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 (4) 대주류왕 이야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이 죽은 후) 세자 유류왕에게 유지를 내려 나라를 도리로서 잘 다스리도록 했고,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잘 계승 발전시켰다”고 밝혀져 있다. 지금까지 추모왕(주몽)-유리명왕-대무신왕의 순으로 고구려의 왕계가 이어졌다고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3대왕이 대무신왕으로 나오며,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으로도 불렀다고 서술돼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대주류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해주류왕과 동일인물이며, 따라서 대무신왕이 곧 대주류왕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모순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무신왕은 대주류왕이며, 서기 4년에 태어나 44년에 사망했다. 그는 11살 때 태자로 옹립되고 14살 때인 서기 18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대주류왕 28세)에 그의 둘째 아들 호동이 성인이 돼 낙랑공주를 만난다. 당시 호동의 나이는 적어도 15세 이상은 되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대무신왕이 13살 때 둘째 아들 호동을 낳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에 부여가 망하고,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수가에 와서 갈사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갈사국이 세워진 뒤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갈사왕의 손녀가 성인이 돼 대무신왕에게 시집을 가서 호동왕자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 물론 갈사왕이 되기 전에 갈사왕의 손녀가 대무신왕의 왕비(차비)가 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당시 고구려-부여 사이의 적대적 관계로 볼 때 비현실적이다.
이처럼 〈삼국사기〉 대무신왕에 대한 기록은 모순으로 가득 찼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했는가? 11살 때 태자가 된 대주류왕과 대무신왕은 서로 다른 왕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왕을 하나의 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이 발생했다. 대무신왕은 11살 때 태자로 된 왕이 아니다. 그것은 〈삼국사기〉 유리명왕조에 그대로 밝혀져 있다. 〈삼국사기〉 유리명왕조에 따르면,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인데, 유리명왕 2년7월에 왕비로 삼아, 유리명왕 3년10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무휼이 태자로 될 당시(유리명왕 33년)에는 적어도 31살이 되어야 맞다. 또 유리명왕 33년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국대사를 맡겼다고 하는데, 11살짜리 아이에게 군국대사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11살 때 태자가 된 대주류왕과 대무신왕은 서로 다른 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주류왕은 어떤 왕인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기원전 277년이며, 유리명왕 이전에 5세대의 왕들이 의도적으로 누락됐다. 누락된 왕들은 국내외 역사서들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추모왕(주몽)-유류왕-여률왕-대주류왕-애루왕-유리왕-대무신왕의 순서로 왕위를 계승했다. 물론 유류왕에서 애루왕 사이에 형제 상속으로 인해 왕들이 더 있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대주류왕은 대무신왕이 아니라 추모왕의 증손자이며, 11살 때 태자가 된 왕이다.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 기록된 많은 기사들은 대무신왕이 아닌 대주류왕과 관련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는 부여 정벌에 관한 기사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서 왜 대주류왕이 고구려의 기초를 확립한 왕으로 칭송했을까?
대주류왕은 어린아이 때부터 신동으로 자라났다. 그가 아직 꼬마였을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여 사신이 고구려에 사대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때 조정에서는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왕은 사신의 사대 요구에 따르려 했다. 그때 어린 왕자 막래(대주류왕)는 이를 반대하면서, 사신에게 그 유명한 ‘누란’ 얘기로 부여의 콧대를 눌러놓았다. 대주류왕은 재위 때에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부여를 멸망시키고, 부여 땅의 남부(당시 부여의 수도였던 길림지역을 포함)를 차지했으며, 개마국 구다국을 평정해 고구려 땅으로 편입시켰다. 대주류왕을 고구려의 기초를 확립한 왕으로 칭송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여국의 정벌과 부여의 왕성이 있었던 길림지역을 확보한 업적 때문일 것이다. 부여는 고구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건국 초기 부여와 고구려는 강대국과 약소국 같은 관계였고, 주몽 집단이 부여의 망명세력이었기 때문에 부여로부터 끊임없는 간섭과 설움을 받았다. 부여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고구려 발전에서 가장 큰 역사적 과업으로 부상했다. 바로 이런 역사적 과업을 대주류왕이 성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부터 고구려의 기초가 튼튼해졌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대주류왕의 부여정벌
금와왕의 아들인 부여의 대소왕은 주몽과는 앙숙관계였고, 금와왕과 다르게 반(反)고구려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 끊임없이 고구려를 압박했다. 대주류왕은 부여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군사적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기원전 220년 12월 부여정벌에 나섰다. 부여 원정길에서 괴유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키가 9척이나 되고 얼굴은 희고 눈에서는 섬광이 번뜩이는 장사였다. 그는 대주류왕에게 부여왕의 머리를 자기 손으로 베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대주류왕의 원정군은 기원전 219년 2월 부여의 수도 남쪽에 도착해 진을 쳤다. 당시 그곳은 진펄이 많아서 고구려 군은 평지를 골라 진을 쳐야 했다. 부여의 대소왕은 당시 매우 연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말을 타고 전 병력을 동원에 고구려 군을 불의에 습격했다. 그런데 그만 그의 말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고구려의 장수 괴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대소왕에게 밀어닥쳤다. 장수 괴유가 큰소리를 지르면서 내닫으니, 부여 군사들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몸을 피하기에 급급해 대소왕의 안위를 돌보지 못했다. 그 틈을 타 괴유는 대소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부여 군사들은 왕이 죽어 사기가 꺾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고구려 보다 압도적 우세했기 때문에 고구려 군을 겹겹이 포위했다. 부여군의 포위망에 갇힌 고구려 군은 식량이 떨어져 가는 둥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가 수일 동안 지속됐다. 이틈을 타 고구려 군사들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밤중에 몰래 진영을 빠져 나와 포위망을 벗어나 고구려로 회군했다. 부여 정벌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소왕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부여의 붕괴와 고구려의 진출
