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 청산을 위하여 (6)

1. 동아시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 시작과 고종의 균세(均勢)정책

흔히 러일전쟁을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러시아에게 조선은 핵심문제가 아니었고, 또 두 나라만의 충돌도 아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라고 표현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북아 패권질서 새판 짜기의 시작은 1885년부터였다. 1884년 12월 청나라의 간섭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했다. 분노한 고종은 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고 결심했다. 1885년 러시아로 밀사를 보내 훈련 교관을 초빙하며 영흥만 조차를 밀약한다. 러시아로 청을 견제하려는 ‘균세정책’이었다. 이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되는데 영국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이뤄질 경우, 영국 중심의 식민지 분할질서가 타격을 받게 된다. 영국은 급하게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한다. 대마도 해협을 장악해 러시아 군함의 출구를 막고 영흥만 점거를 무산시킴으로써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려는 계획이었다. 중국에서의 막대한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영국은 1887년 2월 말까지 2년 남짓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자신과 러시아 동시 철병을 청나라에게 맡겨 해결한다.

결국 이 사태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다른 열강이 동해를 봉쇄하면 러시아 함대는 동해를 벗어나기 어렵다. 큰 전쟁 없이는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어렵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동북아와 만주를 포기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계획한다. 군대가 도보로 연해주에 도달하려면 18개월이나 걸리기 때문에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기 전까지,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 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열강들에게 러시아의 목표가 극동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의 새로운 접점이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논점이 생긴다. 고종의 균세(均勢)외교. 서양 강대국을 골고루 끌어들여 어느 한 강대국이 조선을 독점적으로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도였지만 결과는 어떠했을까? 청의 영향력을 막고자 러시아를 한반도에 적극 끌어들였지만, 오히려 청의 영향력만 더 키우게 되었다. 청이 조선에서 벌어진 영·러의 분쟁 해결 협상을 맡음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만 재확인되었다. 여러 열강을 조선에 끌어들일수록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싼 열강들의 이합집산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은 거대한 강대국들의 조커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릴 운명에 처하게 된다. 스스로의 자강력을 기르지 못한 채, 남의 힘을 활용하여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균세외교!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얄팍한 계산이 아닌가. 

2.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10년이 지난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을 제국주의 열강의 회원으로 만들었지만 러시아가 이끈 삼국간섭은 일본의 한계를 드러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청에게 돌려줘야 했고, 조선에서 일본의 지배력은 도리어 실추했다. 고종이 러시아에 의지해 일본에 맞서는 형국. 결국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하였고, 이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 사태를 초래한다.

당장에는 러시아의 힘이 커진 듯하지만, 동아시아 정세 흐름은 달랐다. 청일전쟁으로 청의 실체가 폭로되며, 중국 자체를 유지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열강들의 극동에서의 대립과 갈등이 더욱 본격화된다. 열강들은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기 전에 자신에게 덜 위협이 되는 나라가 조선을 장악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기를 바랐다. 이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후원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자신들의 동아시아 중국경영이라는 목표를 위해서였다. 

한편 러시아는 청일전쟁이 진행되던 1894∼1895년 기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만주를 관통하는 철로와 연결시킨다는 결정을 내린다. 동청철도(만주횡단철도)의 추진은 청의 이홍장과 러시아 재무장관 비테의 비밀협상 타결로 가능해졌다.(1896년). 일본을 가상의 적(敵)으로 하여 러시아가 청에게 군사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만주횡단철도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이다. 동청철도는 북만주 자원을 개발하고 러시아령 동아시아 식량기지를 확보해 주었다. 러시아는 만주의 국경을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내친김에 1897년 12월 여순을 점령하여 자신의 부동항으로 삼았다. 1898년 7월6일 러시아는 다시 청나라와 협약을 체결하여 동청철도에서 여순과 대련 만까지 철로 지선을 건설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남만주 철도였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빼앗아 만철로 불림). 1890년대 말 러시아는 동청철도와 남만주 철도를 통해 기름지고 인구가 조밀한 만주에 경제적 침투를 확대하는 동시에 ‘여순’이라는 부동항을 지원하고 유지할 기반을 마련했다. 또 동청철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남만주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러시아 중심부와 동아시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3. 러일전쟁... 본격적인 미국, 영국, 일본 동맹의 신호탄

러시아의 비상에 가장 위협을 느끼고 비판한 것은 다름 아닌 영국, 미국, 일본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고전해 러시아와 만주에서 맞설 형편이 아니었다. 영국은 1902년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한다. 미국은 좀 더 절실했다. 뒤늦게 아시아로 진출한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러시아의 만주 장악에 절치부심하면서 미국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러시아의 극동 선점을 도저히 방치할 수 없었다.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만주를 독점적 달러 수출 대상지로 지정하여, 러시아의 침투를 배제하려는 정책을 쓴다. 즉 일본을 대러시아 전쟁으로 부추겨 일본의 조선 강점을 실현시켜줌으로써 어부지리를 얻자는 것이 미국의 조선 침략정책이다.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일본을 지원했는지 살펴보자. 

