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29)

2014년 5월16일과 17일 평양에서는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여기서 북측은 “모든 창작가, 예술인들을 우리 당의 주체적 문예사상과 이론으로 더욱 튼튼히 무장시키고 그들이 모란봉악단의 창조정신과 투쟁기풍으로 문학예술 활동에서 혁신을 일으키도록 함으로써 주체문학예술의 새로운 개화기를 열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창조기풍’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구현한 것이 바로 전자음악을 주로 하고 있는 모란봉악단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연주, 의상과 구성까지 모든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모란봉악단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북의 정책과 사회적 변화에 호응하면 발전해 온 결과이다.

북측의 음악예술의 정통은 만수대예술단(Mansudae Art Troupe)에 있다. 전자악단도 예외가 아니다. 1983년 7월 북측 최초의 경음악단인 왕재산경음악단이 결성되었지만 이는 일부 전자악기를 배합한 작은 규모의 팝스 앙상블이었다. 전자음악의 본격적인 시작은 1985년 6월4일 만수대예술단의 전자음악연주단을 독립시켜 만든 보천보전자악단(보천보경음악단)이다. 음악적으로는 ‘조선식 전자음악’을 추구했는데, 이는 “반인민적이고 퇴폐적인 서구 전자음악”과 달리 조선 장단을 적절히 활용한 음악을 의미한다. 민족음악에 서양 클래식을 종속시킨 ‘배합관현악’을 안착시킨 북측에서 마찬가지로 신디사이저를 기반으로 한 ‘우리식’ 전자밴드를 선보인 것이다. 

만수대예술단은 1946년 ‘평양가무단’으로 창단했다. 1969년 9월27일 현재의 만수대예술단으로 개편되었다. 만수대예술단은 단체 설립을 발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중적 지도와 함께 본보기로 내세웠던 예술단체이다. 67년 김일성 수령체제의 완성 후 당을 위한 새로운 혁신적인 대중동원 체계의 필요성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시 선전선동부 활동과 맞물려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예술단체 중 유일한 조선로동당 산하 단체이다.

만수대예술단은 가극과 음악, 무용 등을 모두 창작, 공연하는 중앙예술단체로 출발하였다. 우수한 창작가와 연주가들을 중심으로 공훈남성중창조, 여성중창조, 공훈여성기악중조, 무용조, 관현악조, 무대조로 구성되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수대예술단 공연을 참관한 횟수가 800여 회에 달하며, 대외활동에 있어서도 서유럽을 비롯한 55개 나라에서 770회의 해외 초청 순방공연을 진행하며 문화외교사절단 역할을 담당한 명실상부한 70년대의 국보급 예술단체이다. 1972년에 ‘김일성훈장’을 수훈하였다.

또한 만수대예술단은 ‘만수대정신’을 창조한 단체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70년대 5대혁명가극이 창조되고 문학예술 전반에서 일대 혁명적 앙양이 일어나던 시기에 나온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우리식 예술창조정신의 본보기’를 보여준 단체로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예술창조사업에서 ‘만수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면 새로운 혁신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이 만수대 창작창조준칙이다”고 설명하며 “예술단체들 가운데 맏아들 예술단체로 인정한다”고 김두일은 <장군님의 음악 정치와 음악성>(문학예술출판사, 2006)에서 밝히고 있다.

만수대예술단은 재일조선인 문화예술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만경봉호에 올라 북측의 선생들에게 몰래 배우던 시절이 도입기였다면, 만수대예술단 단원들이 일본 순회공연을 할 때 전 일정을 수행하며 ‘방조’했던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 이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북측의 예술작품을 성악, 기악, 무용, 무대미술, 조명, 효과 등 각 부문별로 심화 전습을 받을 수 있었다.

