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 (3) 고구려 건국 설화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담은 건국설화는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국설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광개토왕릉 비문에 적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고구려 사람 자신이 써 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며, 역사적 가치가 높다.
옛적에 시조 추모왕(주몽왕)이 나라의 터전을 처음 닦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 그는 천제(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강물을 맡은 어른으로 물의 지배자)의 딸인데 알을 깨고 나왔다.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성이 있었다 ...(*다섯자가 보이지 않음) 수레를 메우라고 명령하여 돌아다니는데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황천(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자라와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하니 그 소리가 나자마자 곧 자라와 거북이들이 물 위에 떴다. 그런 다음에 강을 건너서 비류골의 홀본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했다.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므로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게 했다. 왕이 홀본 동쪽언덕에 있는데,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 |
1. 주몽! 그는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15세기경 독자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구려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국가 재정이 피폐해지고, 지방 소국들이 떨어져 나가고, 국가의 영역이 협소해져, 구려 5부지역만 남은 자그마한 나라로 전락했다. 그나마 구려의 국가적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구려 5부 사이에 상호 친연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르렀다. 구려 이웃지역인 압록강 유역에 그 지역 유력자인 하백의 딸 유화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느 날 해모수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를 안 하백은 부모 허락 없이 통정한 그녀를 우발수가로 귀양을 보냈다. 우발수가에서 귀양살이하던 유화는 부여 어부에 붙잡혀 부여왕국으로 끌려갔다. 부여왕 금와는 그녀가 하백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별궁에서 지내도록 허락했다. 주몽은 바로 여기에서 유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이름 주몽이라는 말 자체가 그가 살던 부여지역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주몽은 어릴 적에는 부여 궁전에 살면서 왕자 대우를 받았지만, 자라면서 무예와 지략의 출중함이 드러나자 부여왕 금와의 일곱 왕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부여왕자들은 주몽을 왕궁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며댔다. 금와 왕은 마침내 주몽을 왕실 말목장의 목동으로 쫓아냈다.
말 목장 생활은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난만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적 하층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의 생활처지를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회적 모순을 깨닫게 됐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개혁 방향과 방도를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됐다. 이 과정에서 귀공자 주몽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혁명가로 성장했다.
혁명가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신진세력들을 규합해 갔다. 그러던 중 부여왕실에서 그를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역사책들에서는 명확히 기술돼 있지 않지만, 이러한 모의는 주몽의 신진세력 규합이 부여왕실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부여왕실을 뒤엎을 만한 힘을 갖추지 못한 주몽세력은 불가피하게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주몽의 망명
신변의 위협이 닥쳐오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의 벗과 함께 부여를 떠나 남쪽 지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주몽의 망명은 단순한 도피가 아닌 새로운 도전이었다. 부여왕국 내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어렵게 된 조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망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망명길에서도 주몽은 자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대표 사례가 모둔 곡에서 만난 청년들인 재사, 무골, 묵거 등을 영입한 것이다. 이들은 주몽의 새로운 나라 건설의 꿈을 지지하며 따라 나섰다. 주몽세력은 남쪽으로 졸본천(비류수)가에 다다랐다. 그들은 졸본천가 서쪽 언덕에 자신들의 거점을 세웠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건국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여 나갔다. 망명과정에 대해 설화에서는 자세히 언급돼있지 않지만, 몇몇 개인들의 망명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 또는 주민집단의 이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3. 주몽의 건국활동
당시 이곳은 과루부(계루부라고도 불리며, 구려 5부의 하나로 오늘날 집안 통하 지역) 북쪽 변방의 빈 공지였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국경개념이 모호했으며, 국경 근처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공지가 매우 많았다. 대체로 이런 지역은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각 나라도 사람이 살지 않은 땅에 관심도 없고, 지배력도 미치지 않았다. 주몽세력은 바로 이런 곳을 거점으로 삼고, 왕과 신하의 상하 질서를 세우고, 정치군사적 실력을 갖추고,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볼 때 주몽세력은 일정한 주민(노예)들을 데리고 남하했을 것이다.
