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혁명가 레닌과 마오의 차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두 사람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무척 다른 것 같아요. 흔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아시아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

1) 영웅신화

단군신화를 보자. 곰이 동굴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어 인간이 된 다음 낳은 아이가 나라를 건국하니 곧 단군이시다. 이 단군신화는 영웅이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곧 죽음과 같은 고난과 절망의 길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 고난과 절망의 길은 과거를 답습하는 길이다. 영웅은 과거에 내려온 방침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의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버티고 있다. 영웅은 마침내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서 이 심연을 뛰어 건넌다. 이제 미래가 시작된다.

이 심연을 건너는 길은 처음엔 마치 하나의 환상의 빛처럼 그에게 떠오른다. 그는 이 환상을 실천하는 가운데 갈고 닦으면서 이를 체계화하고 마침내 이성적인 길로 만든다. 환상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이성적인 길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을 새로운 길로 이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영웅이 된다.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마오는 모두 이런 고난과 절망이라는 영웅의 길을 겪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독일 혁명에 가담했다. 그는 이때 그 이전까지 부르주아 혁명파가 갔던 길을 걸었다. 즉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보듯 봉기한 후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길이다.

1848년 혁명에서 그는 체포되었고 간신히 영국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 모색하면서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을 통한 합법적 투쟁의 길을 배웠다. 소위 합법노선이다. 그는 이 노선을 <1차 인터내셔널>에 적용했고, 역사에서 보듯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개척했다.

▲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단상 아래 오른쪽에 트로츠키가 보인다.[사진 : 구글 검색]

2) 레닌의 절망

레닌도 마찬가지이다. 레닌은 형 알렉산더가 짜르 알렉산더3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처형된 후 인민주의(무정부주의와 테러리즘)를 넘어서려 했다. 하지만 인민주의는 1860년 이래 러시아에서 혁명의 전통이었다. 수많은 희생과 분노의 기억이 인민주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인민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아래 인민주의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인민주의자가 실행한 알렉산더2세 암살 이후 1880년대 짜르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일단의 인민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했다. 그 대표자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이다. 플레하노프는 1885년 ‘노동자 해방단’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전파했다.

하지만 1880년대 러시아는 암흑의 시대였다. 한편으로 파산한 인민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념은 출현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알렉산더3세의 반동정치 아래서 러시아 자본주의가 확장하면서 사람들은 일시적인 번영에 도취했다. 플레하노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시원찮았다.

이 시기 아주 소수의 지식인이 플레하노프가 전해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레닌도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888년 카잔 대학에 입학했다가 우연히 시위에 휩쓸려 제적된 이후 변방(거기에 외할아버지의 집이 있었다)에 유배되었다. 그는 1890년 학습허가를 맡아서 독학을 했다. 그리고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고향 가까운 사마라에서 개업했다. 그는 변호사로는 별로 유능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연구했고 곧 마르크스주의의 탁월한 이론가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인민주의자의 주장을 비판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인민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했다. 그는 러시아에서도 이미 농촌 분해가 시작되었고 국내시장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적 사실을 통해 입증했다. 그 결과가 레닌의 저서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사>이다.

3)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파산

레닌은 1893년 생페테스부르크에 올라왔다. 이곳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자본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그 가운데는 후일 그의 부인이 된 크루프스카야도 있었다)와 더불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레닌이 시도했던 것은 마르크스가 1860년대 이후, 그리고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880년대 이후 전개했던 합법노선이었다. 즉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이었다. 레닌은 이런 합법노선을 통해 1895년 ‘노동자해방동맹’을 조직했다. 이는 앞으로 나타나야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모태가 될 예정이었다. (레닌의 사상을 전하는 책은 이미 이 시기 레닌이 후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회고적 서술이다. 당시까지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합법노선에 충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합법노선이란 영국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노선은 독일에서 답습되었으나 그곳에서는 저항을 극복해야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비스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탄압시대를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이런 합법노선은 노동자의 사회정치적 지위가 일정한 정도 인정받을 때 가능한 길이었다. 이 지위는 영국과 독일에서처럼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협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시기(자본의 성장기)에서 획득되었으며, 영국과 독일에서 노동자들의 참정권을 획득하는 과정과 맞물려서 발전했다.

하지만 짜르가 된 알렉산더3세는 막무가내로 반동정치를 강화했다. 그는 비밀경찰을 이용하여 탄압을 강화했다. 알렉산더2세가 양보했던 지방의회(두마)의 소집도 중단했고, 교육에서 종교의 감독을 강화해나갔다. 러시아에서 사상, 결사, 언론 등 일체의 자유가 박탈되었다.

이런 가혹한 탄압 체제 아래서 마르크스 이래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합법노선은 불가능했다. 1895년 레닌이 간신히 세웠던 ‘노동자 해방동맹’은 기관지인 <노동자 대의>를 발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경찰의 습격으로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레닌은 3년 동안 시베리아로 유형을 선고 받았다.

레닌은 이 시베리아 유형 속에서 1893년부터 1898년 생페테스부르크에서 전개했던 합법노선은 실패로 돌아갔음을 뼈에 저린 유형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레닌은 자신의 실패가 단순히 이 합법노선을 실행하는 가운데 범했을 실수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라는 조건 아래서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3년에 걸친 사유 끝에 그는 유형이 해제되자 말자, 러시아를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한다. 러시아의 현실로부터 단순한 도주는 아니었다. 유형 시절 그의 마음속에 있던 꿈은 이미 치밀한 실천 계획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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