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통 발생의 법칙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이념을 확립했습니다. 그것이 곧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이죠. 마르크스 자신이든 그 후예인 레닌과 마오든 결국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데에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사회적 조건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실천적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차이는 개인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바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주로 사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중심지, 제국주의 국가에서 활동했고, 민주와 법치가 여기서는 어느 정도 뿌리내렸으니 합법적, 평화적 이행의 전략을 실천했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변방, 아류 제국주의에서 활동했고, 차르의 탄압 아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가 제시한 혁명적 정당, 레닌의 정당입니다.

그러나 마오는 전 사회가 대부분 봉건제 아래 있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식민지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제국주의 열강과 각기 연결을 맺은 봉건군벌이 할거했습니다. 그러니 레닌을 단순 반복할 수는 없었지요.

마오는 이런 중국 사회에 적절한 실천적 전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천전략이 단순히 머릿속의 사유를 통해서 찾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 생물진화를 배우면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후대의 개체는 전대의 생물 종이 지나간 역사를 짧은 발생기간 중 압축적으로 반복한다는 주장입니다. 요즈음도 그런 생물학적 법칙이 인정되는지는 모릅니다만, 역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마오는 중국 사회에 적절한 전략을 찾기까지 그런 계통 발생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는 압축적으로 이를 겪었을 뿐이죠.

2) 중국의 사회주의

마오는 젊은 날 방황 끝에 1913년 중국 남부 장사에 있는 호남 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의 의식은 양창제 교수 등이 주도한 <신청년>의 영향을 받아 신민(新民)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동요했습니다. 어느 것이든 대체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개인의 권리와 민주적 합의를 강조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신민주의보다 무정부주의가 사회의 평등을 더 강조하는 이념이죠. 중국에서 이 모든 사상들은 주로 손문의 부르주아혁명운동을 떠받드는 이념이었습니다.

1919년경부터 <신청년>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이끌던 두 분파, 즉 호적파와 진독수파가 논쟁을 벌입니다. 이른바 “문제(issue 이슈)냐, 이념이냐” 하는 논쟁입니다. 문제란 당면 과제에 집중하자는 주장이며, 호적과 같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이념은 먼 미래를 보자는 주장이며, 진독수, 이대조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은 손문의 근대 혁명이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사회주의 이념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진독수, 이대조는 이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1918년 북경대학에 있었던 <사회주의 연구회>가 1920년 3월 <마르크스 이론 연구회>로 전환하였습니다. 진독수, 이대조는 20년 9월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마링과 협의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준비했습니다.

마오는 졸업 후 주로 장사에 머물며 <호남학생연합회>를 주도하면서 고향인 장사의 군벌 장경요 추방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마오는 1919년 겨울 ‘군벌 추방, 호남 자치’를 원세개 정부에 청원하기 위해 북경에 올라갔으나, 군벌의 우두머리일 뿐인 원세개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 사이 장사 군벌 장경요는 손문을 따르는 또 다른 군벌에 의해 대체되고 말았으니, 마오는 손문의 혁명파 역시 또 하나의 군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벌의 이합집산에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던 마오는 진독수, 이대조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됩니다. 대체로 1919년 겨울 청원을 위해 북경에 머물렀던 시기, 즉 1919년 겨울과 1920년 봄 사이였다고 합니다. 마오는 곧 장사로 돌아가 과거 그가 주도했던 <신민학회>를 21년 여름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으로 개편합니다. 마침내 21년 여름 중국 공산당 창립대회가 상해에서 열렸으며 마오는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습니다.

3) 중국 공산당의 가능성

이 시기 중국 공산당 앞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 가능성을 연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합법성의 조건입니다. 1923년 손문과 소련 특사 요페의 회담으로 국공합작을 통해 1924년 광주에서 국민당이 창립됩니다. 마오는 공산당 중앙위원이면서 동시에 국민당 조직부장이 되어 상해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런 좌우합작을 통해 반(半)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했으니, 이 조건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이 대중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서구의 합법적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함으로써 거대한 1차 인터내셔널을 발전시켰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도 비스마르크 이후 반합법성이라는 조건을 잘 이용함으로써 1914년 전쟁 직전 마침내 1당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건이 중국 공산당에서도 국공합작을 통해 열린 것이죠. 물론 지역적으로는 중국 국민당이 지배하는 광주 지역과 양자강 이남 지역에 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합법적 조건을 이용해 중국 공산당이 활발하게 확산하자, 합작의 파트너였던 국민당은 긴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연소연공, 국공합작을 추진했던 손문이 25년 사망하자 국민당내 긴장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아 갔습니다.