1974년 당시 만수대예술단은 대외문화사절단으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순회공연 중으로 일본이 귀국 전 마지막 국가였다. 북일문화교류협회와 아사히신문이 공동 초청을 하였다. 7월과 8월 사이 40여 일 동안 도쿄,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오카, 교토, 고베 등 7개 도시를 순회, 60여 회에 달하는 공연으로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주체의 예술”, “황금의 예술”이란 극찬을 받았다.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음악무용종합공연 구성으로, 이때 소개된 무용작품은 4대명작 무용인 <조국의 진달래>, <눈이 내린다>, <사과풍년>, <키춤>을 비롯하여 <부채춤>, <샘물터에서>, <협동벌의 풍년맞이>, <3인무>, <목동과 처녀>, <쟁강춤>, <양산도>, <농악무> 등 혁명적이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대표적인 무용작품과 일부의 성악곡이었다. 당시 예술단에는 고영희가 무용수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여성기악중주조 창단에 얽힌 일화도 있다. 60년대 말 당시는 혁명가극이고 특히 영화화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던 시절이었다. 1969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화예술인들이 준비하던 무대공연을 지도하면서 창작한 노래가 ‘충성의 노래’였다. 여기에 반주를 여성 연주자 10여 명이 참가해 그해 11월에 가사까지 완성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만수대예술단의 초기 구상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초기 구상부터 발기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지와 관심으로 창단된 만수대예술단은 1977년 만수대예술극장을 갖게 되었고, 단원들이 사는 아파트도 별도로 건설되었다. 작곡자들의 창작실도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 작품이 닮는다고 일부러 멀리 배치했고, 여기에 그랜드피아노, 오디오 시스템, TV, 소파에 책상까지 완비가 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모란봉악단과 그 대우가 다르지 않았다. 실제 지도자가 참석하는 1호 행사와 국가행사, 국빈 공연 등을 담당하고 외교문화사절로 활동을 하였다.

만수대예술단의 작품은 언제나 주체예술의 본보기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의 최우등생이나 입단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모범이 되어 ‘하루생활총화’, ‘주생활총화’ 모두 만수대에서 시작이 되었다. 예술가들의 정기적인 기량발표회도 만수대에서 했으며, 여기서 녹음해 중앙TV에 나와야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간주가 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소속 아티스트로는 2000년 조선국립교향악단 서울 공연에 출연한 테너 리영욱과 베이스 허광수, 차이콥스키 콩쿨 입상자인 소프라노 조혜경과 카라얀 지휘 콩쿨 입상자인 김일진, 여성 지휘자인 조정림 등이 유명하다.

만수대예술단의 주요 작곡가는 다음과 같다. 인민예술가 김제선 전 단장, 인민예술가 김건일, 송학범, 송광림, 조일룡, 허금종이 있고, 최초의 남북 공동창작곡인 ‘통일의 길’을 황병기와 공동 작곡해 널리 알려진 성동춘이 대표적이다.

주요 남성 성악가는 아래와 같다. 인민배우 박영순 전 단장, 인민배우 김선일, 김승연, 로용권, 박영세와 공훈배우인 김성일, 리영교, 림영철, 배성권 등이 있으며, 이 중 2009년 가극 ‘홍루몽’의 주인공인 가보역으로 알려진 김일황(민족성악, 테너)이 유명하다. 그 외 은하수관현악단 출신의 김웅삼과 남원철, 리춘일 등이 활동 중이다.

주요 여성 성악가의 경우는 음악무용이야기 ‘낙원의 노래’ 주인공인 인민배우 함금주와 인민배우 김설희, 리향숙, 조향숙이 있다. 공훈배우로는 ‘꽃 파는 처녀’ 초연시 주인공을 했던 류영옥과 여성중창조인 공훈배우 김봉희, 로춘화, 문희경, 백정숙, 신숙희, 오련심 등과 현재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민족성악 강좌장인 공훈배우 김경옥이 있다. 은하수관현악단 출신의 김금주, 김경희, 리정화 등이 활동하고 있다.

대중적 스타는 역시 대집단체조 예술경연 ‘아리랑’의 서장에서 민요 아리랑을 불러 유명해진 석란희이다. 여기에 나오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기도 했다. 함경북도 광부의 딸로 태어나 학생예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청진예술전문학교에서 민요를 전공했다. 1983년 전국청소년 개인경연에서 1등으로 입상하면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편입학해 졸업 후 만수대예술단에 배치가 되었다. 이후 북측 최고의 예술경연대회인 2.16예술상에서 수상하는 등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만수대예술단 일본 공연에 참가했으며, 2000년 ‘평화친선음악회’에도 최진희, 젝스키스 등과 함께 출연했다.

만수대예술단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에 하나가 <조선은 하나다>이다. 안창만 작사, 성동춘 작곡으로 1974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통일곡 중의 하나로, 우리한테도 널리 알려져 남측에서는 개사한 곡으로 애창하고 있다.

