진출은 단지 무역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1712년 향유고래 기름이 양초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 19세기까지 포경산업은 현대 석유 유전산업에 필적할 만큼 급부상했다. 향유고래 한 마리에서 최고 1만 리터까지 기름을 추출할 수 있다. 이 고형물 형태의 경뇌유는 고품질 윤활유로 쓰인다. 1856년 최초의 석유발견 때까지 향유고래 잡이는 대규모 기계 생산의 원동력으로 185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5대 유망 산업 중 하나였다. 데릭 톰슨이 쓴 <미국 포경산업 흥망사>에 따르면 1840년대 미국 포경선단은 640여척으로 전 세계 포경선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 캘리포니아 등 멕시코 영토의 40%를 빼앗아 태평양 연안국가로 등장한다. 미국의 아시아 교역 전망이 비약적으로 강화된 것은 물론, 포경산업도 태평양에 진출한다. 미국의 포경선은 하와이 왕국의 호놀룰루를 기점으로 해 태평양 동부는 물론, 킴차카 반도, 일본 근해, 동해에까지 진출해 고래를 잡았다. 포경선을 보호하는 것도 미국 정부의 주요 과제였다.
특히 미국이 태평양 연안국가가 된 뒤 태평양을 거쳐 청으로 직행하는 항로를 개척하려 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로는 중간지점에 기선에 연료를 보급해줄 석탄 공급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당시 기선은 대개 일주일치의 석탄만 적재할 수 있었다. 청은 4억 명이 넘는 인구를 갖고 있는데다 교역량으로 봐도 이미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였으므로 기대되는 시장이었다. 이런 중국시장으로 가는 태평양 항로의 안전과 태평양 포경업의 발전을 위해 일본을 개방시켜 항구를 이용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중요한 과제였다. 이런 전체적인 과정을 위한 미국 국가 차원의 아시아 정책이 필수적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3. 미국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국가차원의 정책 마련과정
미국이 아시아 진출을 위한 국가적 대책을 세우게 되는 것은 1832년부터이다. 대선주 에드몬트 로버트를 국무성 특별사무관으로 해 첫 아시아 특별원정대를 파견한다. 임무는 인도양 연안국에 대한 불평등 통상 조약 강요와 태평양 연안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1833년 5월 “일본과 통상교역의 길이 열려지게 된다면 장래 조선과의 교역의 가능성도 있다”는 결과 보고서를 내며, 이를 바탕으로 1835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인도 전대’를 조직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훨씬 더 구체적인 조선 관련 문건이 발견된다. 1845년 2월 미 의회 하원 28차 본회에 해사 위원장 쟈독 프라트는 조선 ‘개방’ 문제에 관해 “우리들의 상업적 투자와 인원을 은둔국 조선의 항만과 시장에 파견할 때가 왔다”면서 조선을 개항하려는 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의 책동이 조선의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에 의해 모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조선에 대한 유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조선 개항은 불가능하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캘리포니아를 획득하기도 전에, 이런 결의안이 제출될 정도이니 1848년 태평양 국가가 된 후 조선의 개항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1848년 5월 미국 하원 해군위원회 토마스 킹 의원은 중국에 대한 면 수출이 앞으로 영국을 능가할 것이므로 태평양 항로 개설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태평양 횡단 기선항로를 선정한다는 것은 기항지뿐 아니라 전략적 거점 중계기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사령관 가쯔가이슈는 <개국기원>이란 책에서 ‘1850년을 전후한 시기의 미공문서.... 미국은 일본과 통상하는 길을 열고, 조선과 무역하여 조선을 미국이 바라는 샌프란시스코와 상해 및 관동 통로를 연결하는 안정적인 석탄 보급기지로 만드는 것이 궁극 목적’이라고 했다.
또 미국 기업가 아론 플리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건의서에서 ‘우리는 상해에서의 우월권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해는 위치도 유리하고, 최대급 배들이 들어갈 수 있는 안전한 정박지가 있으며, 양자강 입구에 있다. 또 조선과 일본에 이틀이면 가 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상해가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 파나마와 중국을 연결하는 미국 기선의 저탄소, 기항지로서 중국의 전체 항구들에 비해 입지조건이 좋다’고 했다. 미국은 먼저 일본부터 개방하기로 하고 1853년 동인도함대 페리를 보내 첫 포함외교를 개시한다. 조선에 대한 포함외교는 시간문제였지만 1860년대 전반기, 미국 남북전쟁으로 아시아 공세를 잠시 지연하게 된다.
남북전쟁 후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서둘렀다. 유럽 열강들에 의해 아시아 식민지 분할이 거의 끝나고 있을 때, 아직 유럽의 마수가 미치지 않고 있던 청나라 북동부에 저들의 침략기반을 구축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조선은 러시아와 청을 연결하는 아시아 대륙의 관문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부장관 시워드 “우리들은 아시아대륙에 연락지점, 즉 식민지 영토 같은 것의 필요성에 직면했다”(<태평양에서의 아메리카 팽창의 시기>)고 주장했다. 러시아 주재 미국공사 클레이는 “장래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치 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육해군이 의지할 기지가 필요하다.... 지중해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브롤터와 같은 전략적 거점으로서 조선 남해 거문도를 선택하고, 미국 육해군의 아시아 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제기했다(<짜르 궁전에서의 켄터키인>). 1852년에 페리가 쓴 해군대신 보고서의 ‘거점 기지’가 여기에서는 명백히 ‘식민지 영토, 즉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기지, 전략적 거점’ 등으로 침략 의도가 더 적나라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1860년대 이후 미국의 조선 침략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음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것이 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침입해 전형적인 포함외교로 조선의 교역을 강요하기까지 전사이다.
19세기 미국의 아시아 침략은 미국 자본주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 과정이었으며 그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강제적 개항은 필수 코스였다. 1871년 전면적 조미전쟁에서 조선 개항에 실패하고 물러갔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은 1854년 페리의 포함외교로 한방에 미국에 항복한 일본을 활용해 다시 조선에 기어들 방안을 모색한다. 조선에서의 몇 번의 실패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을 노골적으로 돕기 이전에도 다양한 방식의 조선 침략이 이뤄졌다. 1871년 신미양요까지 미국의 시도가 무력화되는 과정은 몇 번 다뤘으므로 다음에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살펴보고 다시 미국과 일본의 결탁과정을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