▲ 사진 : 구글 검색

4) 농민의 발견

또 중국 공산당 앞에 하나의 조건은 농민의 발견입니다. 중국 농민의 혁명적 열정을 발견한 것은 마오였습니다.

레닌이 활동했던 러시아는 적어도 도시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중국은 달랐습니다. 중국은 여전히 봉건적 지배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라면 대부분 광산 노동자나 도시 일용 노동자(인력거꾼, 건설노동자 등)에 불과했습니다.

마오는 21년에서 23년에 이르기까지 호남에서 노동자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노동자의 파업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회의 사정이 그런 한 노동자를 조직하려 했던 마오의 노력은 빛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그는 국민당 농민부가 광주(손문의 본거지)에서 1924년 7월 시작한 농민강습소가 아연 활기를 띤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 농민강습소에 교사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이를 통해 농민 속에 억눌려 있던 혁명적 열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5) 레닌의 노동동맹

마오는 어떻게 해서 농민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요? 마오의 발견은 봉건시대 농민반란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봉건적 농민반란이라는 개념과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으로서 농민혁명이라는 개념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 농민반란은 새로운 봉건왕조의 창립에 그칠 뿐입니다. 반면 농민혁명은 노동자와의 동맹,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학의 역할에 대해 잠깐 말해야 하겠습니다.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는 노력입니다. 새로운 개념은 마치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나서야 발견됩니다. 일단 새로운 개념이 발견되면 이 개념을 싹으로 해서 새로운 사유의 세계가 열리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레닌은 혁명적 정당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개념은 싹이 되어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농동맹이라는 개념입니다. 레닌은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 가운데 발생한 농민들의 혁명적 열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농촌의 농민은 봉건적 세금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주의 토지는 농민의 소유로 전환됩니다. 이는 농민의 자발적 토지몰수였습니다. 농민은 강제로 세금을 거두려던 지주의 집에 방화하고 지주를 영지에서 추방했습니다. 농민은 도시에서 노동자, 병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소비에트를 본 따서 지역마다 자발적으로 농촌 소비에트를 건설했습니다.

당시 서로 경합하던 혁명가들, 즉 무정부주의자(사회혁명당)와 멘셰비키(대중정당 노선), 그리고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정당 노선) 가운데 오직 레닌만이 이런 농민의 소비에트를 수용했습니다. 레닌은 이미 노농동맹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에 그런 현실적 감각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지요.

레닌의 노농동맹이라는 개념은 1922년 민족문제 테제에서 반제동맹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서구 노동자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식민지 농민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합하자는 개념입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있었고 그러기에 레닌의 노농동맹, 반제동맹이라는 개념을 배울 수 있었고 농민혁명에 주목할 수 있었던 거죠.

6) 레닌과 마오

이런 점에서 농민의 혁명적 열정을 발견했던 것은 마오가 눈을 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런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레닌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대부분 농민의 혁명적 열정을 긍정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은 처음에는 좌우합작, 합법노선 그리고 노동자의 조직에 몰두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오의 농민운동이 좌우합작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해서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오는 중앙위원에서 쫓겨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25년 국민당 내부에서도 좌파(왕정위 호한민 등)가 득세하게 됩니다. 국민당 좌파의 지지를 받자, 코민테른은 물론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서도 농민운동의 역할을 긍정하였습니다.

합법노선을 강조하는 진독수를 제외하고 모두 그랬어요. 나중에 도시 소비에트 봉기를 일으키는 구추백과 이입삼조차도 마오의 농민운동을 환영했지요. 마오의 노력으로 중국 공산당에도 26년 7월 농민부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오가 농민부장이 되었고 이제 농민운동의 주도권은 국민당에서 공산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당과 마오가 중국 사회에 적절한 실천 전략을 찾기 위해서는 크나큰 고통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농민의 혁명이 실현되기 위해 마오는 새로운 실천의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계통 발생을 반복하던 마오는 이제 태내를 벗어나 새롭게 탄생해야 했던 것이죠. 그건 다음에 이어서 말하기로 하죠.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