▲ 러일전쟁의 격전지 203고지에서 바라본 여순항

첫째로 일본에게 자유로운 조선침략의 유리한 조건을 보장하였다. 당시 일본이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최근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어떻게든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보장받는 것이 일본의 속셈이었고, 러시아는 조선보다는 만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질질 끄는 사이, 절실하게 전쟁을 바라는 미국은 사실상 일본을 전쟁으로 부추긴다. 1903년 12월말 일본이 전쟁할 경우 《엄정중립》을 약속했으며, 1904년 초 적극적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부추겼다. 이에 힘을 얻은 일제가 1904년 2월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자 미국은 만주와 러시아 영내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들을 적극 보호해주었다. 반면에 일본 군함의 불의의 공격을 받은 두 척의 러시아군함 승무원들 구출은 거절했다. 미국의 후원 밑에 일본은 조선에 무려 10만 이상의 군대를 상륙시키고, 2월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조선을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시켰다. 《한일의정서》가 공포되자, 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미국이 예상한 것보다는 온화한 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일본의 지위는 더욱 더 여러 나라들의 큰 지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욱 큰 힘을 얻은 일본은 8월22일에는 2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의 내정을 엄중히 위협하였다. 일본은 미국과의 사전 모의대로, 이 협정서에 따라 조선의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미국인을 외교 고문으로 파견한 것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과의 대외관계에서 야기될 수 있는 복잡한 사태를 미국의 힘을 빌려 수습하려는 의도였다. 스티븐스는 12월27일 조선정부와 《외교 고문 용빙 계약서》를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하였으며 일본, 영국, 미국 등에 주재하고 있던 조선 공사들을 전부 소환하였다.

둘째, 미국은 러일전쟁 동안 일본을 물심양면으로 원조하였다. 일제에게 차관 명목으로 준 원조는 모두 4차례에 걸쳐 1억5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 미국으로부터 전동기 74%, 기관차 36%, 발동기 34%, 동 74%, 연 42%, 면화 32%, 휘발유 63% 등 많은 전략물자를 수입하였다.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일본은 전쟁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재정적, 군사적 원조를 떠나선 일본의 승리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미국이 공짜로 원조할리는 없다. 차관이라는 형식도 공짜가 아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미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를 한 가지만 들자. 고종이 가장 믿었던 미국인 알렌 공사는 미국 회사가 조선 최대 운산금광을 차지하도록 공작하였다. 미국은 1897년부터 1939년까지 이 금광에서 1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얻었다. 일본이 조선을 완전 지배한 후에도, 미국 이권의 변동은 그대로 보장되었다는 뜻이다! 

셋째, 미국은 전쟁으로 국고가 완전 고갈된 일본을 구해주기 위해 러시아를 재촉해가며 강화협상을 적극 중재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1905년 1월 영국에게서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보장받은데 이어 2월 《영일조약》까지 체결하게 하였다. 한편 그해 7월,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권을 정식 승인했다. 가쯔라-태프트 밀약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 설정을 용인해 조선왕조의 멸망을 재촉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필요한 일본과 협력을 위하여 한반도가 제물이 된 것이다. 이제 동아시아 차원에서 제국주의의 흐름이 바뀐 것을 말해준다. 영국이 주도하던 제국주의 카르텔을 미·일 ‘복식조’가 접수한 신호탄이었다. 조선강점을 적극 지지해준 미국의 공모는 8월9일 시작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미국의 중재 밑에 진행된 강화회담에서는 일본의 독점적인 조선 지배가 약속되었으며 미국은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전까지 전달하였다. 미국은 이제 세계 제국주의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하였다. 

▲ 탑만 남아있는 정동 러시아 공사관(왼쪽),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미국공사 알렌(오른쪽)

이제 긴 터널을 지나 세계 질서의 축이 다시 바뀌고 있다. 이 흐름을 엄중하고 날카롭게 바라보며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태산 같은 구름과 폭풍이 몰려와도 자신의 힘을 믿고 우리 손으로 우리 운명을 개척하려는 굳은 결심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여기 저기 의존할 외세를 찾아 기웃거릴 것인가. 그 선택이 다시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오늘 러일전쟁을 돌아보는 의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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