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혁명가 레닌과 마오의 차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두 사람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서로 무척 다른 것 같아요. 흔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아시아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
1) 거울 사고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 가운데 풀타크 <영웅전>이라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의 영웅을 서술한 책입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 당시 역사, 그리고 각자의 사상을 곁들여 무척 흥미롭죠. 전체적으로는 도덕 정치론을 펼치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더불어 서양 정치가의 필독서가 되었죠.
풀타크 영웅전은 여러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은 두 사람의 영웅을 선택해서 서로 비교하면서 서술합니다. 이 비교되는 인물들은 때로는 동일한 반복이고, 때로 서로 대립되기도 하여, 말하자면 서로 거울에 비치고 또 비추어 보도록 만들었죠.
이런 사유를 일컬어 철학에서는 사변적 사고(변증법)라고 합니다. 사변(speculation)이란 거울에 비추어(specular)본다는 뜻이에요. 번역이 사변(思辨), 변증(辨證)이라고 하니 이상한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그저 거울 사고라고 번역하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 이런 사변, 즉 거울 사고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레닌과 마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와 아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이 두 사람을 거울 사고를 통해 이해해보고자 할 뿐입니다. 풀타크 영웅전의 서술 방식을 흉내 내려고 합니다만 잘 될지 모르겠군요.
2) 성장기
레닌은 1870년 태어났고 마오는 1893년 태어났으니, 레닌은 마오의 아버지 세대가 됩니다. 레닌은 농노의 가계였지만 아버지가 귀족 작위를 받을 정도로 상승한 가문 출신입니다. 마오의 아버지 역시 빈농이었지만 당대에 부를 일구어 부농으로 상승했어요. 부모의 세대, 러시아에서나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었죠.
레닌의 아버지는 정통 러시아정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유태계이고 반종교적이었다고 해요. 레닌은 종교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마오의 아버지는 엄격한 가부장이었구요. 마오는 유교의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관습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합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유사합니다.
레닌이 태어난 곳은 볼가강변(심비르스크, 지금은 레닌시)이니, 곧 러시아 변방이죠. 당시 러시아는 1861년 농노해방령 이후 자본주의화하면서 볼가강을 넘어 시베리아로, 아시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오가 태어난 곳은 중국의 남방 호남성의 수도 장사 근교인 소산입니다. 장사는 아편전쟁으로 자본주의 열강 영국에게 할양된 홍콩을 관문으로 서양 문물이 다른 곳보다 빨리 퍼지고 있었지요.
이렇게 볼가강과 홍콩을 비교해 놓으니,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인 발전이 마치 두 사람의 운명을 묶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월경을 뒤에서 잡아끌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의 월경을 앞에서 가로막았다고 할까요?
나중에 레닌은 1921년 민족문제 테제를 발표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 사회주의와 식민지에 저항하는 농민, 민족주의 연대를 주장했지요. 레닌 사후 1924년 중국 혁명의 지도자 손문은 연소연공(소련과 연대하고 공산주의와 연대하자), 좌우합작, 노농동맹의 원칙을 정했습니다. 이때 마오는 국민당의 농민부장으로 일하면서 북벌을 위한 농민봉기를 이끌었어요. 결국 레닌의 테제를 마오가 실천했으니, 어떤 운명적 힘이 두 영웅을 연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3) 반(反)낭만주의와 낭만주의
레닌의 전기를 쓴 사람들은 거의 어김없이 그의 형에 관해 소개합니다. 그의 형은 알렉산더였는데 당시 생페테스부르크 대학 학생이었지요. 과학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러시아에서 고조된 인민주의자(무정부주의자)의 테러에 가담합니다. 그는 알렉산더 3세를 암살하기 위해 모의하다 체포되어 사형되지요.
레닌에게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레닌은 형의 무의미한 죽음에 대해 가슴아파했지요. 형의 사유와 삶은 무정부주의자답게 낭만적이었어요. 레닌은 그 때문에 평생 낭만주의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레닌은 평생 계획적이며 실질적이고 확고한 방침에 따른 삶을 살아가려 했습니다.
반면 마오의 전기를 쓴 사람도 꼭 잊지 않는 사건이 있어요. 그것은 마오에게 영향을 준 선생 양창제입니다. 그는 마오가 다닌 호남 사범학교 교수였지요. 그는 북경의 진독수와 더불어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어요.
이 <신청년>은 1911년 신해혁명이 중도반단의 혁명으로 전락하자, 청년들이 전개한 문화운동의 기관지였습니다. <신청년>을 발간하였던 진독수, 채원배 등은 한편으로는 청말 양계초 등이 전개한 신민(新民)사상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자유민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점차 사회주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도중에 있었습니다. <신청년>의 대표 진독수는 후일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손문의 신해혁명을 완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죠.
양창제 교수가 얼마나 마오를 아꼈는지는 그의 딸 양계혜를 마오와 결혼시킨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맺어준 첫 부인을 마오는 거의 방기하다시피 했지요. 그녀는 1910년 병으로 죽고, 마오의 실제 첫 부인은 양창제 교수의 딸 양계혜입니다. 양계혜는 나중 군벌에 의해 학살됩니다.
마오는 곧 양창제의 추천을 받아 북경대 사서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는 이대조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연구회에 참석하면서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합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을 고려해 볼 때, 아무래도 그가 청년기에 받았던 사상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과연 <신청년> 시대 그가 수용한 사상 가운데 후일 그의 사상의 뿌리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이 점에 관한한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청년>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양명학, 신민사상의 영향에 주목합니다.
양명학은 서구 낭만주의 사상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낭만주의의 핵심 개념은 양심이라는 개념입니다. 낭만주의는 인간에게는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과, 인식하면 곧바로 실천하는 실행의지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낭만주의는 이 능력을 일본인이 번역하면서 양명학에서 사용하던 양지양능(良知良能: 탁월한 지적 능력과 탁월한 실천 능력)이라는 개념과 연결하여 양심이라 번역했죠. 왜, 행동하는 양심이라 할 때 바로 그 양심입니다.
이런 양명학은 양계초에 의해 사회진화론과 결합하면서 신민사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신민사상은 근대 초 아시아에서 등장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사상이죠. 그 속에는 열강의 침략 앞에서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조 말기 신민회(또는 국민회)라는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해서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저항을 했던 세력도 이 사상에 기초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레닌과 마오는 확실히 대비됩니다. 레닌이 낭만주의를 무척이나 경계했고 철저히 계몽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면 마오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낭만주의(곧 양명학, 신민사상)의 전통 위에서 수용했습니다. 이런 차이의 흔적은 이제 앞으로 그들의 사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