(원곡)

[1절] 반만년의 피줄을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민족/ 백두산의 줄기가 내리어 이땅은 하나의 강토/ 갈라져 몇해더냐 헤어져 몇해더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2절] 슬기로운 민족의 가슴에 애국의 피가 끓는다/ 짓밟힌 남녘의 강산은 원한에 몸부림친다/ 통일이냐 분열이냐 역사의 물음앞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개사곡)

[1절]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조선은 하나의 민족/ 백두산의 정기가 이어내려 이땅은 하나의 조국/ 갈라져 몇해더냐 헤어져 몇해더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2절] 슬기로운 민족의 가슴에 애국의 피가 끓는다/ 잘리워진 반도의 민중들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통일이냐 분열이냐 역사의 부름앞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왕재산예술단은 1983년 7월22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창단된 북한(조선) 최초의 전자경음악단인 왕재산경음악단이 2013년 보천보전자악단과 통합되어 만들어진 단체이다. 경음악단 시절에는 우리식 경음악과 현대무용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16명의 전속악단과 6명의 가수 및 16명의 무용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남성 기악연주조와 여성 성악가수, 무용수를 전속배우를 두고 양악기와 전통악기를 혼용하여 구성, 연주한다. 경쾌하고 명랑한 가요들과 세계 각국의 팝송, 경음악 등 대중음악들을 레퍼토리로 삼아 연주하며, 무용수들은 현대무용을 비롯한 민속무용, 서양의 다양한 댄스들을 선보인다. 특히 외국문화에 대한 부분 수용과 우리식 재현을 통해 무대를 형상한다. 김일성 주석의 혁명 전적지인 평강군의 왕재봉을 지칭하는 왕재산에서 명칭을 따왔다.

투쟁의 열기를 북돋는 노래, ‘정일봉의 우뢰소리’, ‘3대 자랑가’, ‘장군님 백마타고 달리신다’, ‘너를 보며 생각하네’ 등 고전적 진군가들을 다수 창작하였으며, ‘결전의 길’이 유명하다. 최근의 대표적인 연목으로는 ‘가리라 백두산으로’,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우리의 김정은 동지’ 등의 노래와 경음악 ‘더 높이 더 빨리’, 춤 ‘청춘시절’, 현대무용 ‘패권을 단숨에’ 등이 있다.

예술단 산하의 연주단체로 약 30명 규모의 소규모 실내악단인 여성기악중주단이 있는데, 1979년에 공훈여성기악중주단으로 재편했다가, 2009년 1월 다시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으로 새롭게 창단되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 만찬장에서 연주를 맡아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고, 최근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축하공연을 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왕재산예술단은 현대적인 경음악과 노래, 무용작품들을 창조함으로써 주체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예술단에서는 전자악기가 배합된 다양하고 독특한 악기 편성을 가지고 민족적 선율의 고유한 정서와 향취를 현대적 미감에 맞게 구사하는 경음악, 생활가요 작품들과 함께 우리 민족무용의 고유한 춤가락들을 살리면서, 거기에 기백 있고 낭만적인 요소를 결합한 현대무용 작품들을 창조하고 있다. 주요 가수로는 왕재산의 전설로 통하는 인민배우 렴청과 오정윤, 황숙경, 김명옥 정명신, 전경희 등이 있다.

북측에서 음악은 일찍부터 사상과 예술이 결합한 교양수단으로 인식이 되어 왔다. 김일성 주석은 1946년 8월8일 교시를 통해 “음악은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도 혁명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음악은 우리 인민의 감정과 정서에 맞고 새조국 건설에 일떠선 우리 인민들의 환희와 기쁨, 긍지와 자부심, 혁명적 역량을 반영한 참말로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기본 방침을 내놓은 바 있다. 1966년 4월30일 작곡가와의 대담에서 김 주석은 “혁명적으로 교양하는데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 대중의 사상과 정서에 맞는 음악작품을 많이 창작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 교시와 지침을 충실한 반영하면서 만수대예술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까지 최고의 예술단체로 성장하였고, 이후 1980년대 북측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가면서 생활 정서를 반영한 생활가요가 나오는 즈음에 당시의 트랜드를 선도할 수 있는 보천보경음악단의 산파역을 하여 최초의 전자밴드인 보천보전자악단으로 발전, 여기서 모란봉악단이 꾸려졌다. 그리고 만수대예술단 산하에 삼지연악단(Samjiyon Band)을 두어 ‘우리식’ 팝스 오케스트라를 선보이고 있다. 이와는 음악적 결은 다르지만 선의의 경쟁자이자 최초의 팝스 앙상블인 왕재산경음악단이 출범하였으며, 왕재산예술단으로 발전한 후 여기서 청봉악단이 탄생해 작금의 전자음악시대가 완성되었다. 

저 하늘의 노을처럼

노래 : 최삼숙, 작사 : 홍기풍,  작곡 : 서정건

도라지

만수대예술단 연주

고향을 떠나올 때

노래 : 문혜숙, 작사 : 한덕수, 작곡 : 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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