주몽이 자리 잡았던 지역은 우연히도 구려국 과루부(계루부)와 비류국의 경계지역이었는데, 여기에서 주몽은 건국 사업에 큰 의미를 갖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이 비류국왕 송양이며, 다른 한 사람은 소서노이다. 역사서들에서는 주몽이 고구려 건국을 전후해 비류국왕 송양을 만난 기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만남 시점에 대해서는 건국 이후라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처음 만나 다퉜던 것은 고구려 건국 시점 이전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만약 건국 이후라면 당시 구려국은 비류국에 비해 대국이었는데, 구려를 계승한 고구려의 국왕을 송양이 만나 서로 겨루지 못했을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비류국왕 송양은 주몽을 만나보고 매우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대번 알아차리고, 자신의 부용(신하)이 돼줄 것을 제의했으나, 주몽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오히려 송양에게 자신의 부하가 되라고 요구했다.
주몽과 송양의 만남 못지않게 극적인 사건은 소서노와의 만남이었다. 소서노는 과루부(계루부) 대가 연타발의 딸이었고,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처였는데, 우태가 죽은 후 과루부로 돌아와 과루부 북쪽지역에 살고 있었다. 비류수가에서 주몽을 만난 소서노는 그가 대단히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주몽과 결혼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털어 그의 건국사업을 거들었다. 외지에서 흘러온 주몽에게 지역 토착세력인 소서노와의 결혼은 건국사업을 빠른 시일 내에 성취해 나갈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주몽에게 소서노와의 만남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으며, 소서노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주몽은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정치군사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279~278년경이었다.
당시 구려국의 북방지역에는 말갈족 부락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려 사람들과는 다른 종족으로 아직 원시시대 말기 단계의 종족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면서 주변지역에 대한 습격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것은 구려 북부지역 사람들에게는 근심과 우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간파한 주몽은 구려 사람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말갈 부락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는 구려 땅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눌러놨다. 주몽은 말갈족 토벌작전으로 구려 내에서 자기 명성을 떨쳤으며, 이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당시 계루부 대인이었던 연타발은 소서노의 요청에 따라 주몽에게 계루부 대인 자리를 물려줬다(기원전 278년).
4. 고구려의 탄생
계루부 대인이 된 주몽은 구려국의 주요 정사를 논의하는 모임에 자주 참가하게 됐다. 당시 구려왕은 5부의 하나인 연나부의 대인 집안 출신인물이 세습하고 있었는데,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초 구려 사회 내부에서는 노예와 지배계급 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격화되고, 귀족들 사이에서 정권다툼도 심해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근심걱정으로 날을 새우던 구려왕은 주요 정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주몽을 몇 번 보고, 주몽의 풍모와 재능에 탄복해 장치 나라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딸을 주몽에게 시집보냈다. 아들이 없었던 구려왕이 얼마 후 급병으로 죽게 되자, 왕의 사위였던 주몽이 구려 왕위를 계승해 구려 5부 전체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됐다(기원전 277년).
새로운 나라를 세울 큰 뜻을 품고 구려국 왕위에 오른 주몽은 왕좌에 앉자마자 나라 이름을 구려에 ‘고’자를 덧붙여 고구려로 바꿨다. 고구려의 탄생은 단순히 국호의 개칭이 아닌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의미했다. 주몽이 구려를 고구려로 고쳐 부른 순간 1천여년을 이어오던 구려국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나라 고구려가 탄생한 것이다.
구려는 고대 노예제 국가이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구려 5부의 부 연맹체 성격을 띤 소국연합체제로 전락했다. 반면 고구려는 중세 봉건제 국가로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을 지향했다. 물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올라 고구려의 건국을 선포한 바로 그 시점부터 새로운 변화는 시작됐고, 고구려라는 구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다.
고구려가 건국되고 주몽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소국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었던 왕과 4부 대인들의 관계는 봉건적 주종관계로 바뀌어 갔다. 구체적으로 왕의 지시 명령에 복종하는 새로운 질서체계가 확립돼 갔으며, 4부 대인들은 봉건적 질서체계에 따른 왕의 제후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자신들의 가신단 명단을 의무적으로 왕에게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국가적 행사 때 왕의 신하와 제후의 신하는 사자, 조의, 선인이라는 같은 벼슬등급이라 하더라도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고 한 급 낮은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이러한 차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화됐고, 5부 내에서 봉건적 위계제도도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처럼 주몽은 독자성을 가진 소국연합체 형태의 구려국의 정치제도를 국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위계질서가 확립된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로 개조해 대고구려의 기초를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