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평론 겉과속 - 2018년 3월20일

1. 선거, 보수정치 버팀목에서 새 사회 여는 도구로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몇 년전에 회고록을 출간한 적이 있다. <대통령의 시간>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랑으로 일관하였다.

정치인의 회고록이란게 자화자찬 또는 변명으로 가득차기 마련이지만 특히 이명박의 ‘회고록’은 알맹이 없는 회고록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그는 재임중에 다른 나라와의 정상외교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고 주장하였다. 이명박은 자신이 그 나라의 정상 또는 실력자와 ‘격의없는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는 한심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성과마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들먹였던 것은 나라 재정을 거덜낸 일이었다. 이런 내용으로 가득찬 회고록을 보면 이명박이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갖은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고 나라를 거덜낸 범죄자…. 어떻게 해서 이런 자가 대통령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선거’라는 제도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적격자가 국가원수직을 차지하는 것은 이명박이 처음이 아니었고 끝도 아니다. 유신공주 심신미약자 박근혜가 그 뒤를 이어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정치극을 벌였으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다른 나라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지금 지구촌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미 합중국 대통령을 하고 있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의 전임자들이라고 상태가 썩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빌 클린턴, 조지 워커 부시, 버락 오바마는 자질과 능력, 도덕성과 인격에서 중대한 결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을 수 없는 명백한 결격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씩이나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선거제도의 덕이다.

강요나 간섭을 받지 않고 한사람이 한표씩 행사하는 서구식 선거와 선출방식은 현실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그 제도가 빚어내는 결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선거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어리석은 제도’, ‘혹세무민을 제도화한 것’이란 말까지 듣기도 한다. 기성정치에서는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제도’라는 변명을 한다. 선거에 대한 혹평이 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드는 이미지(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가 선거에서 승자가 되는 가장 유력한 길이 되고, 흑색선전(이 또한 사실여부는 다른 문제다)이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서구식 선거제도는 민의를 반영하는데서 한계에 이르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민중은 선거를 통해 사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힘을 표출하기도 하며 반민주적인 정권과 반민중적인 정치에 철퇴를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조건에서, 제한된 범주내에서일어나는 일이다.

선거는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으로 진출한 민중이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류역사에서는 선거만으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뤄낸 적이 없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보수정치로의 회귀’는 선거제도에 주어져 있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선거를 뛰어넘는 선거를 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다.

진보정치는 대중주체의 선거를 구현함으로서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특정한 조건에서 효과가 있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데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선거의 특성을 강조한 나머지 보수정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촛불혁명을 일으킨 지금의 대중들은 선거결과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려는 의지가 매우 높다. 이런 조건은 늘 차려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은 진보정치가 대중주체 선거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라 할 수 있다. 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 여부는 대단한 결심과 끈질긴 노력에 달려 있다.

진보정치는 선거를 보수정치의 버팀목에서 새사회로 여는 도구로 바꿔내야 한다.

▲ 사진 : 뉴시스

2. 개헌, 직접민주주의의 역사적 요구를 보장해야

‘광우병소고기 촛불시위’는 촛불운동의 첫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우병소고기 촛불시위’는 정책의 결정권, 국가 주권은 임기로 위임된 정부에 넘겨준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항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진보적인 학계의 석학 노릇을 하고 있던 어떤 학자는 대의제도가 직접민주주의보다 발전한 제도라고 주장하며 촛불시위의 요구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투쟁에 나선 대중은 그의 주장을 외면하였고 그는 더 이상 진보적인 석학 행세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석학’은 하나만 알았으며 그마저도 평면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정으로 보면 대의제도가 직접민주주의 다음으로 출현한 제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반드시 더 진보적이거나 더 나은 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대의제도는 공동체적 사회제도가 붕괴되고 특정한 집단과 소수의 지배로 이행하는 역사적 요구를 반영해서 나온 제도였다. 따라서 대의제도에는 반민주주의적 반민중적 기능과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 고대의 정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대의제도는 세 종류의 정치제도 중에서 가장 나쁜 제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동체적 정치제도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대의제도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대의제도는 봉건지배와 파시즘, 군부독재를 붕괴시키고 주권재민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대중이 정치와 나라의 주인으로 나서는 현시대에서는 장애물로 되고 있다. 특히 서구식 정치제도에서 대의제는 민중의 정치적 진출에 장벽으로 되고 있으며, 기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공직선출대상을 확대하고 소환제를 실시하며 다양한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구를 구현하려는 여러 시도와 변화가 있었으나 부작용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 한계가 명백하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단지 대중이 정치권력을 통제하려는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주권을 확립하려는 바람이며 차별없는 사회에 대한 갈망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의 요구는 정치제도를 손보고 선거법의 몇몇 조항을 고치는 것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권력구조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헌법개정만으로는 직접민주주의의 요구를 담아낼 수 없다.

자주권과 국민주권을 실제로 담보하는 헌법으로 만들어야 하며 사회구성원 누구나 평등한 삶, 존엄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권력을 철저하게 국민에게 복속시키는 정치제도 개조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인 흐름이 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충실한 헌법, 민중주권원리가 확립된 헌법을 만드는 것이 촛불혁명의 요구에 맞는 헌법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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