대주류왕의 부여 정벌작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사건은 정벌이후에 발생했다. 대소왕 사망은 자체 모순으로 인해 망해가던 낡은 노예제 국가 부여의 자멸의 신호탄으로 됐다. 대소왕을 잃은 부여 왕궁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윽고 고대 부여왕국은 멸망하고, 부여 왕실세력들은 사분오열됐다. 금와왕의 막내아들은 기원전 219년 4월 부여를 떠나 갈사수(목단강 하류)가에서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 갈사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의 후국으로 전락했다. 같은 해 7월 대소왕의 사촌아우가 1만명의 부여사람들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고구려의 대주류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살도록 했다. 그를 왕으로 봉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때에도 대왕체제(황제국 체제)를 취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주류왕은 그의 등에 낙문(실로 얽힌 무늬)이 있다하여 성을 낙씨라고 정해주었다. 대주류왕의 이러한 정책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즉 그를 고구려의 통제 아래 들어온 부여 땅 일부지역의 후왕으로 임명하고, 고구려 수도에 살면서 ‘요령’(먼데서 통제하는 것)형식을 취하도록 해 부여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고구려의 통제 아래 들어온 부여 땅의 일부 지역이란 어디이며, 어떻게 고구려의 통제 밑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들이 없지는 않다. 〈위서〉(〈북위서〉는 중국 북위의 역사책으로 북제의 위수가 554년에 편찬한 책), 〈북사〉(중국 북조 나라들의 역사를 쓴 책으로 이연수가 당 고종 때 편찬한 책)에 나온 기록에 단서가 제시돼 있다. 그 기록에는 “막래(대주류왕) 때 부여를 쳐서 통속시켰다”고 나와 있는데, 이 기록을 앞에서 든 갈사국의 수립과 부여왕의 사촌아우의 투항과 결부시켜보면, 옛 부여가 사분오열돼 그 땅에 갈사국을 포함해 몇 개의 소국이 형성됐으나, 고구려의 속국으로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때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옛 부여국의 땅에는 수도였던 길림지역도 포함됐다. 121년(태조대왕 69년)에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묘(주몽의 어머니 유화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 지방 백성들 가운데서 어렵게 사는 자들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나눠줬다는 역사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당시 태후묘는 부여의 수도였던 길림지역에 있었고, 고구려의 왕이 자기나라 땅이 아니었다면 그곳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백성들을 돌봐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림지역(옛 부여의 수도)이 고구려 땅으로 될 수 있었던 계기는 기원전 219년에 있었던 대주류왕의 부여 정벌과 그로 인한 옛 부여국의 멸망 외에는 없었다.
대주류왕의 부여 정벌과 그로 인한 고대 부여왕국의 멸망(이후 부여 왕실 중심으로 고대 부여를 계승하는 부여왕국이 건설되는데, 이는 중세 부여왕국이라고 봐야 한다) 사건은 고구려와 부여 관계를 역전시켰다. 고구려는 이 사건으로 옛 부여국의 상당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큰 나라로 성장했고, 부여는 이후 작은 나라로 굴러 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왕릉비에 대주류왕을 가리켜 나라의 기초를 확립한 왕으로 칭송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 부여의 땅을 차지함으로써 큰 나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서쪽으로 서 요하 부근까지 진출함으로써 진나라,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나라로 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끝의 사론(역사평론)에 고구려가 진나라, 한나라 이후 그 동북쪽에 있었다고 평하고 있는데, 이는 고조선과 함께 고구려도 진나라의 동북에서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후부여의 성립
몇 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고구려의 속국으로 굴러 떨어졌던 옛 부여의 신흥귀족들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연합해 새 왕조를 세우고 하나의 봉건국가를 형성함으로써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중세 봉건국가 후부여이다. 후부여의 창건자에 대한 역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의 여러 정세와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부여 소국 왕들 중에서 고대부여 왕실출신으로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고 지략을 갖춘 인물이 후부여의 왕으로 됐을 것이다. 후부여의 건국 시기도 역사기록에 뚜렷이 전하는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2세기 초라고 보는 것은 〈한서〉(전한의 역사책)에 부여와 오환이 연나라(한나라 초기에 연나라를 한의 제후국으로 다스리고 있었음)의 북쪽에 인접해 있었다고 했고, 〈후한서〉〈삼국지〉읍루 전에 전한(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 초기에 읍루가 부여에 종속됐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기원전 2세기경에는 후부여 왕국이 성립돼, 다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후부여의 수도는 어디일까? 고대부여의 수도였던 길림지역은 고구려에 귀속됐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121년에 길림지역에 있던 태후묘(주몽의 어머니 유화의 사당)를 직접 참배했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후부여의 수도는 여러 가지 역사자료들을 종합에 볼 때 농안지방에 있었다. 후부여는 기원전 2세기 초~기원후 285년 사이에 농안에 수도를 두고 있다가, 286년~ 4세기 초에는 회덕 팔가자 부근에, 그 후 346년 후부여가 멸망할 때까지 사평 부근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