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남농민운동 보고서>

손문의 연소(聯蘇. 소련과 연합)·용공(容共. 공산주의 용인), 좌우합작 노선에 따라 1924년 국민당이 세워졌습니다. 마오는 광주 농민강습소에서 활동하던 중 농민의 혁명적 열정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손문의 북벌군이 1926년 7월 진격을 시작하자, 광주에서 무한, 남경에 이르기까지 도중에 있던 도시의 노동자와 농촌의 농민이 봉기했습니다. 마오는 이때 농촌의 농민혁명을 주도했습니다.

마오는 레닌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노농동맹을 수용하면서 그 위에서 농민혁명의 전략을 수립했지요. 이 시기 마오의 입장은 <호남농민운동 보고서>(1926년 8월)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인 계급인 토호열신, 무법지주들은 수천 년 동안 귀족 정부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제국주의와 부패한 관료제, 군벌의 초석을 이루었다. 이 봉건권력을 전복하는 것은 민족혁명의 진정한 몫이다.…”

마오는 농민의 90%에 달하는 빈농(자‧소작농)과 고농(雇農. 농촌프롤레타리아)을 중심으로 세우고, 모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며, 저항하는 지주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오는 여기서 “두렵다”거나, “너무 멀리가지 않는가”, “너무 무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당내 우파(진독수 파)의 비판에 대해 일일이 대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은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이나 수필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수예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적절한 한계가 초과되지 않고서는 바로 잡아질 수 없다.”

빈농과 고농, 토지 몰수, 지주 타도라는 개념은 모두 레닌의 노농동맹, 농촌소비에트 개념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레닌 역시 유사한 어조로 농민의 폭력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 도시 봉기의 전술

국민당 군대는 군벌연합체입니다. 이 군벌의 장교 대부분이 (소)지주에 속했으니 마오의 농민 혁명과 국민당 군벌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대립이 1926년 북벌이 시작되면서 농민이 토지를 몰수하자, 폭발하게 되었지요.

북벌군을 이끌던 장개석이 선수를 쳤습니다. 그는 1927년 4월에 상해 노동자를 학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장개석의 공격 앞에서 공산당에 호의적이었던 왕정위가 이끌던 국민당 좌파는 결국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장개석의 쿠데타 앞에서 공산당은 분열했습니다. 여전히 국공합작을 주장하면서 노동자, 농민의 봉기를 진정시키려 했던 진독수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이대조는 북경 군벌(오패부)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유학했던 구추백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급진적 노동자, 농민 혁명을 지지하던 공산당 좌파는 봉기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코민테른의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군벌이 지배하는 중심도시(남창, 광주, 장사 등)를 공격했습니다. 각 도시에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본받아 소비에트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의 봉기는 성급했습니다. 모든 도시 소비에트는 얼마 견디지 못했습니다. 1917년 전쟁으로 군대가 붕괴된 러시아와 달리 중국은 경쟁하는 군벌이 중국을 분할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군벌은 군대를 동원해서 도시 소비에트를 파괴했습니다.

▲ 1927년 추수봉기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갔을 당시 모택동(맨 왼쪽)[사진 : 구글 검색]

3) 정강산으로

마오 역시 초기에는 구추백의 봉기노선을 적극 지지했고, 그의 고향인 호남의 중심도시 장사에서 봉기했으나 패배했습니다. 마오는 다시 봉기를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탈출했습니다. 그는 늪지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맨발로 걸어 도주했습니다.

공산당 중앙본부에서는 여전히 장사를 다시 공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마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구추백이 지도하던 당 중앙은 마오에게 도주의 책임을 물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정강산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다르게 이해합니다. 혹자는 이미 이때 마오가 농촌 게릴라전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혹자는 그저 남아 있는 부대의 생존을 구하기 위해서 산으로 들어갔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 어느 것이든 정강산에 들어간 이후 마오는 전혀 새로운 길에 도달하게 되죠.

정강산에서 마오가 활동하는 과정을 보면 초기에 도시 봉기에서 실패한 공산당의 군대가 정강산으로 모여듭니다. 1928년 4월 주덕의 군대가, 그리고 그해 12월 팽덕회의 군대가 들어옵니다. 마오는 이 군대를 수습합니다. 이때 그는 군대를 민주화하면서 혁명군대로 재조직합니다. 그는 토지혁명을 수행하여 군대를 농민의 군대로 재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강산은 너무 협소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1929년 겨울 정강산이 있는 서쪽에서 주장강을 건너 동쪽, 즉 서금으로 건너갑니다. 이곳에는 넓은 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몇 백만 규모의 농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소비에트를 건설하죠. 마침내 1931년 11월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서금에서는 전 중국에 흩어진 소비에트 대표들이 모여 제1차 중화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치르게 됩니다.

4) 산이냐 유격전이냐, 근거지냐?

많은 사람들은 마오가 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정강산은 가보지 않아서 어쩐지 모르지만 높은 산일 테니 일단 도피하여 상황을 수습하는 데는 적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혁명의 생명인 대중이 없습니다. 산간오지에 처박힌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는 쉬우나, 혁명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상실하게 될 겁니다. 만일 마오가 정강산에 머무르기만 했다면 임꺽정 같은 의적이 되었을 겁니다.

나는 정강산보다 근거지라는 개념에 더 주목합니다. 혁명을 위해 마오는 다시 대중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산을 버리고 들판으로 나온다면 군벌의 군사적 공격을 받지 않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1930년 4월부터 31년 7월까지 무려 3차례에 걸쳐서 장개석은 서금 지역의 중화 소비에트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전개했습니다. 마오는 이때 그 유명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장개석의 군대를 파괴하고 소비에트를 지켜내죠.

그의 유격전이 탁월했기에 마오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런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군사적인 단기적인 관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장기적인 관점이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승리의 원인은 근거지에 있었습니다. 유격전도 이 근거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거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마오의 유명한 논문을 참조해야 합니다. <적색정권의 존재이유에 관하여>라는 논문입니다. 그는 여기서 군벌체제 아래서 소비에트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군벌체제의 모순 때문이라 말합니다.

군벌이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각기 중국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각기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았고, 봉건적 양반 지주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지역의 중심도시를 장악했으나 서로 대립하면서 시시때때로 내전을 벌였습니다. 마오는 이런 각 군벌과 군벌의 틈 속에, 서로의 지배력이 상대의 지배력에 의해 차단되는 곳에서 적색 소비에트가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5) 마오의 상상력

레닌은 러시아 차르 체제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해외 지역에서 당 중앙을 건설하고 이를 선으로 러시아 차르 체제 속의 대중과 연결했습니다. 이 연결의 도구가 <이스크라>였지요. 마오는 중국의 현실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아 군벌의 틈 사이를 뚫고 들어갔지요. 이 틈, 즉 근거지에 살아있는 대중을 기초로 그는 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레닌이나 마오의 사유의 출발점입니다. 그들의 사유의 핵심은 모두 당의 중심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의 중심은 지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대중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어쩌면 서로 모순적입니다.

레닌과 마오가 우선적으로 풀어나간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당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대중과 연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는 겁니다. 이를 개념적으로 해결하게 되면 이 핵심 개념으로부터 이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상상력이 펼쳐지게 되죠.

레닌이 해외에 <이스크라>를 건설한 다음, 연속혁명(노농동맹, 국제혁명) 개념으로 사유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05년 실패한 경험이 매개가 되었습니다. 마오 역시 근거지를 확립한 다음, 여기서부터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만리장정이 필요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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