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 현실

레닌은 신문 <이스크라>를 통하여 당과 대중, 해외와 국내를 연계하려 했다. 그 매개자가 곧 볼셰비키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자주적 인간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멘셰비키도, 레닌을 따르는 볼셰비키조차도 레닌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닌 시대에 자주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레닌은 좌우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기의 개념에 형태를 부여했다. 그것이 레닌의 비판적 논쟁의 열정이었다.

해외망명에서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오기까지 레닌은 또 하나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것은 러시아 사회에 적절한 혁명 전략을 세우는 투쟁이었다. 그 결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연속혁명’이라는 개념이었다. 연속혁명이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연속적으로 압축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서유럽에서와 같이 이미 자본주의 체제가 확산한 사회에서 혁명의 전략을 세웠다. 마르크스는 민주주의를 통한다면 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사회주의로 평화적인 이행도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현실은 달랐다. 러시아는 도시에서는 자본제적 산업이 발전하여 이미 아류 제국주의화하고 있으나, 광범위한 농촌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인 장원이 지배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소수였을 뿐 농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회 곳곳에 봉건사회의 체제와 관습이 남아 있었다. 차르의 전제정치와 귀족의 특권, 종교의 착취,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했다.

이런 사회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될 수 있을까? 무정부주의자, 인민주의자는 그걸 믿고 싶어 했지만 레닌은 이를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 생각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일단 부르주아 혁명으로 나갔다가, 부르주아 사회가 마르크스가 예견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사회주의로 나가면 되지 않는가? 즉 단계적 혁명론이다.

2) 단계적 혁명론

단계적 혁명론은 초창기 러시아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지지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멘셰비키도 이런 2단계 혁명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1차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면 임시정부가 세워질 텐데, 프롤레타리아는 임정을 부르주아 정치가에게 맡기고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자는 주장이다.

레닌은 적극적 행동주의자이다. 이런 단계론적 혁명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단계론은 사회주의 단계에 오기까지 넋 놓고 기다리자는 주장으로 들렸다. 즉 수동적 대기주의이다. 레닌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속에서 사람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두 가지 전략’이라는 레닌의 생각이 출현한다.

자본주의 체제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프랑스의 혁명적 길과 독일의 개혁(일본의 유신 등)적 길이다. 독일의 길은 관료-지주가 주도하는 길이다. 이런 길은 부르주아 사회가 되더라도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으니,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에 직면할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길은 혁명의 길이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길이니, 이 길이라면 사회주의 혁명의 길이 열릴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의 경우 부르주아는 너무 권력 의존적이므로, 결코 혁명의 길을 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부르주아를 통한 혁명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라면 혁명적 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레닌은 이 불가능한 과제를 노농동맹의 개념으로 풀어나갔다.

▲ 러시아 차르시대 농민들의 모습.[사진 : 구글 검색]

3) 노농동맹

다행히 러시아에는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에 대한 부르주아의 착취는 차르의 비호 아래 이뤄지므로, 차르를 증오한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여는 것이니, 노동자에게서 부르주아 혁명의 동력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농민 대중이 있다. 이들은 봉건제의 가혹한 착취 아래 있으니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를 획득하기를 갈망한다. 농민은 관료-지주가 주도하는 개혁의 길을 반대하고 차르를 타도하는 혁명의 길을 택할 것이다. 농민 역시 부르주아 혁명을 원한다.

레닌의 결론은 곧 노농동맹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이다. 여기서 동맹이란 말이 중요하다. 이는 일시적인 제휴가 아니라는 말이다. 노농동맹이란 말 속에는 농민에 대한 레닌의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담겨 있다.

당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농민은 토지를 획득한 이후에는 보수화될 것을 우려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에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이었다. 토지를 분배 받은 농민은 혁명이라는 모험의 길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복고의 온상이 되었다.

레닌 역시 농민이 토지분배라는 부르주아 혁명에 머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레닌은 동시에 농민에게 기대했다. 그는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믿었다. 이를 농민에게 충분히 계몽한다면 농민도 기꺼이 사회주의 혁명에 나서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품고 레닌은 노농동맹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압축적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했다. 이를 흔히 연속혁명(원래는 트로츠키의 표현)으로 부른다.

연속혁명과 노농동맹,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이며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레닌의 전략은 당과 대중을 적극적 활동을 통해 연결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활동으로 러시아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 보았다.

4) 소비에트 민주주의론

레닌의 연속혁명론으로부터 여러 파생되는 이론이 나온다. 이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에서 출현하는 임시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하려면 국제적인 동시 혁명이 발생해야 한다는 국제 혁명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민주주의론이다. 노동자, 농민이 주도하는 혁명, 압축적으로 사회주의로 진화하는 혁명을 위해서는 철저한 민주주의 국가가 출현해야 한다. 유럽에서 등장한 서구적 민주주의는 그런 철저한 민주주의에 미치지 못한다. 레닌은 그 대안으로 러시아 혁명 중에 출현한 소비에트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체제를 구상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 혹자는 로크적인 권력 분립체제가 아닌 루소적인 권력 집중제라는 것에 주목한다. 혹자는 대의원 수를 늘림으로써 직접 민주주의 성격을 강화했다고 한다.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관료제를 부정하고 자치를 강조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지역 대표라기보다 계급계층을 대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더 많이 주목한다.

하지만 이런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이 자리는 레닌와 마오의 혁명적 정신, 철학을 이해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 정신, 철학은 적극적 활동에 있다. 나는 이것을 자주성이라 부르고 싶지만 레닌은 그런 말을 몰랐다. 레닌의 끝없는 비판적 논쟁을 통해서 마치 시계추의 움직임처럼 이쪽저쪽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기의 철학에 구체적인 형태를 붙여나갔다.

5)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레닌의 노농동맹론은 러시아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임시정부(초기 자유주의자가 담당하다 곧 무너지고, 무정부주의적인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가 임정수반이 된다)는 농민의 요구를 묵살했다. 헌법상의 국가가 성립하면 그때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농민의 혁명적 열정이 폭발했다. 농민은 토지를 몰수했고 토지 상환금이나 지대를 강요하는 지주를 약탈했다.

레닌은 농민에 대한 사회주의적 정책을 갖고 있었다. 농민의 혁명적 봉기를 보는 순간 그런 사회주의적 정책, 즉 토지 국유화를 내버리고, 모든 토지는 경작하는 농민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통해 노농동맹이 확고하게 되었다. 11월7일 러시아 2차 혁명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레닌이 농민과 동맹을 맺었던 데 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은 식민지 해방투쟁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레닌은 식민지 사회에서도 노농동맹을 통해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자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식민지 사회에서 민족해방투쟁을 결합하여 국제적인 반제투쟁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레닌은 혁명이 일어나자 중국 등에 걸쳐 있는 구 러시아의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는 레닌의 이런 선언에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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